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70년대 청년문화의 상징, 영원한 청년작가 최인호를 호출하다
[좌담] 70년대 청년문화의 상징, 영원한 청년작가 최인호를 호출하다
  • 쿨투라 cultura
  • 승인 2023.09.0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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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기 맞아 제정한 제1회 최인호청년문화상 수상자는 김애란 작가
한국영상자료원과 최인호 원작영화 〈바보들의 행진〉 특별상영회 가져

일시 2023년 8월 18일(금) 오후 1시
장소 프레스센터 기자클럽
좌담 참석
이장호 제정위원장(영화감독) 배창호 제정위원(영화감독)
김규헌 제정위원(큐렉스 대표변호사) 김홍준 제정위원(영화감독, 영상자료원장)
유성호 심사위원장(문학평론, 한양대 교수) 홍창수 심사위원(극작가, 고려대 교수)
손정순 사회 (시인, 쿨투라 발행인)

최인호는 1970년대 청년문화의 중심에 선 작가이다. 순수문학과 대중문학·문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한국문화사를 새롭게 쓴 영원한 청년작가이다. 소설가이자 시나리오작가였으며, 작사가로 문학, 영화, 드라마 등 한국문화에 끼친 최인호 작가의 영향은 신선하고 거대하다. 최인호 선생의 10주기를 맞아 평소 그를 사랑하며, 함께했던 벗들과 문화예술인들이 뜻을 모아 그의 업적을 기리는 ‘최인호청년문화상’을 제정 ‘제1회 시상식’과 ‘최인호 원작영화 특별상영회’를 개최한다. 8월 18일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기자회견 후 제정위원 이장호 영화감독(위원장), 배창호 영화감독, 김규헌 변호사, 김홍준 영상자료원장, 그리고 심사위원 유성호 문학평론가(위원장), 홍창수 극작가를 좌담에 초대하여 청년문화의 상징인 최인호 작가와 그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편집자 주

손정순 안녕하세요? 최인호 선생님께서 하늘의 별이 되신지 벌써 10년이 되었습니다. 최인호 작가 10주기 추모행사의 기획·주관을 맡은 《쿨투라》에서 ‘최인호와 청년영화’라는 테마를 마련했는데요. 평소 최인호 선생님과 친분이 두터우셨던 분들과 연구자를 좌담회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먼저 최인호 작가와 초중고 벗이자 최인호 원작영화 〈별들의 고향〉으로 감독데뷔를 하신 이장호 감독님께서 이번 최인호청년문화상 제정위원장을 맡으셨는데요. 최인호청년문화상 제정에 대한 배경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왼쪽부터 윤정희, 백건우, 황정순(최인호 부인), 이경태 감독, 이장호, 최인호. ⓒ이장호
왼쪽부터 윤정희, 백건우, 황정순(최인호 부인), 이경태 감독, 이장호, 최인호. ⓒ이장호

잊혀져가는 최인호 작품과 청년문화 정신 다시 되살리고자 최인호청년문화상 제정

이장호 인호는 제게 각별한 친구였습니다. 저는 일생동안 최인호 친구의 은혜로 살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번 10주기를 맞아 배창호 감독, 김규헌 변호사와만나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추모를 해야 되지 않겠나 싶어서 준비해왔습니다. 10주기 행사 진행을 위해 기획과 주관사가 필요하여 문학과 영화 중심 문화잡지를 발행하고 있는 《쿨투라》 손정순 대표를 만났습니다. 최인호 상 제정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는데 손 대표가 ‘청년문화상’이라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내놓아서 ‘최인호 청년문화상’ 제정으로 공감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청년문화는 사람들이 잊고 있었던 당시의 청년문화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그때 70년대 최인호의 ‘청년문화 선언’을 통해서 무척이나 긍지를 느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 보니 저희가 어떤 청년문화의, 한글 전용 세대의 제일 시조처럼 되었는데요. 이후로 태어난 한글문화 전용 세대가 가요라든지 뭐 연예계 쪽이라든지 영화라든지 이런 쪽으로 상당히 독특한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면서 그 이전에 외국 문화에 대한 선호도를 갖고 있었던 관객들이 점점 한국문화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런 모든 시초가 최인호의 청년문화 선언 이후에 생긴 거라고 생각을 했고, 이번 최인호 10주기를 맞이하면서 ‘청년문화상’이라는 이름으로 상을 제정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잊혀지기 전에 ‘청년문화’의 정신을 현재의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되살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9월 25일이 최인호가 떠난 지 10주기가 되는 날인데 그날 서울역사박물관이 휴관이라 할 수 없이 이틀을 더 당겨서 9월 22일 날 최인호의 10주기 추모식과 함께 제1회 청년문화상 시상식을 개최합니다.

