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어른 아이가 떠나는 ‘편견 없는’ 오디세이: 2023년 황금사자상은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가여운 것들〉에게
[제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어른 아이가 떠나는 ‘편견 없는’ 오디세이: 2023년 황금사자상은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가여운 것들〉에게
  • 설재원 에디터
  • 승인 2023.10.06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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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초델치네마.

여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영화제, 베니스국제영화제가 8월 30일(수)부터 9월 9일(토)까지 이탈리아 베니스 리도섬에서 열렸다.

올해 베니스 안팎에서는 미국작가조합WGA의 파업으로 시작된 할리우드 프로덕션 ‘올스톱’으로 인한 우려가 컸다. 베니스영화제는 칸이나 베를린보다 할리우드영화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편이고, 할리우드에서도 겨울 시상식을 노리는 작품들을 베니스영화제에 전략적으로 출품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파업으로 인해 개막작으로 예정되어 있던 루카 구아다니노의 〈챌린저스〉는 선정 취소되고, 다른 스타 감독과 배우들의 참여도 불분명해지는 등 영화제는 시작 전부터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영화제가 시작되자 걱정은 기우였다. 올해 베니스는 라이벌격인 토론토보다 좋은 작품을 선점하여 훌륭한 영화 프로그램을 꾸렸고,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화제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잡을 수 있었다. (베니스영화제와 한 주 간격으로 열리는 토론토영화제는 올해 할리우드 파업의 직격을 맞고 영화 수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개막작 교체부터 영예의 수상작들, 논란의 중심에 놓인 감독들의 귀환 등 여러모로 화제를 모은 제80회 베니스영화제 현장을 다녀왔다.

팔라초델치네마.

리도섬에서 열리는 베니스영화제

이탈리아 북동부에 위치한 베니스에 대해 보고 들은 적이 있다면, 베니스에서 영화제가 열린다는 사실이 꽤나 신기하게 느껴질 수 있다. 베니스는 크게 메스트레를 중심으로 하는 육지 쪽의 신도심과 ‘베니스’ 하면 떠올리는 수상도시 이미지를 지닌 구도심으로 구분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베니스는 구도심에 위치한 본섬인데, 이곳은 언제나 관광객으로 북적거리며, 무엇보다도 자동차도로가 없어 차량이 다닐 수 없다. 또한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인파를 수용할 극장이나 부대시설 또한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곳에서는 영화제가 열릴 수 없다.

영화제가 열리는 리도섬은 구도심에 위치한 베니스 본섬에서 바포레토(수상버스)를 타고 조금 더 들어가야 닿을 수 있다. 리도섬은 관광지인 베니스 본섬과는 또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다. 이곳은 우선 운하가 메인인 본섬과 달리 자동차가 다닐 수 있다. 버스 노선이 존재할 만큼 섬 자체가 어느 정도 크기도 하고 바닥도 본섬의 돌바닥보다는 훨씬 걸어다닐 만하다. 또한 베니스 주요 관광지와는 조금 떨어져 있다 보니 한산하고 여유 있는 일반적인 이탈리아의 소도시 풍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특히 영화제 기간 동안은 관계자들만 접근 가능한 리도섬 중앙의 한정된 공간을 중심으로 주요 행사가 모두 열리기 때문에 베니스에서 열리지만, 한편으로는 베니스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독특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제 기간동안은 베니스 본섬과 리도섬을 잇는 MCMostra del Cinema(영화제) 등 특수 노선이 추가운영되고, 이 노선은 다른 수상버스와 달리 극장 코앞에 위치한 리도카지노 선착장을 이용한다는 장점이 있다. 배지 수령시 특수 노선과 리도섬 내 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교통권이 함께 제공된다.

팔라초델카지노 3층 프레스존 .

