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낮은 자리, 세상 갈渴한 영혼의 입술을 적시는 중이야: 박화남 시집, 『맨발에게』
[북리뷰] 낮은 자리, 세상 갈渴한 영혼의 입술을 적시는 중이야: 박화남 시집, 『맨발에게』
  • 김혜원 인턴기자
  • 승인 2023.09.0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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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하여 현대시조의 무서운 매혹을 발산하는 박화남 시인의 시집 『맨발에게』가 도서출판 작가 기획시집으로 출간되었다.

박화남은 언어를 ‘엮고’ ‘풀고’ ‘다스리는’ 역량과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내는 혜안이 돋보이는 시인이다. 대상에 대한 깊은 사유와 오랜 숙성을 거친 후에 빚어내는 심미감 넘치는 선명한 형상화는 언어에 대한 예각으로 시 읽는 맛을 싱그럽게 출렁이게 하는 매력이 있다.

“조심스럽게 봄을 걸어왔다 / 꽃이 된 / 수많은 둥근 것들에게 / 지는 법을 물었다”(「시인의 말」)는 박화남 시인은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20년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시집 『황제펭귄』을 출간했고, 2022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집 발간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2023년 시집 『맨발에게』를 출간했다. 2022년 천강문학상 시조부문 우수상, 《중앙일보》 중앙시조신인상을 수상했다.

아내가 씻어준다는 남자의 낡은 두 발
구두 속의 격식은 언제나 무거웠다
이제껏 바닥만 믿고
굳은살로 살았다

손처럼 쥘 수 없어 가진 것이 없는 발
중심을 잡으려고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바닥의 깊이를/모른다는 그 남자

하루를 감아온 발 물속에 풀어낸다
뒤꿈치 모여있는 끊어진 길 닦으면서
아내는 출구를 찾아/손바닥에 새긴다

바닥을 벗어나려고 지우고 또 지워도
이 바닥이 싫다고 떠난 사람이 있다
맨발은 그럴 때마다
저녁이 물컹했다

- 「맨발에게」 전문

총 4부로 구성된 『맨발에게』는 표제시를 비롯한 67편의 짧은 시편을 1부 ‘한 걸음 살아있을 때 발은 발을 맞춘다’, 2부 ‘어제 먹은 사치와 두 젓가락 매운 거짓’, 3부 ‘흔적이 마를수록 사람들은 오래 아팠다’, 4부 ‘누군가 받쳐주는 일 알면서도 못했다’로 나누어 다채롭고 은밀한 시인의 시세계를 담아냈다.

박화남 시인

시인은 인간만이 세계의 중심이 되는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널찍이 벗어나 육친이나 이웃들의 삶은 물론 삶의 현실, 우리가 미물이라고 부르는 생물, 자연 현상, 생태와 우주에 이르기까지 미세한 촉수를 거느리며 우리의 나태한 생의 감각과 기율을 일깨운다. 좋은 작품에는 세상에 흔하게 존재하기에 오히려 지나쳐 버리는 작은 부분까지 보듬고 깨우며 우리 생의 질서 속으로 편입시키는 힘이 있다고 할 때 박화남의 시조는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서울여대 이숭원 명예교수(문학평론가)는 “그의 시선은 정체하지 않고, 대상의 관찰에서 사물의 유추로, 인생론적 상상에서 존재의 담론으로 자유롭게 비상한다.”고 말한다. 시조의 요체는 간결성이며, 일정한 율격안에 체험과 정서를 녹여 넣어야 시조가 살아난다. 그러나 박화남은 현실의 삶에 집중한다. 더 나아가 언어의 개방적 창조에 전념한다. 열린 시각으로 삶의 진실을 사유하고 다층적 언어로 사물의 깊이를 탐색한다. 그의 상상의 도형 안에서, 깨진 계란은 삶의 징표가 되고, 철조망을 품은 등나무는 사랑의 표상이 되고, 황태덕장은 시 창조의 공간이 된다. 덧없이 사라지는 비루한 일상의 사물들이 시간을 넘어선 항로의 신선한 깃발로 나부낀다. “이 간결한 지성의 향연에 감상感傷이 끼어들 여지가 없음은 축복”이라고 평한다.

저 줄을 잡으려고 얼마나 뒤척였나
도시의 뒷면에서 외로운 짐승으로
꽉 문 길 놓지않았다
검붉게 설 때까지

- 「수평선을 당겼다」, 전문

고유의 양식 아래 제법 두터워진 성과물들을 내왔음에도 시조라는 ‘오래된 책’의 한 켠에 귀를 기울이면 여전히 “너 어떻게 살아 있어? 하고 싶은 말은 뭔데?”라는 음성이 나직이 배어 나온다. 그때 “살펴 봐. 나의 매직magic의 끝은 제목에 있어. 나의 시는 낮은 자리, 세상 갈한 영혼의 입술을 적시는 중이야”라고 말하는 어떤 영혼의 음성을 들었다. 돌아보니 박화남이었다. 독자들이여, 박화남의 매혹적인 현대시조를 한번 만나보자.

 

 


 

 

* 《쿨투라》 2023년 9월호(통권 11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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