1975년 이장호 감독과 지인들이 서울 서교동에 위치한 고 최인호 작가의 집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장호
1975년 이장호 감독과 지인들이 서울 서교동에 위치한 고 최인호 작가의 집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장호

손정순 이장호 감독님께서 최인호청년문화상 제정에 대한 의미와 그간의 여정을 잘 설명해주셨습니다. 최인호 선생님이 서울중·고등학교를 나오셨는데 옛 서울고등학교 자리였던 서울역사박물관에서의 10주기 추모행사와 제1회 청년문화상 시상식은 매우 뜻깊어 보입니다. 그리고 배창호 감독님도 최인호 선생님과 서울고와 연세대 선후배로 아주 특별한 관계이십니다. 최인호 작가의 원작영화를 배 감독님께서 가장 많이 만드신 분이기도 한데요. 추억이라든가 에피소드도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조감독들과 함께 찍은 사진(가운데가 배창호 감독). ⓒ배창호
조감독들과 함께 찍은 사진(가운데가 배창호 감독). ⓒ배창호

배창호 예 최인호 선생님의 10주기를 맞이해서 아무래도 좀 평소에 가까웠던 분들이 그분의 10주기를 기리고 또 문화적 업적을 좀 쉽게 떠올리기 위한 어떤 행사를 고민하다 이장호 감독님과 김규헌 변호사님과 함께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최인호 선생님하고 일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무척 가까운 관계였습니다. 우선 제 영화 18편 중에서 최인호 선배님의 원작이 6편입니다. 제게 시나리오를 가르친 스승이기도 하셨고 지금까지도 제게 많은 영향을 주시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학교 대선배시기도 합니다. 제가 1971년도에 대학교 1학년에 들어가니까 연세대학교에서 가장 나이 많은 복학생이 있었는데 그분이 최인호 선배님이셨고 한 학기지만 같이 학교를 다닌 인연이 있습니다. 또, 연희극 연구회라는 연극 단체의 선배이시기도 하고 저를 동생처럼 제자처럼 아주 아끼고 사랑해 주셨으며, 제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큰 완벽完璧이 되어주셨습니다.

청년문화상이라는 것을 제정하게 된 큰 이유 중에 하나는 70-80년대를 지나신 분은 잘 아시겠지만 소위 그 당시 70년대의 청바지 문화, 기타 그리고 장발, 이러한 어떤 문화적인 현상을 기성 보수 일부에서 ‘퇴폐 문화다’라고 매도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일간지에 ‘청년문화 선언’이라는 글을 기고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청년문화라는 화두를 일으킨 것이었는데, 그분의 청년문화 주창은 제가 느끼기에는 〈고래사냥〉이라는 노래 가사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고 봅니다. 그분이 직접 작사를 하셨는데요. 그 당시 70년대 독재의 암울한 시절에 정치 사회적으로 무거운 관계 속에서 가사처럼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가슴에는 하나가득 슬픔뿐”이 떠나지 않고 “그래도 생각나는 내꿈 하나는/조그만 예쁜 고래 한 마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떠나자는 거죠. 그러니까 억압받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고래라는 어떤 상징적인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도 나왔지만, 그 고래를 찾는 이미지가 이분의 청춘 소설, 청춘 영화 속에 많이 그려져 있었고, 그 고래는 제가 해석하기에는 젊은이들의 정체성 찾기였고 그 정체성은 바로 다름 아닌 우리 가슴속에 있는 ‘사랑’이라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또 이분이 1988년도에 가톨릭에 귀의하셨습니다. 종교 쪽으로 심화하셔서 작품이 방향 전환을 했고, 천주교 서울대교구 공식 주간 소식지인 《서울주보》 ‘말씀의 이삭’ 코너에 짤막한 묵상글을 실었는데 그것이 가톨릭 신자들에게 많은 감동과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이후엔 《서울주보》에 쓴 글을 묶은 묵상집도 내셨습니다. 『어머니가 가르쳐준 노래』라는 자전적이고 종교적인, 어머니에 대한 회상을 발견하셨고 후일에는 버릇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소설로 쓰고 싶어 하셨습니다.

2008년부터 침샘암으로 투병 중이었던 최인호 선배님은 9주 동안 《서울주보》의 ‘말씀의 이삭’ 코너에 감동적인 투병기를 실었습니다. 그 글들은 투병기를 넘어 신앙과 삶에 대한 폭넓은 성찰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원고지에서 죽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시면서 10년 전 9월 25일 운명하셨습니다. 이제는 MZ세대나 또 문학청년들한테도 선배님이 많이 잊혀져 가는데 그분이 남기신 여러 문화의 영역, 소설뿐만이 아니라 연극, 희곡, 잡지 등 다방면의 문화적인 업적을 부디 잘 기억하시고 이번 기회를 통해서 대중들에게도 많이 알려졌으면 합니다.

손정순 배창호 감독님의 최인호 작가님에 대한 추억과 애정이 담긴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으로 또 최인호 선생님의 서울고 후배이신 김규헌 변호사님의 말씀을 청해 듣도록 하겠습니다. 김규헌 변호사님은 문화예술 전문변호사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김규헌 반갑습니다. 문화예술계 여러 훌륭한 분들 사이에서 비전문가가 끼어서 최인호 작가와의 추억을 되살리고 그분의 뜻을 기리는 작업에 동참했습니다. 최인호 작가는 어떠한 의미를 우리들에게 지금 남기고 있는가, 그것이 지금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하나의 화두라고 할 수 있겠는데 청년문화 선언을 일간지를 통해서 우리나라에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1974년도입니다.

