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평론] 붕괴 이후의 사랑: 박찬욱 감독 〈헤어질 결심〉
[영화 평론] 붕괴 이후의 사랑: 박찬욱 감독 〈헤어질 결심〉
  • 이광호(문학평론가, 문학과지성사 대표)
  • 승인 2023.10.06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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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의 영화를 ‘스타일리쉬’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미장센이 매력적이라는 형식적인 의미에 한정되지 않는다. 가령 〈올드보이〉에서 선보였고 〈헤어질 결심〉에도 등장하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벽지가 만드는 공간감 같은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의 스타일은 이미지와 이미지가 충돌하는 리듬으로서의 영화적 창의성의 결과물이다. 로베르 브레송이 ‘촬영한 연극’으로서의 시네마와 창조의 목적으로 카메라를 사용하는 ‘시네마톨로지’를 구분했을 때의 바로 그것이다. 박찬욱의 영화가 브레송처럼 ‘연기’ 자체를 제거하는 극단적인 영화적 자율성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지의 카메라가 낯선 시공간의 몽타주를 창조한다는 측면에서 ‘시네마톨로지’에 가깝다.

박찬욱의 영화에도 ‘이야기’가 존재하지만, 그 이야기를 강렬하게 만드는 것은 서사 자체의 개연성조차 넘어서는 이미지의 논리이다. 그의 영화들은 최후의 신화적이며, (희생)제의적인 이미지를 향해 질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복수는 나의 것〉에 등장하는 물 안에서 유괴범의 발목을 자르는 사적인 처형, 〈올드보이〉에서의 자신의 혀를 가위로 자르는 자기 처벌, 〈박쥐〉에서의 아침 햇빛 아래서 불타 죽는 뱀파이어 연인들의 발목처럼, 시적인 도약의 순간을 경험하게 하는 마지막 순간을 향해 영화는 이미지의 드라마를 밀고 나간다.

박찬욱 영화들의 서사적 변이는 여성 캐릭터들의 재창조를 통해 진행되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유괴된 딸을 지키지 못한 아버지의 복수는, 〈올드보이〉에서 딸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아버지의 기억을 포기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이것은 봉준호 등의 감독들에게서 심층적으로 반복되는 ‘소녀(딸) 구하기’의 불가능성과 죄의식과 연관된 테마이다. 박찬욱 영화들은 이런 지점들로부터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여성 캐릭터들을 만들어왔다. 〈친절한 금자씨〉의 여주인공은 유괴범 때문에 자식을 잃어버리고 수감된 희생자가 아니라 집단적인 복수의 제의를 기획하는 주체이며, 〈스토커〉의 어린 여주인공은 살인이라는 매개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격렬한 ‘이니시에이션’ 혹은 입사제의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 〈아가씨〉의 아가씨와 하녀는 계급과 국적을 넘어서 남성적 쾌락을 둘러싼 욕망과 음모의 세계를 파괴하는 반란과 사랑을 실현한다. 남성적 윤리 감각의 잔여물은 존재할 수 있다. 이를테면 〈박쥐〉의 여주인공은 남성 뱀파이어를 통해 완벽하게 자유로운 뱀파이어의 존재가 되지만, ‘신부-남성’의 죄의식으로 인해 함께 불타 죽어야만 했으며, 〈스토커〉의 여주인공의 살인 충동이라는 잠재된 정체성은 아버지와 삼촌의 부계로부터 상속받은 것이다. 〈헤어질 결심〉에서 박찬욱의 여성 캐릭터의 창의적인 변이는 마지막 장면에서의 영화적 퍼포먼스에서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헤어질 결심〉은 필름 누아르 혹은 그 기원으로서의 탐정 추리서사라는 장르적 외피를 두르고 있다. 세계를 불가해한 상황으로 만드는 살인 사건은 탐정이 재구성하는 인과적 서사에 의해 전모가 드러나며, 이성과 과학의 권능으로 세상은 설명 가능한 상태로 복원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건 이후 반복되는 또 하나의 사건이 사건의 의미 자체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킨다면 어떻게 될까? 〈헤어질 결심〉은 한 영화 안에서 장르를 내파하는 영화적 모험을 밀고 나간다. 〈헤어질 결심〉에서 누아르와 멜로드라마는 형식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외피로서의 누아르를 멜로드라마의 잠재된 서사가 뚫고 나오는 사태이다. 멜로드라마의 서사는 가령 ‘그때(그곳에) 사랑이 있었다!’를 보여주는 것이다. 문제가 그 사랑이 존재했음을 입증할 증표라면, 그 증표에 의해 작별 이후의 사랑의 존재론은 성립된다. 증표에 의해 부재로서의 사랑은 잔존의 힘을 갖게 된다. 〈헤어질 결심〉에서 그 증표는 여주공인의 범죄가 입증되고 형사가 범죄를 덮어주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핸드폰이다. 범죄를 입증하는 결정적인 물증이 사랑을 입증하는 기호가 되는 전환은 이 영화의 극적인 서사적 반전을 작동시킨다.

