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ICON] 〈연인〉의 남궁민, 이 음험한 시대의 ‘신드롬’이 되어가다 2023년 드라마 아이콘: 남궁민
[2023 ICON] 〈연인〉의 남궁민, 이 음험한 시대의 ‘신드롬’이 되어가다 2023년 드라마 아이콘: 남궁민
  • 최정인(중앙대학교 교수)
  • 승인 2023.12.01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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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즈의 백단장이 조선의 장현 도령으로 컴백하다

드라마 제목이 〈연인〉이라고 했다. 이런 평범하다 못해 올드하기 짝이 없는 제목이라니. 썩 끌리지 않았다. 게다가 〈스토브리그〉의 백승수 단장과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추민하 선생과의 애틋한 로맨스라니. 이 캐스팅 조합이 어울리나 하는 의구심이 마구 들었다. 요즘 같이 트렌디한 시대에 병자호란 중 연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랑 이야기라니. 뭔가 대중에게 어필할 만한 요소도 보이지 않았다. 지상파 TV방송국의 드라마 한 편이 또 망하겠구나, 역시 대세가 OTT인 것은 변할 수 없는 현실인가 하는 탄식을 하게 된다.

구암 허준 선생의 라이벌인 유도지 영감의 수염이 남궁민의 미모를 깎아 먹은 지 10년 만에 또다시 갓 쓰고 도포 입은 그의 모습을 봐야 한다니. 이게 과연 최선인지 챗GPT에게 물어보면 뭐라고 답을 해 주려나?

이 음험한 시대를 비집고 나타난 드라마 〈연인〉은 나의 섣부른 판단을 비웃으며 이렇듯 다가왔다. 추민하 선생은 댕기 머리가 제법 귀엽게 어울리고, 비비안 리 저리가라 동네 도령들 홀리는 여우짓도 잘 해낸다. 장현 도령으로 컴백한 우리의 백단장은 레트 버틀러처럼 매력을 발산하면서 길채가 먹고 싶다고 했던 콩떡을 오다 주웠다는 듯 무심하게 사 안기기도 하는 낭만적인 구석도 있다.

길채의 꿈속에서 그녀가 떨어뜨린 붉은 실패를 잡아 든 장현, 하늘의 운명이 이어 준 인연인 것이 분명한 그들이 서로의 감정을 속이고 때론 서로의 마음을 드러내며 이런저런 엇갈림과 무섭고 끝없는 전쟁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나서야 돌고 돌아서 너무도 어렵고 힘겹게 다시 만난다. 그리고 또다시 서로를 향한 애달픈 눈길을 보내며 원치 않은 헤어짐이 다시 이어진다. 아, 과호흡이 오는 것 같다.

망한 드라마 운운하던 것을 죄다 잊어버리고, 어느덧 이장현의 미세한 표정 변화와 그가 내뱉는 한마디 말에 숨을 죽이고 초집중하는 나를 발견한다. 그들의 만남과 헤어짐, 주옥같은 장현의 대사에 가슴이 아플 즈음 화면이 멈춘다. 또 나는 탄식을 한다. 일주일을 기다려 온 이번 회차가 여기서 끝나다니. 이렇게 절실하게 드라마의 다음을 기다렸던 것이 얼마 만인가. “드라마는 역시 몰아보기가 최고!”를 피력하던 내가 ‘본방사수’를 하다니. 이장현의 쇼츠를 죄다 돌려보고 나서야 하루의 일과를 끝낸다. 아,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MBC 제공

‘목숨을 걸 만큼 절실한 사랑’이라니, 그것은 우리 모두의 판타지

남궁민은 작품마다 충실하게 작품 속 그 사람이 된다. 그는 한때 안하무인 재벌 후계자 남규만이었기도, 콤플렉스로 가득한 봉마루이기도, ‘괴랄한’ 언행을 일삼는 김과장이었기도 했다. 또 능글맞지만 정의로웠던 천지훈 변호사이기도, 교도소에서 냉정과 열정을 오가던 닥터 나이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드라마 〈연인〉에서 철저히 이장현으로 빙의했다.

〈연인〉의 장현은 환멸과 비극의 역사 속에 서 있다. 그는 임금이 곧 나라였던 시대에 임금보다 백성을 위한 사람이었다. 청나라로 끌려간 포로들을 속환하고 구하고자 애쓴 사람은 임금이나 세자도, 어느 고관대작도 아닌 장현이었다. 그는 나라가 필요로 했으나 희생을 강요당했고, 충성을 다했으나 나라로부터 버림받았다.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에서 누이와 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조카(일지도 모를) 소리꾼 량음이나 의주 건달 구잠, 기생 영랑 등 여러 사람들과 호형호제 관계를 맺은 그는 인간이 지닌 존엄함을 알고 계급의 평등을 실천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내가 사는 불온한 현실에서는 흉내를 낼 수 없는 사람인 셈이다. 누구보다 엄혹한 시기를 살았던 장현은 그렇게 이 시대에 하나의 ‘현상’이 되어간다.