그렇지만 전 세계적으로 이른바 카운터 컬처, 반문화라고 해도 되고 저항문화 이런 것이 불길같이 펼쳐나온 것이 1960년대 후반부이고 특히 1968년도에 프랑스 파리의 집단 시위, 학생시위 또 그다음에 미국에서의 히피즘이라든가 비트 제너레이션에 이어서 다양한 음악과 문학에서의 새로운 물결, 이런 것이 전 세계적으로 하나의 문화적인 각광을 받고 있었습니다.

문화라는 개념을 다수의 어떤 특정 세대에서 사회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생활양식 내지 하나의 상징체계라고 볼 때 최인호 작가가 1974년도에 이르러서 이러한 청년문화라는 개념을 우리에게 제시한 것은 지금까지도 생생히 살아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문화의 세대는 예를 들어서 이병주, 이청준, 김승옥 등으로 내려왔는데, 위원장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그와는 또 다른 한글세대에서 최인호 작가는 새로운 문장과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접근으로 우리들의 문화 지평을 엄청나게 넓히셨습니다. 그리고 그 레거시는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발표한 청년문화 선언이라는 정신을 지금 50년이 지난 지금 이 단계에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또한 그것을 어떻게 우리의 삶에 활용할 것인가 이런 것을 하나의 담론으로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한 지금 2023년도 한국에서 문화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일까, 최인호 작가가 이러한 우리의 아이덴티티에 끼친 영향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사회학적·문화사적인 접근에 관한 노력도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10주기를 맞이하여 이러한 시대적 요청 사항을 받아들여서 추모행사를 하고 또 청년문화상을 제정하여 시상을 하고 또한 그분이 문학뿐만 아니라 영화 음악 이런 데서 남긴 그 수많은 업적을 그분의 원작영화 대표작을 통해서 살펴보고 하는 이런 일련의 행사를 하게 된 것은 대단히 뜻이 깊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단지 한 개인의 혁명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50년간 우리를 관통해 온, 한국 사회를 관통해 온 청년문화라는 컨셉을 이 시대에 어떻게 다시 살려야 하는가에 대한 과제라는 점을 저는 다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회 수상자 소설가 김애란.
1회 수상자 소설가 김애란.

청년 세대의 감수성을 개성적으로 드러낸 김애란 작가, 제1회 최인호청년문화상 수상

손정순 한국사회를 관통해온 청년문화를 다시 잘 살려내야 한다는 김규헌 변호사님의 말씀 잘 새기겠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제1회 최인호청년문화상 심사위원장을 맡으신 유성호 교수님께 심사경위와 심사평을 한 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성호 안녕하세요? 최인호청년문화상의 취지와 제정 과정은 세 분 제정위원께서 말씀해주셨는데요. 저희 심사위원들은 그러한 취지에 가장 적합한 수상자를 고르는 일에 중점을 두고 심사를 진행했습니다.

심사는 최인호 선생께서 보여주신 세계가 여러 차원에 걸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연히 선생의 본령은 문학에 있지만 선생은 평생 연극, 영화, 음악, 대중문화에 걸쳐 다양한 컨셉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야 전문가들을 모두 모시고 심사를 진행하였습니다. 문학평론가 이광호 선생, 영화평론가 강유정 선생, 극작가 홍창수 선생,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 선생, 방송인 김태훈 선생을 모셔서 제가 위원장을 맡아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여러 논의를 거친 끝에 김애란 작가를 제1회 수상자로 선정하였습니다.

일단 소설가가 수상자로 결정된 셈인데요. 먼저 최인호 선생은 누가 뭐래도 70년대~90년대를 가로지르면서 「타인의 방」, 「깊고 푸른 밤」, 「별들의 고향」, 「겨울 나그네」 등 인지도 높고 서사성도 높은 그런 작품들을 쓰신 대작가이기 때문에 1회 수상자가 소설가로 결정된 것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러한 결정에 심사위원들의 동의 과정이 있었고요. 또 김애란 작가는 대중들에게 퍽 인지도도 높고 베스트셀러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평단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청년 세대의 감수성을 누구보다도 개성적으로 드러낸, 요즘 우울과 고민에 빠진 청년 세대에게 영감과 희망을 주는 그런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최인호 세대의 청년과 김애란 세대의 청년이 같을 수는 없지요. 이전 세대의 청년이 낭만과 저항의 상징성을 갖추고 있었다면, 지금 청년들은 그보다는 좀 음각되어 있는 측면이 많습니다. 그 음각의 요소들을 김애란 씨가 아주 날카로운 감수성으로 보여주었다고 심사위원들은 생각했습니다. 서사적으로도 매우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주면서 시대적 의제를 다루는 시각과 그 경쾌한 문체 역량까지 더하면 김애란은 정말 수상자로 적합한 작가라고 심사위원들은 판단했습니다.