예매 페이지 오류와 이례적인 사과문

늘 그렇듯 영화제는 올해도 시작부터 예매 문제로 말썽이었다. 예매 홈페이지가 마비되는 것은 매년 있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올해는 배지 소지자들의 예매 페이지에 이상한 오류가 있었다. 원래 배지 소지자들은 로그인에 성공하면 20분 동안 티켓을 구매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티켓 하나를 선택한 뒤 다음 티켓을 선택하려 하면 로그아웃이 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나또한 이 문제를 겪었는데, 예매 첫날인 8월 24일에 개막식 티켓을 예매하고 다음 티켓을 예매하려 할 때 로그아웃이 되었다. 다시 로그인을 시도했을 때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전체 서버가 마비되어 약간의 쉬는 시간이 생겼다. 그래서 서버가 안정될 동안 주변에 여기저기 상황을 물어보았는데, 그러다 알고 지내는 독일 평론가 부부가 모든 티켓팅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의 티켓 예매의 비결을 물어보니, 티켓을 선택한 뒤 아예 시작 페이지로 돌아가서 다시 다른 티켓을 선택하면 선택한 모든 티켓은 장바구니에 담기고 로그인도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짧은 시간동안 유럽권의 베테랑 기자·평론가 단톡방에는 이 소식이 돌았고, 빠르게 정보를 얻은 이들은 여유있게 모든 티켓을 예매할 수 있었다. 나도 이 사실을 예매 첫날 알게된 덕분에 이후부터는 순조롭게 예매를 잘 진행할 수 있었다. 이 문제는 영화제 마지막 이틀 표가 열리는 9월 4일을 하루 앞두고서야 개선되었고, 이례적으로 영화제측에서 전체 배지 소지자들에게 사과문을 보냈다. 매년 예매 페이지를 두고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했지만, 이렇게 사과문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COMANDANTE Pierfrancesco Favino and Silvia D Amico ⓒEnrico De Luigi

‘훌륭한’ 파시스트 살바토레 토다로를 다룬 개막작 〈더 커맨더〉

개막일 이른 아침 배지를 수령하기 위해 팔라초델카지노를 찾았다. 프레스존이 위치한 팔라초델카지노는 각종 기자회견과 인터뷰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몇해 전 레노베이션을 마친 베니스영화제가 자랑하는 최신식 건물이다. 이곳에는 미디어를 위한 공간 외에도 영화를 상영하는 살라카지노가 있어 언제나 활력있고 분위기로 생기 넘친다.

팔라초델카지노에서 배지를 수령하고 나와 오른편을 바라보면 초청작의 제작국 국기가 펄럭이는 영화제의 메인 베뉴 팔라초치네마가 보인다. 올해는 한국영화가 초청받지 않아 영화진흥위원회나 다른 한국 매체에서는 베니스를 찾지 않았다. 그렇게 홀로 현장에서 태극기가 빠진 팔라초델치네마를 바라보니 붐비는 인파 속에서도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베니스영화제의 또 다른 특징은 공식 프리미어 상영 이전에 작품을 볼 수 있는 기자시사 등이 한두 번 열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다른 큰 영화제와 비교할 때 영화보기가 쉬운 편이고, 부지런히 움직이면 주요 작품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는 편이다. 개막작 또한 개막일 이른 아침부터 기자시사로 볼 수 있다.

올해의 개막작은 에도아르도 데 안젤리스의 〈더 커맨더Comandante〉이다. 당초 지난해 〈본즈 앤 올〉로 감독상을 받은 루카 구아다니노의 〈챌린저스〉가 개막작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할리우드 파업의 여파로 선정 취소되었고, 급하게 〈더 커맨더〉가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 〈더 커맨더〉는 제2차세계대전 초기인 1940년 9월과 10월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해군 사령관 살바토레 토다로와 그가 지휘하는 잠수함 카펠리니호 선원들의 드라마이다. 세계대전을 이탈리아군을 중심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눈길을 끄는 이 작품은, 영화 전반부에는 전쟁에 임하는 이탈리아군의 용맹함을 보여주고 후반부에는 중립국 신분이지만 실질적으로 영국을 돕던 벨기에 선원들을 구조하며 인류애를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의 전쟁영화가 그러하듯 〈더 커맨더〉도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불어넣는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현장에서의 실제 반응도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어느 정도 호응을 이끌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이 작품이 개막작에 걸맞은 작품인지는 의문이 들었다.

