[리뷰] 최초의 한류 팬덤이 만든 조용필 대백과사전+악보집
[리뷰] 최초의 한류 팬덤이 만든 조용필 대백과사전+악보집
  • 손정순(시인, 본지 발행인)
  • 승인 2023.07.31 14: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CHO YONGPIL 가황歌皇, 조용필을 노래하다』

아주 특별한 북영상회가 7월 22일 오후 3시, 경기도 안양시 YPC/KRCMI GRACE HALL에서 열렸다. 조용필 팬클럽 미지의 세계가 주최한 『CHO YONGPIL 가황歌皇, 조용필을 노래하다』 편찬 기념 영상회이다.

 

3여 년의 편집과정을 거쳐 탄생한 ‘가황 조용필’ 대백과사전+악보집

오후 1시부터 1층 라운지에서 티켓배부와 함께 친목의 시간, 특별한 만남의 식전 행사가 펼쳐졌다. 팬들을 위해 조용필이 준비한 신선한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고 마시며 행복한 담소를 나누었다. 이어 3시부터 5층 공연장에서 오프닝 공연을 시작으로 3시 30분부터 본격적인 행사가 진행되었다.

먼저 『CHO YONGPIL 가황歌皇, 조용필을 노래하다』 동영상을 선보였다. 짧은 영상 속에는 3여 년간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가황 조용필’의 지난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공식 스케줄부터 악보까지… 그야말로 조용필의 데뷔 55년 위력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대백과사전이었다.

팬클럽 회원인 남양주 수진사 지오 스님의 축사에 이어 편찬위원(이정순·김영미·박미옥)이 무대에 올랐고, 이들은 감회에 젖어 눈물을 흘렀다. 서로 다른 지역에 사는 이들은 3년 동안을 온전히 여기에 쏟았다고 한다.

정말 영혼을 갈아넣었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이들은 2015년 처음 편찬한 책에서 미숙한 부분이나 틀린 내용들을 보완하여 조용필의 데뷔 55주년 공연날 방대한 분량의 ‘가황 백서’를 악보집과 함께 낸 것이다. 개정판을 보고 “조용필 님께서도 그동안 고생 많았고, 고맙다고 전했다“고 미지의 세계 이정순 회장은 밝혔다.

팬들이 갖고 있던 스크랩과 메모글, 신문, 잡지 자료들을 모으고 정리하고 각 앨범과 콘서트에 대한 소개는 물론 리뷰도 정리했다는 이 회장은 “인터넷 등지에 조용필의 이력과 활동, 다양한 정보가 잘못 알려진것이 많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오류를 바로잡고, 조용필의 음악을 공부하고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었다”며 “당시의 일들을 다시 기록하면서 조용필이라는 가수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고 “팬으로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지의 세계는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 국립대학 등 주요 도서관과 기관에 60여 권의 책을 기증했다.

엄격하고 진지한 조용필의 실제 리허설 모습
노래하는 그 순간 그는 가황이었다

YPC장학재단 오광석 이사의 인사말에 이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영원한 신화 조용필(2023 조용필&위대한 탄생)의 영상회가 펼쳐졌다.

지난 5월 13일에 열렸던 55주년 현장공연 편집영상도 현장 못잖게 감동이었다. 다시 공연장에 온 것처럼 뜨겁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 특히 이날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조용필의 실제 리허설 모습을 영상을 통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리허설에서도 조용필은 꼼꼼히 체크하며 자신에게 엄격했고 진지했다. 제스처 하나 하나에 팬들은 반응하며 소리쳤다. 특히 조용필이 의자에 앉아 다리를 벌려 스트레칭을 하자 객석은 까무러쳤다. 다시 리허설에 들어가서는 언제 그랬나는 듯이 실황하듯 프로의 노래솜씨를 보여주었다.

‘가왕’도 ‘국민가수’라는 호칭도 좋아하지 않는 가수 조용필의 마음을 팬들이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버젓이 ‘가황’이라 칭한 까닭을 실감했다. 노래하는 그 순간 그는 가황이었다.

영상회 후 우동집에서 ‘오빠’를 추억하며 담소하는 팬들

영상회를 마치고 팬들과 함께 근처 우동집으로 향했다. 보슬비가 축복처럼 내렸고 우리는 우동을 먹으며, 영상회에서 못다한 이야기꽃을 피웠다. 대구에서, 부산에서, 서울에서, 구리에서 각지에서 모여든 팬들이었지만 ‘조용필’이라는 공통분모 속에 하나가 되었고, 추억들을 쏟아냈다.