조금 전 배창호 감독님께서 〈고래사냥〉 가사에 대해 이야기해주셨는데, 저도 일찍부터 이야기하려고 했습니다. 〈고래사냥〉 가사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대목은 “우리들의 가슴 속에 뚜렷이 있다/한 마리 예쁜 고래 하나가”입니다. 아까 배 감독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고래 하나가 시대를 바꾸어낸 여정이 김애란 소설에 암시적으로 담겨 있다고 판단해서 심사위원들은 최인호 선생의 청년문화 정신에 가장 가까우면서도 또 스스로 탁월한 예술적 성취를 이룬 작가로 김애란 씨를 뽑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 모든 분들의 질책을 겸허하게 수용하면서 2회, 3회 더 좋은 수상자들을 뽑는 과정으로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1회 최인호청년문화상 제정위원회 1차 회의 후 담소하는 위원들
제1회 최인호청년문화상 제정위원회 1차 회의 후 담소하는 위원들

최인호 작가의 연극에 대한 깊은 조예가 소설 창작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 것

손정순 심사위원장을 맡으신 유성호 교수님의 심사경위를 들어보니 1회인 만큼 심사위원분들이 오랜 시간 심사숙고하여 정말 좋은 수상자를 선정한 것 같아 기쁩니다. 그리고 오늘 좌담에는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신 극작가이자 연출가이신 홍창수 교수님께서도 참석하셨습니다. 최인호 작가는 문학과 영화, 음악 분야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연극이나 극작활동에 대해서는 연구가 부진한 편입니다. 최인호 작가의 극작 활동과 연출적인 부분에서는 어떤 성과가 있었는지 홍창수 교수님께 여쭤보겠습니다.

홍창수 최인호 작가는 당연히 위대한 소설가로 우리나라에 알려져 있고 또 여러 영화감독께서 원작을 영화로 만들어주셔서 일반 사람들한테는 소설과 영화가 더 친숙할 겁니다. 근데 제가 자료를 찾다 보니 그분이 과거에 연극과 관련하여 기록을 남긴 게 꽤 있습니다. 그 기록을 보니까 이장호 위원장님도 잘 아시겠지만 서울고등학교 다녔을 때부터 연극반에 있었고 또 대학교 때는 아까 배창호 감독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연세대학교 연극반에 들어갔습니다. 고등학교 때 가을 예술제에서 제임스 콘라드의 연극 〈빌리 버드〉에서 선원 역을 했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최인호 작가는 고등학교 2학년때 신춘문예로 등단하죠. 소설가로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이미 그때부터 연극에 관심이 많아서 대학교 가서도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을 했고 거기에도 성이 차지 않아 여러 타 대학들의 연극동아리 학생들과 모여서 본인이 창작한 희곡 〈메리 크리스마스〉를 Y.M.C.A 강당에서 4회 공연을 했습니다.

근데 본인이 직접 제작을 하려다 보니까 돈이 없잖아요. 그래서 본인 시계를 전당포에 맡기는 등 의욕적으로 공연을 진행했는데 적자를 봤습니다. 지금에 와서 최인호 작가의 청년 시절을 돌이켜 보면 본인이 스스로 창작도 하고 연출도 하고 제작도 하는 등 많은 일을 했다는 것이 정말로 기막힌 일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혼자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최인호 작가는 연극에 조예가 깊었고요. 그리고 제정위원 선생님들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특히 그 당시에는 연극예술이 대학문화에서 한 줄기를 형성해 가고 있어서 대학생들이면 누구나 다 연극에 대해 관심이 있었죠. 기록을 보니까 1969년에 ‘전진극회’라는 극단이 만들어지는데 거기 창단 발기 동인으로 참여하고 1971년 《현대문학》에서 만든 극단에도 참여했습니다. A팀은 그야말로 전문 배우 팀이고 B팀은 연극을 전공하는 대학생 팀이었고, C팀은 문인들 중심의 팀이었는데 최인호 선생님은 문인팀에 참여하셔서 첫 창작희곡을 올렸는데, 그게 바로 1971년 6월에 공연된 〈달리는 바보들〉입니다. 현대의 전위적 예술의 허위성을 풍자한 작품으로 《현대문학》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1974년 5월 극단 ‘산울림’이 예술극장에서 최인호의 첫 장막희곡 〈가위 바위 보!〉를 공연했고, 1977년에도 같은 극단에서 그의 장막희곡 〈향기로운 잠〉을 공연했습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어떤 주인공이 불면증의 원인을 찾아서 세상 밖으로 나가고 다양한 상황에서 속물적인 인간 군상을 만나며 타락하고 무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불면증의 원인이 결국은 세상의 어떤 타락, 부패 그런 것들이라는 상징성을 강하게 보여주는 작품을 창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60년대 70년대 문학이 그런 청년문화의 하나의 중요한 줄기로서 자리를 잡았는데 최인호 작가님도 소설 못지않게 연극에 많은 관심을 갖고 직접 공연 제작에도 참여를 하고 작품을 쓰셨습니다.