‘훌륭한’ 파시스트의 상징인 살바토레 토다로로 분한 피에르프란체스코 파비노의 연기는 빛났다. 하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영화 속 인물들은 단조롭고 너무 지루하고 새로움 없이 모든 이야기가 전개된다. 고전적인 스타일의 촬영은 잠수정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깔끔하게 담아내지만, 진부한 메시지와 결합되어 오히려 심심해 보인다. 인도주의적인 결말로 이어지는 주제의식은 예리하지 않았고, 밋밋한 교훈을 던져 놓은 채 마무리 된다. 기존에 내정된 작품의 수급 문제로 급하게 개막작이 교체되면서 이탈리아 정서를 담은 〈더 커맨더〉를 내세운 것이 이해는 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게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맴돌았다.

DOGMAN Actor Caleb Landry Jones ⓒShana Besson

논란의 중심에 놓인 〈도그맨〉 〈더 팰리스〉 〈쿠 드 샹스〉

올해 베니스는 성추문에 휩싸인 적이 있는 뤽 베송, 로만 폴란스키, 우디 앨런이 각각 〈도그맨Dogman〉, 〈더 팰리스The Palace〉, 〈쿠 드 샹스Coup de chance〉으로 베니스를 찾았다. 이중 뤽 베송만이 유일하게 경쟁부문에 초청받았다. 자신과 관련된 모든 사건이 무혐의로 종결된 뤽 베송은 〈안나〉 이후 4년만에 신작 〈도그맨〉으로 돌아와 간만에 자신의 연출력을 제대로 선보였다.

〈도그맨〉은 유치장에서 상담사 에블린(조조 T. 깁스 분)과 더그(케일럽 랜드리 존스 분)의 대화를 통한 회상으로 전개된다. 이를 통해 가족으로부터 정서적 학대를 받고 자란 더그가 어떻게 인간과의 소통·공감을 포기하고 개와 생활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또 어떻게 괴물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뤽 베송은 한 끗씩 다른 Doug와 Dog 그리고 God을 감각적으로 연결지었고, 마지막에 십자가 그림자를 활용한 세련된 이미지로 자신만의 안티히어로를 만들어냈다.

중요한 상황마다 사용된 에디트 피아프의 음악 역시 절묘했고, 2년 전 〈니트람〉으로 칸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케일럽 랜드리 존스의 연기는 볼피컵을 노려볼 만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토드 필립스의 〈조커〉를 너무 연상시키는 점은 아쉬웠다. 그리고 동물, 특히 개를 적극적으로 작품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올해 칸에서 공개된 김태곤 감독의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와도 겹쳐지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 부분은 확실히 〈도그맨〉 쪽이 더 노련한 연출력을 선보였다.

뤽 베송과 달리 아동 성범죄로 실형을 받고 미국에서 쫓겨난 로만 폴란스키도 〈장교와 스파이〉 이후 4년만에 신작으로 다시 또 베니스를 찾았다. 4년 전에도 폴란스키는 문제적 인물이었지만 적어도 〈장교와 스파이〉는 작품 자체의 완성도는 높았고, 베니스 심사위원대상과 세자르상 감독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 비경쟁부문에 선보인 〈더 팰리스〉는 폴란스키 필모그래피의 오점으로 남을 듯하다.