“저 KRCMI 건물 6층 창문이 보이는 곳이 오빠 조용필님 사무실이에요. 왜 간판을 달지 않았는지 궁금하죠? 오빠 팬들이나 기관에서 찾아오면 주위에 불편을 줄 수 있어서입니다. 여기서도 오빠의 인품을 알 수 있죠”

팬들의 이야기가 팩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빠의 속마음까지 헤아리는 그들의 진심어린 마음이 내 가슴에 꽂혔다. KRCMI 지하 2층 주차장에는 YPC 전용주차공간이 있었다. 그 옆 공간에 차를 세웠을 뿐인 데도 내 가슴이 뛰었다.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도 팬들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오빠로 인해 더 열심히 살게 되었고, 오빠의 노래를 들으며 피로를 잊고 삶의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다. 역시 가황 조용필의 팬들이었다.

팬들이 편찬한 조용필 대백과사전과 악보집
가황 조용필, 위대한 역사가 될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중고교시절부터 ‘오빠’팬이어서 지금까지 베스트 프렌드로 지내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우린 이제 오빠 찐팬이라고 하면 안 되겠어.”
“왜? 40여 년 동안 한결같은 우리가 오빠 찐팬 아니면 누가 오빠 찐팬이야?”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우린 그냥 일반 팬이었어.”
“오늘 영상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
“조용필 대백과사전과 악보집이 55주년 공연 때 개정판으로 나왔잖아. 글쎄 그걸 에디터도 아닌 팬클럽 미지의 세계 운영진 세 명이서 3년간 만든 거래. 판형이 국배판이고 양장본인데 대백과사전은 960쪽. 악보집은 504쪽이야. 출생에서부터 각종 앨범과 육필 악보, 어록, 공연 기록과 포스터, 노래연습실 목록까지 조용필의 모든 것을 집대성했어. 한 장, 한 장 그들이 정성들인 공력이 엿보이는 데 이 모든 것을 아마추어인 팬들이 편찬했다는 사실이 에디터로서도 존경심이 들 정도야. 한 장 한 장 오빠의 역사를 보면서 추억에 젖기도 하고 너무 감동했어. 그리고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너무나 미안했어.”
“그랬어, 악보집 빨리 보고 싶다. 전곡이 다 실려 있는 거지. 내일 나 니가 놓고간 오빠 LP판도 전달할 겸 서울에 올라갈게.”

조용필 님의 54년 음악 생활에 40여 년 행복했던 팬들이 모여 미약한 힘이나마 모으고 모아서 조용필 대백과사전이라는 『CHO YONGPIL 가황歌皇, 조용필을 노래하다』를 다시 한번 만들었습니다. 54년 역사의 주인공답게 쉬운 작업도 간략하게 정리되는 일대기도 아니었지만,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며 새록새록 떠오르는 조용필 님에 대한 기억과 함께 작업했던 긴 시간이 힘들고도 행복했습니다.
조용필 님의 위대한 역사를 기록하며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 커뮤니티 및 대중매체에 기록된 자료 중 오기표기. 특히 1950년-1979년 조용필 님의 역사 기록은 어디에서도 점검할 수 없는 조용필 님 본인만이 점검할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 『CHO YONGPIL 가황歌皇, 조용필을 노래하다』 머리글, 조용필 팬클럽 미지의세계 운영진 일동

조용필 팬이라는 공통분모로 절친이 되다
오빠 노래, 오빠 사랑, YPC 연구회

친구와 나는 고등학교 때 이과생이었다. 우리가 독서실에서 공부보다도 유일하게 더 열심이었던 것이 있었다면 오빠 노래였고, 오빠 사랑이었고, 오빠 연구회였다. 오빠 팬이라는 공통분모로 우리는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다. 친구와 나는 우리가 평생 행복할 수 있는 삶이 무엇일까 고민했고, 과감히 음악으로 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YPC 연구회를 만들었다. 아침에 친구의 집에서 눈을 떴을 때 친구가 들려주는 오빠의 노래와 피아노 연주는 감동이었다. 친구는 특유의 피아니즘을 느끼게 하는 피아노선율이 너무나도 아름답다며 〈친구여〉를 특히 좋아했다. 성악을 전공한 친구는 연주는 물론 작곡에도 재능이 있었다. 그는 영화나 드라마 OST를 편곡해서 연주하기도 했는데 오빠의 곡 만큼은 절대 편곡하지 않았다. 오빠 곡은 그 자체로 더 이상의 극적인 효과는 물론 모든 리듬이나 화성에서 새로운 변화와 해석을 가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곡이 절묘한 선율이자 숭고하고 거룩하다는 것이다.