제가 자료들과 작품들을 읽으면서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게, 이분의 소설들, 특히 초기 소설부터 연극성이 강하다는 것 때문입니다. 예컨대 『타인의 방』 같은 경우는, 거의 모노드라마에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니까 주인공이 아파트 복도에서 이웃과 잠시 한두 마디 대화 나누는 것과 소설 말미에 등장하는 아내라는 인물이 있긴 하지만, 이들을 제외하면, 자기의 아파트 방에 들어가서 느끼는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을 다룬 서사는 그 자체가 모노드라마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이 작품의 연극성 때문에 1988년에 극단 신협에서 전세권 연출로 연극 〈타인의 방〉이 공연된 것일 겝니다. 그리고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견습환자」 역시 환자 병실이라는 단일한 공간에서 연극적으로 풀어갈 수 있는 연극성이 기본적으로 강하다고 느꼈습니다. 최인호 작가가 연극에 많은 관심을 갖고 직접 공연에 참여했던 것은 어쩌면 그 당시 대학 영문과 출신이어서 서양 희곡도 많이 읽고, 당시에 공연된 서양 연극들, 즉 우리말로 번역된 번역극들을 많이 관람했기 때문에 서양 연극에 대한 조예도 깊었다고 생각됩니다. 작가가 좋아했던 희곡들은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테네시 윌리엄즈의 〈유리동물원〉, 뒤렌 마트의 〈노부인의 방문〉, 셸라 딜래니의 〈꿀맛〉이었습니다. 이렇게 고교시절부터 갖기 시작한 연극에 대한 깊은 관심이 최인호 문학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소설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군대시절. ⓒ최인호
군대시절. ⓒ최인호
현대문학상 수상. ⓒ최인호
현대문학상 수상. ⓒ최인호

손정순 홍창수 교수님께서 미처 알지 못했던 최인호 작가님의 왕성한 연극 활동상을 들려주셔서 무척 흥미진진하고 새롭습니다. 제1회 최인호청년문화상 제정을 계기로 최인호 연구가 보다 깊어지고 확장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번에 제정위원회는 최인호 선생 10주기를 맞아서 제1회 최인호청년문화상도 제정했고, 또 한국영상자료원과 공동주최로 9월 23일 날 ‘최인호 원작영화 특별상영회’도 진행합니다. 상영작은 최인호 원작,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입니다. 공동주최자이자 추진위원으로 참여하신 김홍준 영상자료원 원장님께 이 작품의 의미와 한국영화사에 끼친 영향 등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바보들의 행진〉 스틸컷.
〈바보들의 행진〉 스틸컷.
〈바보들의 행진〉 한국영화 100년.
〈바보들의 행진〉 한국영화 100년.

최인호 원작영화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
요즘 청년문화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움 또는 낭만 같은 잔잔한 감동을 느끼게 할 것

김홍준 〈바보들의 행진The March of Fools(Babodeul-ui haengjin)〉은 1975년 ㈜화천공사에서 제작한 최인호 원작·각본(각색), 하길종 감독의 청춘영화입니다. 저는 〈바보들의 행진〉 개봉 당시 대학 1학년이었고, 이 영화를 개봉관에서 직접 봤습니다.

당시는 정치·사회적으로도 자유가 구속되고 억압받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시기였지만, 전쟁 이후 태어난 세대들이 처음으로 성인이 되고 그 새로운 세대들이 본격적인 소비문화의 주체가 되었고, 본격적으로 대중문화의 꽃이 피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70년대 초반 대학생들은 한쪽에서는 유신반대 데모로 학생들이 잡혀가기도 하는 시대에 대한 울분이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부모 세대들이 즐겨듣던 전통가요나 트로트 같은 것들을 촌스러워하고 멀리하면서 양희은 송창식, 윤형주가 부르는 새로운 노래들, 그러니까 미국이나 유럽에서부터 바다를 건너온 새로운 서양식 대중문화에 심취했던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 청년문화라는 말을 언론에서 쓰기 시작했는데 그렇다면 그전까지 청년들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1970년대부터는 그전 세대와는 확연하게 다른 청년들만의 새로운 문화가 형성된 것입니다.

청년문화에는 이중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굉장히 저항적이고 당시 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는 청년문화가 있는 반면에 정치적인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엔터테인먼트로만 소비되는 두 가지 양상이 동시에 있었습니다.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청년문화에 대해 당시 언론에서는 3가지 상징으로 표현했습니다.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였습니다. 바로 〈바보들의 행진〉에 나온 병태의 모습이 청바지를 입고 생맥주를 마시고 몰려다니며 노는 대학생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우선 영화 수입이 자유화되어 있지 않았고, 외화 쿼터 제도라는 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화사가 수입할 수 있는 독점적인 라이센스를 가지고 있으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 영화를 만들 이유가 없었습니다. 외국영화만 수입해서 돈을 벌면 되었으니까요. 그 당시 젊은 사람들이 한국 영화를 보러다니면 주위에서 이상하게 볼 정도였는데 그것을 한 번에 바꿔놓은 영화가 바로 1974년에 나온 최인호 신문연재소설 원작인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입니다. 최인호 작가가 쓴 『별들의 고향』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많은 영화사에서 판권을 사려고 했는데 당시 이장호 감독님이 그 작품의 영화화 판권을 사고 화려한 데뷔를 하게 되었습니다.

