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아파트 그리고 욕망: 〈콘크리트 유토피아〉
[영화 월평] 아파트 그리고 욕망: 〈콘크리트 유토피아〉
  • 강유정(영화평론가, 강남대 교수)
  • 승인 2023.09.0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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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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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파트의 장르

한국에서 ‘아파트’는 단순한 보통 명사가 아니다. 인구 천만이 넘는 대도시 서울의 가장 보편적인 주거 형태이다 보니, 영화나 드라마에서 아파트는 주요한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한다. 로맨스이건, 멜로이건, 공포, 스릴러이건 간에 인물들이 사는 공간 중 아파트를 배제할 수 없다. 실제 대부분 아파트에 사니 말이다.

그런데, 특정한 장르물의 외피를 가질 때, 아파트는 훨씬 더 첨예한 상징 공간이 된다. 우선, 아파트는 한국인에게 욕망의 대상이다. 어느 지역, 몇 평, 방 몇 개를 가진 아파트에 사느냐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대변한다. 아파트의 이름이 단순한 건설회사 상호명을 벗어나 나름의 브랜드 가치를 갖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정한 브랜드가 욕망을 자극한 것인지 아니면 집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아파트 브랜드라는 웃지 못할 상황을 만든 것인지, 이젠 그 선후 관계를 따지는 것조차 무의미해 보인다.

특히 공포 장르물에 아파트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강풀의 원작 웹툰을 각색한 영화 <아파트>는 공포물이었다. 고교 동창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질투했던 여자의 뒤틀린 심리극이었던 <손톱>에서, 그녀가 부러워했던 친구의 삶 역시 신혼살림이 앙증맞게 놓인, 아파트에 압축되어 있다. 신혼집, 신혼살림, 신혼 인테리어가 지칭하는 기의는 사실 컨베이어 벨트에서 양산된, 레고로 만든 집처럼, 정형화된 스테레오 타입에 수렴된다. 똑같은 인테리어를 한, 똑같은 모양의 아파트는 평균적 출세에 집착하는 한국적 특이성을 보여준다. 남과 다른 게 아니라 남들처럼, 남들만큼 사는게 중요한 한국에서 아파트는 다름 아닌 욕망의 용기이다. 아파트는 우리 욕망이 응축된 공간인 것이다.

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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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식 자본주의의 집약, 아파트

유하 감독의 <강남 1970>이나 <말죽거리 잔혹사>를 보면, 아파트에 대한 21세기 대한민국, 서울 사람들의 욕망이라는 게 역사적 배경 가운데 사후적으로 기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진흙, 뻘 투성이었던 한강 이남, 강변 아파트는 1970년대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선호하는 주거 형태가 아니었다. 유실수가 심어진 작은 마당과 정원, 전세나 월세를 놓을 수 있는 문간방을 갖춘 주택이야말로 여전히 한국인이 선호했던 ‘집’, 주거 형태였다.

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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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충정로에 남아 있는 대한민국의 첫 번째 아파트, ‘충정아파트’를 보자면, 한국인에게 아파트란 오히려 도시 빈민 혹은 이방인의 거주지였음을 눈치챌 수 있다. 2023년 10월 철거 예정인 회현아파트 역시, 우리가 최근 생각하는 아파트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김현옥 시장의 불도저식 도시 개발 사업 가운데서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이 선사한 이미지는 아파트의 불완전성이었다. 그게, 빨간 바지, 복부인, 딱지 등의 지하 경제용어와 함께 눈먼 이익을 챙기는 재산 증식 수단으로 부각된 게 바로 1970년대였다.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다큐멘터리, 흑백 기록 영상으로 시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식 생활, 새로운 재테크 수단으로 각광 받게 된 아파트는 1980년대 이후 우리 삶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재산 목록이자 욕망의 목표가 되었다. 종합부동산세, 양도세, 취득세, 전세 사기와 관련된 모든 사회면 기사들의 출발과 끝에도 아파트가 있다.

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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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지진을 동반한 대재난 이후 단 한 동의 아파트만이 건재한 상황에서 시작된다. 재앙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영화의 관심사가 아니다. 영화는 사람들의 욕망이 응축되었던 아파트가 죄다 무너지고 난 이후, 말 그대로 체온을 유지하고 목숨을 유지할 유일한 서식지로 아파트 한 동만 남는다면 사람들의 욕망과 갈망을 들여다 본다.

누군가에게는 최소한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안전지대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독점 가능한 재산이며 권력이다. 주거지로 생각하는 자들에겐 되도록 여러 사람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대피소이겠지만 소유로 생각하는 사람에겐 그저 개인의 사유지이다. 지켜야 할 사유 영역에는 재난 이후 가장 중요한 먹거리 문제도 포함된다.

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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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초기 대응 모습은, 제목인 ‘유토피아’의 면모를 떠올리게 한다. 진정한 공동 주거지로서 유일하게 남은 황궁아파트 103동은 매우 잘 꾸려진, 초기 집단 주거 형태를 제시한다. 신체적 능력과 직업적 전문성을 배려해, 누군가는 외부로 수렵 활동을 떠나고 누군가는 물자 배급과 치안을 맡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치료를 담당한다. 붕괴되었던 오물 및 분뇨 처리도 나름의 시스템으로 재건해 인간다움을 지켜낸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다”와 같은 단순한 십계명 위에 재건되고, 운용되는 공동체, 그건 사실 우리가 국가 시스템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공동생활의 이상향, 유토피아기도 하다.

 

3. 누구의 유토피아인가

결국 문제는, 그 유토피아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이다. <콘트리트 유토피아>의 세계관은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는 대전제에서 출발한다. 황궁 아파트 103동 주민이 아닌 이상, 이제는 휴지 조각에 불과한 등기 상의 권리가 없다면 이 유토피아에 함께 살아갈 수 없다. 유토피아의 행복은 외부인에 대한 철저한 격리와 추방, 공격 위에 존재한다. 배타적 폭력에 기대있는 황궁 아파트의 체제는 그런 점에서 내부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가상의 적과 싸워야 하는 전체주의 체계와 점점 닮아 간다.

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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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자신의 정체성이 가장 모호한 자들, 경계에 놓이거나 오히려 위장한 자일수록 적의 색출에 골몰하고 혹독한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겪었던 난민의 문제 그리고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할 수 없었던, 호모 사케르로서의 이방인에 대한 문제의 반영이기도 하다.

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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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 아파트 내부에선 그곳을 천국이라 불렀으나 주변인들에게는 괴물들이 사는 곳, 거주자 외에는 잡아 들여 마치 도축하듯 피를 뽑고, 잡아 먹기도 한다는 소문의 주인공들. 재난 보다 더 무서운, 재난 이후라 더 날 것으로 드러나는 뒤틀린 욕망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 <콘크리트 유토피아>이다.

 


강유정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2005년 《조선일보》 《경향신문》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으로 등단, 저서로는 『영화 글쓰기 강의』 『타인을 앓다』 등이 있다. 현재 강남대학교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 《쿨투라》 2023년 9월호(통권 11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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