한 일화를 전하자면 이 친구는 결혼 전부터 현재의 남편과 오빠 공연장을 자주 찾았다. 한 번은 공연 날 친구가 열이 펼펄 나고 아팠다. 아무래도 공연장을 가기는 무리라 판단되어 만류했지만 그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부축하여 겨우 자리에 앉혔는데 그 순간 “기도하는~” 첫 구절이 울려퍼졌다. 기진맥진 했던 친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아!”하고 함성을 내지른 것이다.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공연 내내 소리를 지르는 친구를 보고 남편은 혀를 찼다. 이처럼 우리에게 조용필의 노래는 편두통마저도 깔끔하게 치료해주는 마술이었다.

친구와 나는 작년 54주년 공연 때는 함께 공연을 봤고, 리뷰도 썼다. 친구는 “내가 조용필의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노래에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 마음에 울림을 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높은 고음을 부르면서도 가사 전달력이 정확한 가수는 조용필이 거의 유일하다. 그는 진정한 음악인”(《쿨투라》 2023년 1월호)이라고 평했다.

내가 조용필을 만난 것은 초등학교 때였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이미 스타였지만 어린 나는 조용필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러다 1980년 1월, DBC 동아방송 라디오 드라마 〈창밖의 여자〉 주제가인 〈창밖의 여자〉가 대히트를 했고, 조용필의 열성팬이었던 막내 이모와 4살 위 사촌언니 덕분에 자연스럽게 조용필의 노래를 매일 들으며, 나도 모르게 젖어들 듯 매료되어 버렸다. 그때부터 자칭 조용필 팬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조용필의 열성 팬클럽이었고, 뭔가 있어보이고 싶어서일까? 가창력으로 타고난 친구를 이길 수 없어 몇 친구와 YPC 연구회를 만들어 조용필에 대한 모든 자료를 모았다. 고등학교에서는 이미 피아니스트였던 친구 희정이와 시인이자 작사가였던 태규를 만났다. 그리고 PKT 등과 함께 기타를 치며, 건반을 두드리며 조용필의 노래에 심층했던 순간들이 참으로 행복했다. 유성호 교수의 『문학으로 읽는 조용필』을 쿨투라에 1년 연재한 후 단행본으로 출간했을 때, 손희 에디터는 당시의 나를 이렇게 표현했다.

어린 시절, 내 언니는 가수 조용필을 좋아했다. 언니의 방으로 들어서면 온갖 잡지와 신문 등에서 오려낸 스타 조용필의 사진과 글이 빼곡히 도배되어 있었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나였지만 1980년에 나온 조용필의 제1집 앨범 《창밖의 여자》에 수록된 표제곡 가사를 지금도 암기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언니 덕분이다. 그 가사의 심오한 뜻을, 사랑을 여덟 살의 초등학생이 이해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지만 무언지 모르게 어린 가슴에도 이는 잔잔한 파문이 있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그 노래를 열창하던 언니를 따라 나또한 얼마나 가성을 내질렀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벌써부터 딴따라 흉내낸다’ 고 아버지께 된통 혼나기도 했다. 아버지께 혼나도 언니의 팬심은 일편단심,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이어졌다. 이불 속에서 불러대던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친구여〉, 〈허공〉의 추억이 지금도 새록새록하다. 또한 사촌언니와 조용필 콘서트를 보러간다고 따라나섰던 언니가 대구역에서 아버지께 붙잡혀 집으로 돌아와서는 온종일 밥도 먹지 않고 펑펑 서럽게 울던 그 시절, 그 무엇이 우리의 영혼을 슬프도록 간절하게 했을까?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도 끝나지 않던 그 열병의 이유를…
한땀 한땀 조용필의 음악과 그 역사를 문학으로 기록한 이 책은 왜 조용필이라는 이름에는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꼭 붙여야하는지, 그 전율적인 뮤지션의 음악 세계를 ‘시인 조용필’로 명명한다.
- 『문학으로 읽는 조용필』 서평, 손희(작가 에디터)

친구가 곧 도착한다고 한다.

우리는 다시 순수했던 그 시절로, 오빠의 팬으로 돌아갈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