최인호 작가의 또 다른 연재소설 『바보들의 행진』은 기승전결이 있고 우여곡절을 겪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대학생들의 모습을 200자 원고지 10장 정도 짤막한 에피소드로 그때그때 완결되는 작은 이야기들의 모음으로 연재했던 것이었습니다. 당시 대중적인 작가로 명성을 구가한 최인호 원작이었기 때문에 〈별들의 고향〉을 만들었던 화천공사에서 후속작으로 〈바보들의 행진〉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별들의 고향〉이 흥행했던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지만 일단 음악 자체도 이전의 한국음악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별들의 고향〉은 그때 막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던, 요즘으로 치면 언더그라운드, 인디펜던트라고 할 수 있는 이장희, 송창식의 음악을 삽입했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부분을 잘 다듬었던 강근식이라는 뛰어난 기타리스트이자 음악감독이 있었습니다. 그는 〈별들의 고향〉에 이어 〈바보들의 행진〉 음악감독을 맡았고 OST로 송창식의 〈왜 불러〉를 비롯하여 〈고래사냥〉, 그리고 〈날이 갈수록〉을 삽입하였습니다.

저는 1975년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3월에 학교를 다니다 보니 학교 분위기가 이상했습니다. 그러다가 학교에서 데모가 터졌고 며칠 후 휴교령이 내렸습니다. 대학생이 된 것도 아니고 되지 않은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상황에서 무위도식하던 중에 〈바보들의 행진〉이 개봉을 했고 저는 이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습니다. 당시 이 영화를 보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중간에 뭔가 없어진 것 같고 감독이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잘 전달이 안 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후 1980년 서울의 봄이 되면서 민주화의 바람이 잠시 불었을 때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을 복원 상영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검열 때 잘려나간 신들을 다시 붙여서 특별상영을 하는 자리였는데요 전 그때 군대 말년휴가를 나와서 그 영화를 보면서 비로소 하길종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서 뭘 하려고 했는지를 알게 되었고, ‘내가 이 영화를 오해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최인호 원작영화 특별상영회에서 보게 될 〈바보들의 행진〉이 바로 원래 검열에서 잘렸던 부분을 복원한 복원판입니다. 그런데 완전한 복원판은 아닙니다. 원래 이 영화는 20분 정도가 더 있었다고 합니다. 하길종 감독은 1941년생이며 서울대학교 불문과를 나왔습니다. 4·19 세대의 특징은 굉장히 낭만적이면서도 민주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고 지식인으로서의 부채의식 같은 것을 가진 세대입니다. 하길종 감독은 서울대 3대 천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학 시절 굉장한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그는 군사정권에 대한 환멸과 불안을 갖고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미국에서는 LA에 있는 UCLA 영화과에서 공부를 하게 되는데요. 하길종 감독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는 UCLA에서 영화공부를 한 장래가 촉망되는 새로운 영화인이 도착했다는 매스컴 세례도 받게 됩니다. 당시 미국의 사회분위기는 60년대 히피 문화의 영향 속에서 굉장히 자유분방했습니다. 그런데 하길종 감독이 돌아온 1972년 유신이 선포되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당시 주목을 받던 하길종 감독은 〈화분〉과 〈수절〉을 연출했으나 흥행에 실패하고 이어서 〈바보들의 행진〉을 연출하게 되었습니다.

〈바보들의 행진〉이 완성된 후 기술시사가 진행되고, 기술시사가 끝나자마자 난리가 났습니다. 영화 속에 포함된 기생관광에 대한 부분이 문제가 되어서 10여 분이 통째로 잘려나갔고, 또 군데군데 잘려나갔습니다. 결국 영화가 무슨 영화인지 알 수가 없게 되어버렸죠. 그런데 아무리 검열이 심했어도 원판 네거티브를 잘라가진 않는데 문제가 되는 장면의 원판 네거티브를 중앙정보부에서 제출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담당자분이 화나고 억울한 마음에 부분 부분 잘린 부분은 제출하지 않고 숨겨놨다고 합니다. 그 후 유신정권이 끝나고 1980년 봄 다시 필름을 붙여서 복원 상영을 했지만 네거티브를 제출한 10여 분은 영영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1980년 봄, 남산에 있던 영화진흥공사 시사실에서 이 영화의 복원판을 보면서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바로 70년대 이 영화를 개봉관에서 보면서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제대로 보고 느낀 충격이었습니다. 한 말씀 더 드리자면, 이 영화에 참여하셨던 정일성 촬영감독님을 비롯 여러분들을 제가 영화계에 들어온 다음에 거의 다 만나 뵈었는데 이분들에게도 〈바보들의 행진〉은 굉장히 특별한 영화였다고 합니다. 단순히 ‘이영화가 흥행이 되면 좋겠다’라기보다 정말 뭔가 신들린 것처럼 ‘우리는 중요한 영화를 하고 있고, 굉장히 훌륭한 영화를 만들고 있다’라는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보통 영화를 찍을 때보다 2배 3배 더 열심히 했다는 증언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 만큼 이 영화는 시대가 흘러 새로운 세대가 보면 또 새로운 의미가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최인호 원작영화 특별상영회’ 작품인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은 요즘 청년문화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움 또는 낭만 같은 것들에 잔잔한 감동을 느끼게 할것입니다.