범죄 형사물은 형사의 ‘눈’에 의해 살인의 전체적인 진실이 드러나야 한다. 형사는 ‘보는 자’ 혹은 ‘찾는 자’이며, 용의자인 서래는 ‘보여지는 여자’이어야 한다. 계속해서 인공눈물을 넣어야 하는 해준은 ‘똑바로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며, 이는 해준의 정체성과 자부심의 핵심이다. 서래가 스스로 허벅지의 상처를 보여주고 해준이 자세를 낮추어 찍는 장면은 이 시선의 위계를 압축한다. 그런데 영화적인 전개는 이 ‘보는 남자-형사/ 보여지는 여자-용의자’의 위계를 따라가지 않는다. 서래의 집 앞에서 잠복하며 서래를 정탐하는 해준의 행위는, 감시라기 보다는 마치 연인의 공간-시간을 탐색하는 것 같다. 집 밖에서 감시하는 해준이 서래의 방 안에 있는 것처럼 연출된 장면은, 그것이 정탐의 행위가 아니라 ‘함께 있음’의 행위라는 것을 암시한다. 잠복 중 서래의 집 앞에 차에서 잠자던 해준을 서래가 들여다보고 사진을 찍는 장면은 이 시선의 위계가 역전될 가능성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취조실 장면들에서 서래와 해준의 미장센은 흥미로운 화면 분할을 연출한다. 카메라는 해준의 시선에서 서래를 바라보는 단순한 구도가 아니라, 서래와 해준을 각각 비추는 모니터 화면을 동시에 보여주고 또 다른 비인칭의 시선을 드러낸다. 전통적인 시점 숏의 프레이밍의 규범을 벗어나는 앵글은 서래를 대상화하는 시선이 아니라, 제3의 사물들의 ‘응시’의 차원이 있음을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해준과 서래가 상대방의 어떤 측면만을 볼 수밖에 없을 때, 또 다른 영화적 응시는 그들의 미묘한 교감과 어긋남을 포착해낸다. 카메라만이 사랑의 전모를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박찬욱의 영화들이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구도가 균열을 일으키는 상황을 연출한다면, 시선의 위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카메라의 예기치 않은 응시이다.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 해준이 서래의 집을 찾아가 사건을 재구성하는 장면은 전반부의 피날레를 장식한다. 해준이 “나는 완전히 붕괴되었어요”라고 말할 때, 카메라는 해준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카메라에 의해 그 무너짐이 대상화되는 것은 오히려 해준이다. 해준이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라고 말할 때, 핸드폰이라는 ‘범죄의 물증/ (이후의) 사랑의 증표’는 수장되어야만 하는 운명에 놓인다. 그 문장은 서래에게는 해준의 사랑의 고백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동시에 사랑의 명령이기도 해서, 서래 자신 역시 바다에 던져져야만 하는 상황을 암시한다. 이 연극적인 무대에서 해준이 퇴장할 때 카메라는 불현듯 뒤로 물러나면서 천정을 비춘다. 이 기이한 카메라 워킹은 체스판의 기하학적 무늬로 이루어진 천정 아래에 남겨진 서래의 침몰을 보여준다. 앵글은 서래를 아래로 누르면서 침몰 시키고 다시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서래는 어머니의 유골함을 본다. 이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반복과 변이 혹은 마주 보는 대칭적 구조를 완성하는 것은 카메라의 움직임과 시선의 몽타주이다. 카메라 앵글만이 그 모든 사랑의 기묘한 시공간과 어긋남의 비밀을 알고 있다.

이 영화는 박찬욱 영화의 형식미를 대변하는 현란한 매치컷과 시점숏 이외에도 높이와 깊이, 수직과 수평의 프레임을 둘러싼 정교한 양식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영화 초반의 압도적인 수직적 이미지는 서래의 남편이 죽은 구소산이다. 영화는 기이한 높이에서 죽은 남자의 시체로 시작하여 해안 모래 아래 스스로를 묻는 여자의 이미지로 끝난다. 남편은 자신의 산행을 중계하는 유튜버이고, 서래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어 산의 뒤쪽으로 남편을 따라 오른다. 해준은 그 살인을 설명하기 위해 산을 다시 올라야만 한다. 산꼭대기는 돌출된 그러나 숨겨진 무대이고 그 바닥은 딱딱하다. 그 산꼭대기라는 무대에서 영화는 두 개의 제의적인 장면을 상연한다. 구소산에서 벌어지는 것이 살인의 제의라면, 서래 어머니의 유골을 해준이 뿌려주는 애도-제의가 벌어지는 곳은 호미산이다. 산은 살인과 애도라는 두 개의 퍼포먼스가 상연되는 솟아오른 그러나 은밀한 무대이다.