이장현은 처음 ‘꽃소리’를 들려준 그의 연인을 미워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의 곁을 영영 떠나버린 야속한 연인이 죽도록 미웠다가도 아무리 봐도 미운 마음이 들지 않았고, 외려 스스로가 미웠다”는 그의 마음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연인〉에서 장현의 숭고하고도 절절한 찐 ‘목숨을 건 사랑’은 통속 소설에서 찾을 수 있는 값싼 감정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판타지가 된다. 그에게 허우적대다가 어느덧 일주일이 지난다. 또 드라마로 끝나는 일과를 마무리하며 그 판타지를 벗어나 정신 차려보지만, 나는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감정의 징후를 현실에서 찾아 헤맨다. 그러나 흔적조차 발견하기 어려운 이 냉혹한 현실이라니. 결국 드라마는 종영했고, 나는 여전히 장현을 앓고 있다.

엠케이엠엔트 제공

오랜 시간을 잘 버텨 온 연기자, 내공이 빛나는 배우 남궁민

그는 비교적 작품 운이 따라주는 배우이다. 아니, 작품을 고르는 선구안이 좋은 것일 수도 있다. 남궁민에 대한 기억은 주인공의 남자친구로 대사 몇 마디 없이 스치듯 나온 영화 〈나쁜 남자〉에서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가 명확히 배우로 인식되기 시작한 건 유하 감독의 영화 〈비열한 거리〉에서 조인성의 비열한 친구로 등장하면서다. 비중이 크지는 않았어도 도드라지지 않은 표정에 조곤조곤한 말투로 인간이 지닌 내면의 비열함을 저리 표현하다니. 괜찮은 캐릭터를 건졌다 싶었다.

생각해보니 남궁민은 주인공 친구역의 단골이었다. 나중에 김대승 감독의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이병헌의 여러 친구 중 한 명으로 출연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다시 영화를 찾아봤던 적이 있다. 금테 안경을 쓰고 고생을 모르고 자란 어느 부잣집 아들 같은 외모를 지녔던 어린 남궁민은 아이러니하게도 참 눈에 안 띄게, 눈에 띄는 배우였다.

이렇듯 남궁민은 데뷔를 하자마자 반짝 뜬 스타는 아니다. 그는 생각보다 무명의 시간이 길었고, 주인공의 친구에서부터 주연에 이르기까지 단계를 차근히 밟으며 오랜 시간을 묵묵히 잘 버텨왔다. 그리고 이제는 연기의 진 맛을 아는 배우가 되어가는 중이리라.

엠케이엠엔트 제공

그의 미소는 나날이 진화하는 중

남궁민의 연기 궤적은 변화무쌍하다. 지금껏 그가 만들어 낸 인물은 겹치는 캐릭터가 없다. 〈리멤버〉의 빌런이었던 남규만은 영화 〈베테랑〉의 유아인과 견줄 정도의 독한 광기를 지니고 있다. 단순히 오만함으로 무장한 재벌 후계자를 재현해왔던 전형성을 벗어나 ‘미친’ 비정상성을 표현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내 마음이 들리니〉의 봉마루와 〈닥터 프리즈너〉의 나이제는 이중적이면서 복잡한 감정을 지니고 입체적인 캐릭터로 결국 변화(또는 변질)하는 인물의 기준이 바로 이것이라고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김과장〉의 똘끼가 충만했던 김성률이나 〈천원짜리 변호사〉의 해맑으면서도 능글맞기 짝이 없던 천지훈은 그간 남궁민이 맡았던 묵직한 연기 스타일을 벗어나 가벼운 톤을 보인다는 점에서 연기의 범주를 확장했다 볼 수 있다. 그는 목소리 톤, 수반하는 행동의 습관, 말의 속도 등 섬세한 인물의 표현을 통해 두 캐릭터를 준별되도록 한다. 이는 남궁민이 캐릭터를 구현하는데 그간 쌓인 내공이 발현되는 순간이다.

〈스토브리그〉의 백승수 캐릭터는 감정표현이 뭉툭하다. 백승수는 전작들에서 보였던 남궁민 연기의 스펙트럼의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AI인가 싶은 말투, 변별되지 않는 감정, 아닌 듯이 멕이는 표정으로 이런 카리스마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아주 드물게 웃기도 한다. 〈연인〉에서 길채를 향해 미소 짓는 장현의 애정 충만한 표정만은 못하지만, 백승수의 미소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이 아쉬우나마 미소 갈증을 해갈한다.

드라마 종영 직후 아직은 이장현이 시리도록 그리워 나는 또다시 SNS를 전전하며 여러 남궁민의 미소를 찾아낸다. 그가 웃는다. 그의 눈도 같이 웃는다. 그리고 그 미소에 홀린 나도 따라 웃는다. 어느덧 그에게 ‘궁며든’ 내가 보이고, 이내 ‘꽃소리’를 듣는다. ‘분꽃 터지는 소리’를 지닌 그의 미소는 나날이 진화 중이다.

 

 


최정인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영상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드라마 관련 교과목을 개설하여 수업을 시작했다. ‘열정적인 중재자’ 유형의 MBTI로 늘 드라마틱한 하루를 꿈꾸지만, 직업 덕에 ‘재기발랄한 활동가’를 코스프레하며 하이퍼리얼한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영화를 전공했고, 영화 프로듀서로 일을 한다. 가끔 시간 되고 돈이 될 때 독립영화 연출도 간간이 하고 있다. 2021년에 다큐멘터리 〈청춘선거〉의 프로듀서를 맡아 극장 개봉을 시켰고, 2022년에 〈Onstage〉라는 VR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다. 최근 드라마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논문 「A Study on the Topographical changes in Korean drama since the 2000s(2023)」을 쓴 바 있다. 오래전, 『배우 연기 연출』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 《쿨투라》 2023년 12월호(통권 11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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