〈더 팰리스〉는 새해를 맞는 스위스 알프스 호텔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을 보여주는 코미디이다. 작품은 조악한 유머코드와 호텔 구조를 활용한 얕은 풍자 등을 활용하였는데, 무엇을 의도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첫 상영 전까지만 해도 〈더 팰리스〉에 대한 관심은 아주 컸다. 모두가 폴란스키를 욕하지만 그의 작품에 대한 기대는 언제나 높았고, 티켓을 구하기도 정말 어려웠다. 그런데 영화가 끝난 후에는 모두가 헛웃음만 지으며 나왔다. 이 정도 커리어를 쌓은 감독의 작품으로는 이례적으로 〈더 팰리스〉는 현재까지 로튼토마토에서 토마토지수 0%(14명 참여)를 기록하고 있다.

RED CARPET COUP DE CHANCE Director Woody Allen ⓒAndrea Avezz La Biennale di Venezia Foto ASAC

우디 앨런은 50번째 장편영화이자 첫 불어영화인 〈쿠 드 샹스〉으로 비경쟁부문을 찾았다. 어떻게 보면 우디 앨런이야 말로 올해 베니스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여전히 우디 앨런이 딜런 패로우가 제기한 아동 성범죄 혐의를 벗지 못했기 때문에 프리미어 현장에는 그를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다. 동시에 같은 시간 극장 안에서 관객들은, 여전히 유죄 판결을 받지 않은 우디 앨런에게 오프닝 크레딧에 나타난 윈저 폰트만으로도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작품이 끝나자 관객은 더 큰 기립박수로 지지를 표했다.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운’이다. 영화는 고등학교 시절 서로 짝사랑하던 파니(루 드 라주분)와 알랭(닐스 슈나이더 분)이 파리의 거리에서 마주치며 시작된다. 파니는 장(멜빌 푸포 분)과 결혼한 상태이고 알랭은 이혼한 상태인데 첫 장면을 계기로 두 사람은 가까워지고, 파니와 장, 알랭을 둘러싼 뻔뻔하면서도 달콤한 로맨스가 펼쳐진다.

〈쿠 드 샹스〉은 그의 최고작은 아닐지언정 최근작 중에서는 가장 돋보였다. 이 작품은 우디 앨런이 자주 하던 코미디 영화는 아니지만 삼각 관계와 스릴러가 섞여 있는 드라마로 여전히 그만의 스타일과 유머코드가 녹아 있었다.

AWARD CEREMONY GOLDEN LION FOR BEST FILM POOR THINGS Yorgos Lanthimos
ⓒAndrea Avezz La Biennale di Venezia - Foto ASAC

어른 아이가 떠나는 ‘편견 없는’ 오디세이
황금사자상 〈가여운 것들〉

개막작 외의 영화 프로그램은 할리우드 파업의 영향을 잘 피해갔다. 이어지는 경쟁작 라인업은 〈더 커맨더〉의 아쉬움을 달래주듯 아주 훌륭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올해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가여운 것들Poor Things〉이 있다.

사실 첫 상영 이전부터 베니스에는 〈가여운 것들〉을 기대하게 만드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가여운 것들〉의 포스터는 영화제 시작부터 잘 보이는 좋은 위치를 선점하고 있었고, 개막 전부터 보도자료와 포스터, 프리미어 티켓을 제공하는 등 가장 적극적으로 프로모션을 진행한 영화 중 하나였다. 그래서 일찍이 〈가여운 것들〉이 겨울 시상식을 노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란티모스가 이번엔 어떤 작품을 만들었을지 정말 궁금했다. 그리고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가여운 것들〉은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작품답게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묘사가 많지만, 이번 작품에서만큼은 란티모스 작품 특유의 우울하고 기분 나쁜 불편함 대신 유쾌함과 발랄한 찝찝함이 자리한다. 영화 속 모든 것은 어느 한 부분은 나사가 빠져있지만 그러한 결핍이 모여 더욱 완성된 구조를 만들어 냈다.

