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완벽한 범죄 해부의 쾌감: 〈베니스 유령 살인 사건〉
[영화 월평] 완벽한 범죄 해부의 쾌감: 〈베니스 유령 살인 사건〉
  • 강유정(영화평론가, 강남대 교수)
  • 승인 2023.10.06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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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한국어로 번역된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의 마지막권 숫자이다. 무려 79권이나 되는 전집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8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66편의 장편소설과 14편의 단편 소설집을 출간했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추리 소설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추리서사이고 추리서사가 바로 애거서 크리스티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녀가 창조해낸 회색 뇌세포의 명민한 사립 탐정 에르퀼 푸아로는 셜록 홈즈나 아르센 뤼팽처럼, 고전적 탐정 서사의 한 전형을 차지하고 있다. 복잡한 사건을 명쾌한 논리와 과학적 근거로 해석해 내는 푸아로는 범죄의 플롯을 완벽하게 해석하고 투명하게 읽어내는 해설사이기도 하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은 여러 번 영화화되었다. 배우이자 감독, 제작자인 케네스 브레너는 영국 문학을 영상화하는 작업을 오래전부터 꾸준히 해오고 있다. 미국의 스튜디오 시스템 속에서 동구권 괴물의 이미지로 소모되던 프랑켄슈타인을 메리 셸리 원작 속 “그것”으로 재현해낸 사람도 케네스 브레너다. 셰익스피어 희곡을 영화화하는데 매달렸던 케네스 브레너는 최근 영국문학의 또 다른 자존심이라 할 수 있을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첫 시도가 바로 2017년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었다.

주디 덴치, 조니 뎁, 미셸 파이퍼, 페넬로페 크루즈 등의 할리우드 톱 배우들이 총출연했던 〈오리엔트 특급살인〉은 초호화 캐스팅과 40년 만의 영화화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원작인 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뿐만 아니라 1974년 제작되었던 시드니 루멧의 동명 작품과도 경쟁해야만 했다. 로렌 바콜, 잉그리드 버그만, 숀 코넬리, 안소니 퍼킨스 등 당대를 휘어잡던 스타들의 열연은 ‘오리엔트’라는 색다름과 범죄소설의 고전미를 잘 그려낸 수작으로 알려져 있다. 케네스 브레너의 첫 시도는 고전의 명성을 넘어서지 못했다. 이후, 〈나일강의 죽음〉에 대한 평가 역시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베니스 유령 살인 사건〉은 케네스 브레너 감독이 이전에 만들었던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 원작 영화와 여러모로 차별화된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베니스 유령 살인 사건〉은 이전 두 작품처럼 하나의 단일서사를 원작으로 각색된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시기에 쓰인 두 작품을 원작으로 새롭게 창조된 이야기이다. 〈베니스 유령 살인 사건〉은 『할로윈 파티』라는 장편과 「마지막 강신술」이라는 단편소설를 모체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길이도 장편과 단편이지만 두 작품에서 등장 인물과 몇몇의 사건적 에피소드를 따왔을 뿐 전체적인 이야기는 완전히 재창조했다고 보아도 될 법하다.

원작의 무게감과 아우라로부터 벗어나 두 작품의 부분적 요소를 도출해 새롭게 직조한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은 현대적 서사와 스타일로 관객의 집중도를 높이는 데 성공하고 있다. 회색 뇌세포, 합리적 탐정을 중심으로 초월적 사건인 미스터리 「마지막 강신술」을 재해석한 부분은 새로운 긴장감과 분위기를 제공한다. 어린시절 죽은 딸의 영혼과 만나기 위한 한 어머니의 음험한 계략과 강신술사 간의 이야기를 그린 「마지막 강신술」은 푸아로의 색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다. 반면, 『할로윈 파티』는 할로윈 파티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푸아로 식 사건의 전형을 따라간다.

무엇보다 케네스 브레너 방식으로 달라진 푸아로 캐릭터 해석이 눈에 띈다. 푸아로는 언제나 독특한 패션과 왜소한 몸집 다소 경박해 보이는 말투와 행동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베니스 유령 살인 사건〉의 푸아로는 지금껏 보았던, 똑똑하고 개성이 지나친 사립 탐정이라기보다 진중하고, 무게감 있는, 장년의 피로와 회의감을 짙게 가진 케네스 브레너식의 푸아로로 그려져 있다. 훨씬 더 설득력과 흡입력을 가진 매력적인 캐릭터로 그려진 것이다.

베니스라는 공간의 아우라도 만만치 않다. 매우 미국적인 전통 행사인 할로윈과 프랑스를 배경으로 했던 강령식을 이탈리아 베니스라는 공간에 이식해 원작에서 추출해내기 어려운 복합 장르의 아우라를 만들어 낸다. 비오는 할로윈 데이, 오랜 역사를 가진 유럽의 저택, 저택에 어린 서글픈 전설과 이를 증명하는 듯한 공간의 섬찟한 분위기는 애거서 크리스티 특유의 밀실 살인 사건의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증폭해낸다.

〈베니스 유령 살인 사건〉의 인물들은 그곳을 떠도는 소문과 오래 묵은 전설 그리고 실제 발생했던 과거의 가슴 아픈 죽음에 억눌려 착시에 가까운 공포스러운 환상을 경험하는 자들이다. 중요한 건 푸아로가 등장한 이상, 이 사건은 유령이나 귀신처럼 초월적 현상으로 인한 오컬트적 미스터리가 아니라 악의를 지닌 사람이 저지른 범죄임이 밝혀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푸아로 범죄 서사의 전형성은 베니스의 유령이라는 판타지적 요소와 길항작용을 일으키며 과연 베니스 저택의 살인 사건이 오컬트 미스터리인지 범죄 스릴러 서사인지 기분 좋은 긴장감을 선사한다. 딸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과 그 아이를 강령술을 통해서라도 만나고 싶은 비뚤어진 모성, 저택에 깃들이 아주 오래된 고통스러운 역사들은 지금껏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곳곳에 산재해 있었던 다양한 대중적 요소들을 응집한다.

장년의 우울증에 빠져 있는 듯한, 무기력한 푸아로는 결국 그의 회색 뇌세포를 활용해 모든 범죄와 초월적 사건, 비현실적 미스터리들을 완벽하게 해부해 세상의 밝은 빛 아래 드러낸다. 애거서 크리스티와 푸아로를 거치면 아무리 미스터리하고 흉악한 살인 사건도, 오컬트, 미스터리도 합리적 추론과 과학적 인과관계로 풀린다. 이 고전적 해결감은 이종결합적인 쾌감과 서사적 정복감을 제공한다. 어떤 사건이든 완벽하게 전모를 드러낸다. 푸아로가 등장한 이상 해부되지 못할 범죄는 없어진다. 이 고전적 마무리는 불가해한 범죄와 폭력이 만연한 현실 세계에 기묘한 안도감을 선사한다. 그 안도감이 비록 찰나에 불과하더라도 적어도 영화관에서 푸아로를 따라가는 동안만큼은 현실의 불안을 사라진다. 그게 바로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이 주는, 시대를 뛰어넘는 효능감일 테다.

 


강유정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2005년 《조선일보》 《경향신문》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으로 등단, 저서로는 『영화 글쓰기 강의』 『타인을 앓다』 등이 있다. 현재 강남대학교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사진제공 월드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 《쿨투라》 2023년 10월호(통권 11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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