하길종 감독.
하길종 감독.

배창호 70년 대 최인호 선배가 가진 젊은이들에 대한 문화적인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저는 “바보들의 행진” 영화를 대학교 4학년 때 봤어요. 원작이 일간 스포츠에 많은 이들의 기대 속에 연재되던 콩트 형식의 소설이었고 그 연재 소설 때문에 신문 판매 부수가 늘어났다고 해요. 〈바보들의 행진〉 원작이 하길종 감독에 의해서 영화화된다고 하니까 젊은이들의 관심이 아주 높아져 있었습니다. 영화도 원작처럼 재미있고 신선했지요. 당시 무거운 사회, 정치적 분위기에서 억눌리며 살고 있던 젊은이들과 함께한 의미 있는 영화이기도 했구요.

이 영화가 개봉하고 십 여년이 지난 어느 날, 지금은 없어진 국도극장에서 이 작품의 특별 상영회를 한 적이 있어요. 당시 거기서 최인호 선배님과 함께 영화를 보았는데 끝나고 나서 한참을 펑펑 우시더라구요. 최선배님의 젊은 날의 추억과 회한이 파도처람 밀려온 듯 했습니다. 그래서 10주기 특별 상영작으로 이 작품을 강력하게 추천한 것입니다. 최 선배님이 청춘에 대해 쓴 소설에는 유독 아웃사이더들이 많습니다. 모범생이고 규율을 잘 지키는 친구들이 아니라 소외되고 열등감이 있는 젊은이들이 자주 나옵니다. 제가 찍었던 〈고래사냥〉도 그렇고,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더 공감을 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최인호 선배님의 잘 안 알려진 이력이 하나 있는데요. 70년대 말에 영화감독을 한편 하셨습니다. 자작 시나리오 〈걷지 말고 뛰어라〉입니다. 이것도 아웃사이더의 이야기였는데 이 작품 이후 감독은 더 이상 하지 않으셨어요.

“작가는 글의 신성한 의무를 잊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던 인호 형은 50년 동안 많은 작품을 이 땅에 남기고 떠났습니다. 저는 인호 형과 1983년도에 〈적도의 꽃〉이라는 영화로 함께 작업을 시작했고 〈고래사냥 1, 2〉, 〈깊고 푸른 밤〉, 〈황진이〉, 〈안녕하세요 하나님〉, 〈천국의 계단〉까지 일곱 작품을 작업했습니다. 저에겐 영화계의 은인이자 시나리오의 스승이며 개인적으로는 친형과 같은 분이지요. 이번 행사에 대한 여러 기사에 인호 형의 환한 미소를 짓는 사진을 보니 마치 인호 형이 우리에게 살아 돌아온 곳 같아 기뻤습니다. 인호 형도 하늘 나라에서 이 행사를 반가워하실 것입니다.

손정순 〈바보들의 행진〉을 대학생 신분으로 당시 극장에서 직접 보신 김홍준 원장님의 생생한 증언으로 1970년대 한국에서 가장 재능 있는 감독 중 한 분이 하길종 감독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영화 〈바보들의 행진〉이 시대를 넘어 동시대 청년들에게 유의미한 작품이라는 것도 깨닫습니다. 덧붙이신 배 감독님의 〈바보들의 행진〉 관람과 최인호 작가님과의 에피소드도 이 영화를 최인호 원작영화 특별상영작으로 선정한 이유에 값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9월 23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바보들의 행진〉 관람 후에 GV도 가지는데요. 강유정 평론가의 사회로 김애란 작가 이장호·배창호·하명중 감독님이 게스트로 참여합니다. 동시대 청년 관객들이 많이 참석하여 그들의 눈으로 70년대 청년문화의 상징인 최인호 작가를 새롭게 조명해보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마지막으로 더 추가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시대와 호흡한 청춘의 이름, 최인호
청년문화 선언이 오늘의 청년문화로도 이어지길

이장호 이렇게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대학을 다닌 세대들이 함께 모여 ‘최인호와 청년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최인호와 저는 광화문에 자리한 서울 덕수초등학교, 서울중학교, 서울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오랜 친구입니다. 최인호는 어린 시절 평동에서 자랐고 저는 북아현동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광화문에서 초등학교, 신문로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신촌에서 대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청소년 시절의 문화적 토양은 서울의 서쪽입니다. 인호는 가난했던 청년 시절까지 북아현동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인호의 첫인상은 아직도 생생해요. 작은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 교단에 올라 상을 받는 모습입니다. 인호는 신동이었어요. 우리는 교단에서 상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녀석은 무슨 백일장 대회에 참가하면 늘 상을 받았죠. 신춘문예 당선작은 제목도 또렷이 기억나요. 「벽구멍으로」…. 얼마나 거창해요. 중학교 1학년 때는 같은 반이었는데요. 선생님이 글짓기 숙제를 내줬는데 인호가 연애소설을 써왔습니다. 그걸 읽어본 선생님은 깜짝 놀라서 ‘네가 진짜 쓴 거냐? 베낀 거 아니냐?’라고 캐물으셨죠.