〈가여운 것들〉은 ‘어른 아이’ 벨라 벡스터(엠마 스톤 분)가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블랙코미디이다. 산모와 아이의 건강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괴짜 의사 골드윈 벡스터(윌렘 데포 분)는 산모의 몸에 태아의 뇌를 이식시키는 기괴한 선택을 한다. 그렇게 부활한 ‘실험체’ 벨라는 부모 대신 그녀가 ‘신’이라 부르는 골드윈의 손에서 자라고, 의학계에서 외면받는 골드윈은 자신을 따르는 유일한 제자 맥스(라마 유세프 분)를 벨라에게 붙여 뇌이식 실험 결과를 관찰하고 기록하게 한다. 아름다운 벨라에게 반한 맥스는 그녀와 약혼하게 되는데 이때 난봉꾼 변호사 던컨(마크 러팔로 분)이 등장해 둘 사이를 휘젓는다. 결국 벨라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나’로 거듭나기 위해 골드윈과 맥스 품을 떠나 ‘편견 없는’ 여정을 떠난다.

어안렌즈를 활용하여 만들어낸 기묘한 19세기 유럽은 빅토리아시대와 벨에포크부터 미래적인 풍경까지 아우르며 초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세상을 알기 위해 떠난 여행이지만, 이 모든 풍경은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여행에서 벨라는 인간의 추악함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이 오디세이의 두 가지 축은 지와 성이다. 특히 여행의 시작부터 극을 끌고가는 가장 큰 동력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격렬한 ‘점프’로 명명되는 섹스이다. 던컨은 그가 벨라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온갖 육체적 쾌락을 알려주며 그녀를 ‘신’의 손에서 빼내지만, 점차 벨라가 주체적으로 성장하면서 오히려 그녀에게 종속된다. 벨라는 던컨 뿐만 아니라 그녀를 얻고자 하는 수많은 남자들에게 결코 복종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정복하며, 주변의 위선과 부정을 직접적으로 끄집어낸다. 그리고 파리의 홍등가에서 관음증적인 카메라는 음흉한 남성의 시선에서 벨라를 조명하며 불쾌한 조소를 유발하는 최고의 장면을 만들어 냈다.

던컨과의 관계에 지루함을 느낀 벨라는 철학과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고, 특히 사회주의에 심취한다. 그녀는 남들을 가엽게 여기며,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민한다.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그녀의 편견 없는 행동은 우리의 상식을 전복시키며, 란티모스 식으로 억압된 현실을 깨부순다.

감독이 수상소감에서 말했듯 “카메라 앞에서든 뒤에서든 이 영화는 엠마스톤”이며, 엠마 스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영화이다. 작품 내내 엠마 스톤은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펼쳤고, 마크 러팔로와 윌렘 데포가 든든하게 그녀를 보좌한다. 란티모스의 전작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에서도 호흡을 맞추었던 엠마 스톤은 이번엔 벨라 그 자체로 분해 자신의 최고 연기를 보여주었다. 상영이 끝나고 관객들은 다른 작품과 비교될 정도의 격정적인 환호와 ‘점프’로 압도적인 지지를 표현했다.

AWARD CEREMONY SILVER LION GRAND JURY PRIZE AKU WA SONZAI SHINAI EVIL DOES NOT EXIST Ryusuke Hamaguchi
ⓒAndrea Avezz La Biennale di Venezia-Foto ASAC

