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시조가 종소리처럼 번져서 현실의 닫힌 귀 열 수 있기를
[북리뷰] 시조가 종소리처럼 번져서 현실의 닫힌 귀 열 수 있기를
  • 유혜영 에디터
  • 승인 2023.11.03 17: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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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자 새 시조집 『바닷물 연고』

200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시조당선으로 등단하여 현재 운문시대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미자 시인의 시집 『바닷물 연고』가 출간되었다.

박미자 시인은 시조집 『그해 겨울 강구항』, 『도시를 스캔하다』, 수필집 『한남새』를 발간하였으며, 울산시조작품상, 울산문학작품상, 김상옥백자예술상신인상, 제40회 성파시조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번에 펴낸 『바닷물 연고』는 5부로 나뉘어 총 68편의 짧은 시편들을 수록했다. 1부 ‘언저리만 맴도는 맛’, 2부 ‘자유가 더 두려웠다’, 3부 ‘짧게 끊는 스타카토’, 4부 ‘꿀잠은 내게 주시고’, 5부 ‘좌표를 다시 찾고자’로 구성하여, 평소 시인이 갈망해온 존재의 위상 찾기와 서정적 모색의 시학詩學을 담아냈다.

박미자 시인의 시는 존재가 처한 결핍의 조건condition을 극복하고 간난艱難과 기다림의 서사敍事를 수용하듯 고통을 통과하는 견딤의 존재론적 노력과 추구를 통해 그 실존적 성숙과 시적 원숙함에 이른다. 무엇보다 시인의 시적 성숙도grade of maturity를 견인하는 시인의 방편은 충만한 견딤의 자세와 시적 모색摸索의 다양성일 것이다.

 

그대
그리는 맘
눈보라 다 물리치고

꽃대궁 돌려대던
바람도 얼어있다

자리를
지킨다는 건
오롯이 견디는 일

- 「겨울 꽃무릇」

 

꽃이 무성할 때, 즉 꽃숨이 만화방창萬華芳暢할 때를 견인牽引하는 힘은 역설적이게도 꽃이 없는 시절을 받자하니 극복하려는 견인堅忍의 마음바탕, 그 옹골찬 내재력內在力에 있다. 꽃무릇, 즉 상사화相思花의 생태적 특이성이 자아내는 상황이 시적 에스프리로 작용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보다 선험적인 눈길로 보면 모든 화물花物은 ‘눈보라 다 물리치’듯 내재적 생명력의 시험과 시련을 통해서 고유해지는 자발성의 구체具體이자 생명의 구상具像이라 할만하다.

'꽃대궁 돌려대던/바람도 얼어있’는 극한의 상황에 함몰되지 않고 스스로 내적 비전vision을 견지하는 것, 이런 화자의 견인주의tractionism는 ‘그대’라는 긍정적 함의含意의 대상을 향한 ‘오롯’한 지향에 그 내적 방점이 심중에 찍혀있어서 가능하다. 이렇듯 참고 견딤, 인내patience는 생명의 본원적인 유지와 항상성恒常性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로 시인의 내면에 견실하게 작용한다.

유종인(문학평론가) 시인은 “박미자의 시적 모색은 듬쑥한 속종을 지닌 기린처럼 ‘한쪽이 등을 내’주듯 서정lirycism의 ‘눈빛이 그윽’해지도록 존재의 충만한 풍물과 경지를 돋아내고 그걸 자기만의 시적 언어로 특화特化하는데 남다른 열정이 닿아있다.”고 평한다.

박미자 시인

그 시적 열정은 존재의 결핍과 크고 작은 고통과 그리움과 아쉬움 등을 너름새 있게 통합하고 추스르는 냅뜰성으로 시조적 품을 깊게 넓혀가는데 그 발군의 기량이 내재돼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시조적 품성은 존재의 좌표를 유의미하게 찾아가는 시적 동기motive이면서 동시에 시인된 내면의식을 더 풍부하고 균질감 있는 시조적 정형과 다감한 존재의 감성을 고양시키는 견인차이기도 하다. 훤칠한 기린의 몸매처럼 고통을 고통에 함몰시키지 않고 사랑스런 서정의 모색을 부단히 일구어가는 시인의 눈에는 세상 험지와 어울린 오이시스와 무지개가 걸린 지평선이 코르사주corsage처럼 맺혀있다. 시인에게 시조는 그 눈에 맺힌 눈부처 같은 코르사주의 언어를 현실에 공명하는 가슴의 언어로 조화시키려는 시적 모색의 광휘로 자자하다.

 

마그마가 굳어 생긴 검은 바위 해변에서
거북손이 스멀스멀 자라기 시작했다
태왁을 둘러메고서 먼 길 떠난 그 자리에

지난한 날을 깁던 그물코 틈사이로
울음 같은 노랫가락 한 올 한 올 채워지면
아버지 천 근 비늘을 도리깨로 털어냈지

갈고리 손마디를 무명실로 동여매고
‘내가 죽어야만 걱정이 끊어지지’
갯바람 살 터진 말씀, 뼈마디에 스민다

- 「바닷물 연고軟膏

 

그녀는 오늘도 “마그마가 굳어 생긴 검은 바위 해변”에서 걸어온 지난한 생을 “무명실로 동여매고” 한 올 한 올 아름다운 시조의 언어로 길어올리고 있다. “한편의 시조가 종소리처럼 번져서 현실의 닫힌 귀를 열 수 있기를 꿈꿔왔다”는 박미자 시인의 새 시조집 『바닷물 연고』를 조용히 읊조려보자. 심연에서 길어올린 그녀의 깊은 은유가 들리지 않는가.

 


 

* 《쿨투라》 2023년 11월호(통권 11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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