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라이프] 걷고 싶은 만큼 걷는 길, 제주 올레길
[제주 라이프] 걷고 싶은 만큼 걷는 길, 제주 올레길
  • 유혜영(방송작가)
  • 승인 2019.05.01 0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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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유독 흐린 날이 많다그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고 바라보고 하다가 소파에 앉았는데 틈없어보이던 하늘에서 한줄기 빛이 탈출해 우리집 베란다까지 방문해주신다그 빛이 반가와 창문을 여니 살랑 봄바람이 또 방문해주신다.마침 텔레비전에서는 〈스페인하숙〉 재방송을 하고 있다너무도 절묘한 이 상황이 재미있어 픽 웃음이 나온다길이 부르는 소리제주 올레길이 부르는 소리그 소리에 몸을 일으켜 이 봄날, 길을 떠날 채비를 한다.

스페인 하숙은 800Km에 이르는 스페인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들에게 알베르게(순례자숙소)를 운영하며 하루라는 휴식을 안겨주는 프로그램이다차승원 유해진 배정남씨를 보는 재미도 있지만, 제일 여운이 남는 건 숙소에서 나와 또다시 길을 따라 걷는 이름 모를 순례자들의 뒷모습이다왜 남이 길을 걷는데 내 심장이 먹먹해지는 걸까길 위에는 무엇이 있기에 그들은 걷는 걸 선택했을까스페인에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다면 제주에는 올레길이 있다오십을 앞둔 여성이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우연과 필연으로 담아낸 한생각을 그녀의 고향 제주에서 멋지게 이뤄낸 작품 올레길. 이 이야기는 다름 아닌 서명숙 제주 올레이사장의 이야기고 그렇게 생긴 올레길이 지금은 21개의 정규코스와 5개의 부속코스로 이름을 얻게 됐다.

제주 올레 소개글에 보면 새가 하늘을 날 듯, 두발로 걷는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가장 중요한 특성중 하나입니다. 걷고 싶은 만큼 걸을 수 있는 긴 길. 제주올레는 도보 여행자를 위한 길입니다라는 표현이 있다. 걷고 싶은 만큼 걷는 길. 한번은 욕심을 부려도 좋고 한번은 요만큼만 걷지뭐 해도 좋은 길, 제주 올레길은 억지가 아닌 자유의지로 걷는 길이다누군가에게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이름으로 제주도민인 나에게는 일상의 확대라는 이름으로 마주하는 올레길오늘 내가 걷는 길은 그중 올레3코스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어서 1코스가 아닌 3코스부터 시작해보려고 한다볼빨간 사춘기가 노래한 나만,봄이 아니어도 분명히 이 봄은 눈치 없이 밖을 나가고 싶고 왜 그런지 몰라도 충분히 설레는 봄이기에 걷기에 이보다 더 좋은 시간은 없을 것 같다.

 

<제주 올레 3코스>

제주 올레 3코스는 골라먹는 재미가 쏠쏠~한 길이다A코스 B코스. 어디로 갈까A코스는 숲으로 B코스는 바다로예감대로 해안길인 B코스가 A코스에 비해 길이가 짧다하지만 오늘 만나볼 길은 A코스두 개의 오름과 두모악 김영갑갤러리가 반겨주는 매력적인 코스다온평포구에서 시작해서 난산리, 통오름, 독자봉, 김영갑갤러리, 신풍신천바다목장, 표선 해비치해변까지 총길이 20.9km. 개인적으로 신풍바다목장은 지금이 제일 좋은 때란 생각이 드는데 그건... 바다길안내를 꽃들이 해주기 때문이다.

걷기 시작해서 독자봉을 지나 김영갑갤러리로 들어선다. 사실 김영갑갤러리는 올레3코스에서 제일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사진작가 김영갑선생은 2002년 삼달분교를 개조하여 이곳에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을 개관했다. 한라산의 옛 이름 두모악에 들어서면 김영갑선생이 찍은 사진과 생전 그의 모습도 볼 수가 있는데, 어쩌면 제주를 제주사람보다 더 사랑했던 육지인 김영갑선생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 둘러보는 내내 먹먹한 심정이 된다이곳을 보고 난 뒤 걸어가는 제주올레길이 더 아름다운 건 마음을 담아 걷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 이토록 사랑했던 제주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왠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게 만든다그래서 길에서 만난 길고양이들에게도 그들보다 더 도도하게 인사하게 되고 그 길의 주인인 것처럼 성큼성큼 발자국을 남기게 된다.

그렇게 난산리 마을 지나면 통오름. 통오름을 내려와 중산간 동로길을 건너면 독자봉이 나온다. 재밌는 것은 독자가 많은 동네에 있다하여 독자봉이라고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올레3코스의 종점 표선 해수욕장에 도착할 때까지 만난 것은 바람이요 바다요 오름이다.

올레꾼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인사말이 행복해요 라고 하는데 도대체 이 길에 무엇이 있기에 걷는 이들이 행복을 느끼는 걸까그 물음의 답은, 다시 길을 걷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될 듯싶다.

 

 

* 《쿨투라》 2019년 5월호(통권 5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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