은사자상을 거머쥔 〈더 캡틴〉의 마테오 가로네와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은사자상은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심사위원대상)와 〈더 캡틴Io Capitano〉의 마테오 가로네(감독상)에게 주어졌다. 또한 신인배우상인 ‘마르첼로마스트로얀니상’도 〈더 캡틴〉의 세이두 사르가 차지하며 〈더 캡틴〉은 2관왕을 달성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주인공 타쿠미(오미카 히토시 분)는 도시의 때가 묻지 않은 아름다운 도쿄 근교에서 어린 딸 하나(니시카와 료 분)와 함께 살고 있다. 하지만 이 마을 부지를 ‘플레이 모드’라는 기업이 사들이면서 위기감이 드리운다. 팬데믹 이후 정부 보조금을 받기위해 플레이 모드는 이곳을 도시 근교의 글램핑장으로 활용하려 한다. 기업과 주민 사이에는 형식적인 공청회가 오가며 자연(상수도)과 개발(정화조)의 문제가 제기된다. 영화의 시작부터 숲을 뒤감은 음악 활용은 웅장함과 불길함을 동시에 선사한다. 여기에 카메라가 담아내는 아름다운 자연은 칙칙하고 어두운 빛에 덮이며, 자연의 아름다움과 이를 둘러싼 악의 위협을 시청각적으로 표현하였다.

이어지는 드라이브 장면 속 대화에서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장기가 여과없이 드러난다. 이 장면을 거치며 공청회를 이끈 플레이 모드의 직원 다카하시(코사카 류지 분)와 마유즈미(시부타니 아야카 분) 또한 마을 주민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같은 인간이었음을 알게 된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작품 중 가장 짧은 106분의 러닝타임으로 구성된 이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인간이 자연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것에 대한 경고를 전달하고 있으며, 악은 실질적으로 존재함을 분명히 보여준다. 우리의 모든 판단 사이에는 회색지대가 존재하며 하마구치 류스케는 인간의 모습 속 미묘한 틈을 차분하게 포착해냈고, 영화 결말부에 이르러서는 또다른 혼란스러움을 제시하였다. 영화제 본상은 아니지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차지했다.

AWARD CEREMONY SILVER LION AWARD FOR BEST DIRECTOR IO CAPITANO ME CAPTAIN Matteo Garrone
ⓒAndrea Avezz La Biennale di Venezia-Foto ASAC

마리오 가로네의 〈더 캡틴〉은 세네갈을 떠나 유럽에서 팝스타로의 성공을 꿈꾸는 세네갈 소년 세이두(세이두 사르 분)와 무사(무스타파 팔 분)의 관점에서 불법 이민을 다루고 있다. 래퍼로서의 성공을 꿈꾸는 세이두는 유럽으로 떠나기 위해 다카르에서 열심히 돈을 모은다. 이들은 시장에서 유럽에서의 이민자의 삶이 어떠한지 그 실상을 듣지만 무시한채 결국 세네갈을 떠난다. 이후 온갖 역경에 맞서며 세이두는 세네갈을 떠나온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만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에 자책하며 유럽행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이 작품은 최근 계속 나오는 이민자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모든 전개가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향한다는 점에서 조금은 루즈한 면이 있다. 그러나 이를 상쇄한 것은 기술적 완성도와 배우의 연기력이다. 촬영은 광활한 사막의 장엄함을 생생하게 표현하였고 동시에 나약한 인간을 효과적으로 대비시켰다. 여기에 경쾌한 아프리카 전통 음악은 감정을 고양시키며 주인공이 떠나는 여정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특히 비전문 배우를 캐스팅한 마리오 가로네의 선택은 적중했다. 세이두 사르는 그 어떤 베테랑 배우보다도 다양한 감정선을 폭발력 있게 보여주었고, 그 결과로 마르첼로마스트로얀니상을 거머쥐었다.

‘버라이어티X골든글로브’ 파티에서 파블로 라라인.

또다른 수상작들

각본상은 〈공작El Conde〉의 기예르모 칼데론과 파블로 라라인이, 심사위원 특별상은 아그네츠카 홀란드의 〈푸른 장벽Zielona granica〉이 선정되었고, 볼피컵(연기상)은 각각 〈프리실라Priscilla〉의 케일리 스페이니(여우주연상)와 〈메모리Memory〉의 피터 사스가드(남우주연상)가 차지했다.