밀물이 시작되는 해변이라는 최후의 제의적인 무대는 부드러운 모래를 파내려 갈 수 있는 곳이다. 완벽한 사라짐의 무대이고 들이치는 파도는 그 공간을 지워줄 것이다. 관객들은 그 무대에서 벌어진 일을 알고 있지만, 해준은 그 숨겨진 최후의 공간을 알지 못한다. 해안도로의 부감숏의 오른쪽 파도의 윤곽은 서래의 얼굴 윤곽을 연상시키지만, 해준은 그런 부감의 시점을 알지 못한다. 바다와 모래의 수직적 경계에서 과장된 그림자를 드리운 해준을 내려다 보는 부감숏은 해준의 진짜 붕괴를 예고한다. 사건의 전모를 드러내 주어야 할 ‘형사-남성’ 주체가 파도 위에서 하염없이 헤매이게 만드는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압도적이다. 형사-남성 주체의 시선의 권력은 여기서 완벽하게 붕괴된다. 어둠이 내리는 바다에서 해준은 손전등을 켜지만 서래를 찾지 못한다. 호미산에서 서래의 헤드 랜턴이 정확하게 해준의 얼굴을 비추는 상황과 대비된다. 해준의 손전등 불빛은 영화의 마지막 순간 관객을 응시한다. 첫 번째 살인 사건을 덮어주면서 해준은 스스로 붕괴되었다고 말했다. 그때의 붕괴는 형사로서의 책임감과 자부심의 상처에 해당한다. 그런데 해준은 정말 그때 붕괴되었던 것인가? 형사로서의 해준의 붕괴는 연인으로서의 해준의 붕괴를 예비하는 동시에 미루고 있었다. 첫 번째 살인 사건이 형사의 붕괴로 귀결 되었다면, 두 번째 사건은 연인으로서의 붕괴로 귀결된다. 어느 순간 사랑이 시작되었는지를 알지 못하는 연인은 끝내 붕괴된다. 붕괴로서의 사랑은 관성적인 삶의 명분을 뿌리 채 흔들고 다른 삶의 두려운 잠재성을 대면하게 한다. 첫 번째 사건에서 붕괴된 것이 형사로서의 품위와 명분의 세계라면, 이제 진정한 붕괴가 시작될 것이다.

바다 모래에 스스로를 파묻는 여성의 존재는 무엇인가? 서래는 해준의 형사로서의 품위를 지켜주고 영원한 사랑을 봉인하기 위해 희생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런 온건한 해석은 서래의 자리를 숭고한 희생자의 위치로 고정시킨다. 그녀는 끝내 정체와 장소를 알 수 없는 ‘아토포스’적인 존재로 남는 것을 실행한다. 이것은 서래의 속죄와 희생이 아니라, 일종의 ‘복수’이기도 하다. 그 복수는 해준이 마주한 형사와 연인으로서의 두 겹의 실패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든다. 해준이 연인을 찾아다니는 오르페우스라면, 서래는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에우리디케이기를 거부하고, 침묵의 세이렌으로 해안에 남는다. 서래는 해준이 헤매는 그 해변 밑에 누워서 그를 끝임없이 붕괴시킬 것이고, 어쩌면 먼 시간 후에 다시 그 차가운 얼굴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서래는 완벽한 수수께끼가 됨으로써, 사랑을 닫힐 수 없는 미결의 상태로 옮겨놓는다. 영원히 해안을 헤매어야 할 남자의 발밑에서 사랑의 유령은 날카로운 침묵으로 노래할 것이다. 노을이 들이닥치는 해변의 점점 거칠어지는 파도 소리는 그 두려운 사랑의 침묵을 대신한다. 사랑은 이 무서운 붕괴의 연안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그 바다는 사랑의 붕괴가, 그리고 붕괴 이후의 사랑이 재등장하는 서래의 바다이다. 서래의 바다는 새로운 붕괴와 죽음이 ‘마침내’ 시작되는 바다이다.

 


이광호 문학평론가. 문학과지성사 대표. 『장소의 연인들』 외 에세이와 『익명의 사랑』 외 문학비평집을 펴냈다.

 

 

사진제공 CJ ENM

 

* 《쿨투라》 2023년 10월호(통권 11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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