인호는 항상 저를 ‘철부지’라고 불렀습니다. 인호가 목욕탕 위에 있는 사글세 단칸방에서 막 신혼을 시작했던 때에도 저는 종종 술에 취해 건물 밖 배관을 타고 올라가서 신혼집 창문을 두들겼어요. 그러니 부부가 자다가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게다가 『별들의 고향』이 인기를 끌면서 당대 최고의 감독들이 그의 소설을 탐내기 시작했죠. 그러나 인호는 큰 판권료를 제시하는 사람들의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오랜 친구인 제게 영화판권을 줬지요. 아마 인호는 『별들의 고향』 소설을 주지 않으면 제가 어떤 망나니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줬을지도 몰라요.(웃음)

그의 문단 신인 습작 시절에 그가 책상 가까이 두어 무척 아꼈던 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투명한 유리병 안에 흙을 넣어 개미의 굴을 관찰하는 선병질의 창백한 백인 소년의 사진이었는데, 인호는 그게 자기의 내면과 닮았다고 했습니다, 내가 모르는 그의 유년시절의 어떤 정신적 풍경과 닮았을 거라고 나름 짐작해 봅니다. 그는 과잉반응 혹은 과도한 적응으로 세상을 살았고, 그것이 그를 ‘낄낄낄’ 웃게 만들었고, 조숙하게 만들었고, 또 장년이 되어서는 ‘껄껄걸’, ‘허허’ 하고 웃으며 조로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호의 속마음은 그 백인 소년의 느낌처럼 굉장히 예민하고 사회에 대한 저항심이 컸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술꾼」이나 「모범동화」 같은 엉뚱한 상상력의 단편소설이 나올 수 있었던 거죠.

제 인생에서 최인호는 친구라기보다 늘 앞서가는 개척자였고 그 개척의 수혜자는 저였습니다. 그가 신문 소설 『별들의 고향』으로 혜성같이 등단한 인기 작가로 변신했고, 그의 후광을 입고 저도 영화 〈별들의 고향〉으로 어느 날 신데렐라와 같은 젊은 인기 감독이 되었습니다. 인호의 10주기를 맞이한 지금, 젊은 시절 이후론 그와 함께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오랜 세월이 어느새 덧없이 지나갔음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언제나 앞서갔던 최인호는 저보다 먼저 사후의 세계로 들어섰지만 그의 빛나는 작품이 그를 영원한 청년작가로 살아있게 합니다.

문학청년 시절 ⓒ최인호
문학청년 시절 ⓒ최인호

솔직히 말해서 저는 지금의 청년문화는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우리 젊었을 때) 최인호가 청년문화 선언을 자신 있게 들고 나온 것은 저희들이 많이 위축된 때였기 때문이거든요. 왜냐하면 기성세대가 청년들에 대해서 신세대에 대해서 상당히 우월한 그런 시대였고, 그래서 청년들끼리의 어떤, 뭐 자기네들끼리의 어떤 감각으로 청년문화를 주장했지만 그것이 기성세대에 의해서 굉장히 퇴폐적인 걸로 몰렸을 때, 그때 등장한 최인호의 청년문화선언 때문에 우리는 그나마 ‘우리끼리의 문화가 있다’라는 작은 위안을 받았습니다.

지금의 청년문화는 제가 봤을 때 이제 모든 소비의 중심이 청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젊은 세대에 의해서 모든 소비가 이루어지고 유행도 이루어지고 하니까요. 하지만 지금 청년문화를 소비 성향만 갖고 얘기하는 것은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위상, 자신감이라든지 자존감 같은 이런 것들을 통해서 세대를 앞서가며 아우르는 융합점들을 찾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천재 인호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프고, 또 고마움을 느낍니다. 시대와 호흡한 청춘의 이름, 최인호의 청년문화 선언이 오늘의 청년문화로도 이어지고 확장되어 청년들이 다시 한번 일어서고 새로운 정신문화의 일탈을 꿈꾸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손정순 긴 시간동안 좌담에 참석하여 좋은 말씀을 들려주신 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유목민적인 기질을 한국문학사에 족적으로 남긴 문단의 이단아, 눈치 보지 않는 당당한 최인호 작가의 청년문화 선언을 통해, 1970년대는 물론 오늘의 청년문화를 조명해보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최인호 선생님에 대한 좀 더 깊은 작품 세계라든가 문화적인 궤적은 ‘최인호와 청년문화’라는 이번호 테마의 일독을 권합니다. 감사합니다.

 


 

 

* 《쿨투라》 2023년 9월호(통권 11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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