〈공작〉은 올해 베니스에서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개막일에는 기자시사로, 그 다음날 프리미어 상영때는 갤러리에서 감독과 스태프, 배우와 함께 영화를 보기도 했고 그날 저녁에는 ‘버라이어티X골든글로브’ 시상식 겸 파티에서 감독인 파블로 라라인이 상을 받으며 또 한번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파블로 라라인의 〈공작〉은 정치적 은유와 밀도 있는 농담이 가득 담긴 블랙 코미디이다. 파블로 라라인은 그가 잘하는 사회풍자와 전기를 영리하게 섞어 흥미로운 이야기를 내놓았다. 작품은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 피노체트에서 따온 주인공 클로드 피노슈(하이메 바델 분)를 중심으로 일어난다. 작품 군데군데 예리함과 엉뚱함이 절묘하게 섞여 있는 이 뱀파이어물은 놀라운 양상으로 전개된다.

〈공작〉은 베니스 프리미어 후 보름만인 9월 15일 넷플릭스에 공개되었다. 빠르게 스트리밍으로 접할 수 있다는 강점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이 작품의 가장 좋았던 점이 사운드였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열고 닫는 행진곡과 피노슈를 휘감는 바람 소리 등 정교하게 만들어 낸 사운드는 극장에서 아주 큰 힘을 발휘했다. 스트리밍으로 〈공작〉을 본다면 꼭 사운드적으로 좋은 환경에서 감상하기를 권한다.

EL CONDE Actor Jaime Vadell ⓒNetflix

아그네츠카 홀란드의 〈푸른 장벽〉은 〈더 캡틴〉과는 또다르게 이민자의 이야기를 전한다. 원제인 ‘Zielona granica’는 벨라루스와 폴란드 사이의 무인지대인 숲을 가리킨다. 〈푸른 장벽〉은 벨라루스에서 폴란드로 넘어가려는 중동과 아프리카 등 다양한 국가의 난민들을 추적한다. 이들은 유럽 연합으로 진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벨라루스의 독재자 알렉산더 루카센코의 손아귀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며 불확실한 상황으로 내몰린다.

모든 화면을 흑백으로 구성한 채 난민 바로 옆에서 이들을 쫓는 카메라는 이들의 처지를 현실감있게 보여준다. 전쟁영화를 떠올리게하는 이 작품에서 아그네츠카 홀란드는 픽션과 다큐멘터리 사이에서 균형잡기에 성공하였으며, 난민들이 경험하는 고통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힘있게 전달한다.

ZIELONA GRANICA GREEN BORDER Official still

이렇게 데미언 셔젤을 중심으로 감독 제인 캠피온, 미아 한센러브, 마틴 맥도나, 산티아고 미트레, 로라 포이트러스, 가브리엘레 마이네티와 배우 서기, 샬레흐 바크리 등 면면이 화려했던 올해의 심사위원진은 기대에 걸맞는 수상작을 선정하며 11일간의 축제를 아름답게 마무리했다. 이외에도 70년대 이탈리아 시네마를 대표하는 릴리아니 카바니와 90년대 홍콩영화의 아이콘 양조위가 명예황금사자상을 받았고, 40분 러닝타임의 짧은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로 베니스 비경쟁부문을 찾은 웨스 앤더슨은 까르띠에 특별상 ‘글로리투더필름메이커Glory to the Filmmaker’를 받기도 하는 등 올해의 베니스는 작품성과 화제성을 모두 잡는 데 성공했다.

AWARD CEREMONY Tony Leung Chiu Wai ⓒAndrea_Avezz La Biennale di Venezia-Foto ASAC

뒤숭숭한 분위기에서 시작했던 베니스영화제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 끝은 성공적이었다. 할리우드 파업이 마무리되고 모든 것이 정상화 될 내년 베니스영화제에는 한국영화가 초청되어 메인베뉴 팔라초치네마에 태극기가 펄럭이길 기대해본다.

 


 

사진제공 베니스국제영화제

 

* 《쿨투라》 2023년 10월호(통권 11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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