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ICON] 이강인, 한국 축구가 경험해보지 못한 미래 2023년 스포츠 아이콘: 이강인
[2023 ICON] 이강인, 한국 축구가 경험해보지 못한 미래 2023년 스포츠 아이콘: 이강인
  • 박강수(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
  • 승인 2023.12.01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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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와서 하는 얘기지만, 작년 이맘때만 해도 원성이 자자하였다. 매주 축구를 보는 사람과 4년에 한 번 축구를 보는 사람, 그리고 미디어가 합심하여 파울루 벤투를 향해 물었다. ‘왜 이강인을 쓰지 않느냐’고. 벤투 당시 감독은 2022년 9월 카타르월드컵 직전 마지막 평가전을 앞두고 18개월 만에 이강인을 A대표팀에 소집했으나, 단 1초도 출전시키지 않고 벤치만 달구게 한 뒤 마요르카(스페인)로 돌려보냈다. 팬들은 안달했지만, 벤투 감독에게는 나름의 뜻이 있었던 모양이다. 11월 그는 이강인을 카타르로 데려갔고, 모든 경기에 내보냈다.

이때부터 ‘이강인의 시간’은 시작됐다.

이강인 공식 인스타그램

2023년을 대표하는 ‘스포츠 아이콘’으로 이강인을 뽑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강인은 지난 1년 사이 자신의 운명을 가장 역동적으로 개척해낸 스타 중 한 명이다. 한국이 수출한 많은 문화 아이콘이 그러하듯, 그도 세간의 억측과 단견, 망상에 괘념치 않고 담대하게 자신의 가능성을 확장했다. 이 압축성장은 경이로웠고,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지속될 공산이 커 보인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일 것이다. 정각에 맞춰 도착한 한국 축구의 미래를 축복하며 이강인의 지난 1년에 책갈피를 몇 개 꽂아두기로 한다.

2022년 11월28일 카타르월드컵 H조 조별리그 가나와 2차전. 0-2로 뒤진 후반 12분께 이강인이 권창훈과 교체되어 그라운드를 밟았다. 패색이 짙었던 에듀케이션시티 스타디움은 ‘골든보이’의 등장과 함께 술렁이기 시작했고, 투입 1분 만에 요동쳤다. 왼 측면에서 상대 수비의 공을 탈취한 이강인은 템포를 늦추지 않고 왼발을 크게 휘둘러 크로스를 찔렀고, 정밀하게 휘어들어 간 패스는 쇄도하는 조규성의 머리를 직격한 뒤 골망에 안착했다. 이 득점은 해일을 불렀다. 3분 만에 다시 조규성이 헤더 동점골을 쐈고, 경기는 점입가경이 됐다.

11월 21일 중국 선전 유니버시아드 스포츠센터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한국과 중국의 경기에서 대표팀 이강인이 경기장에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폭발적인 3분이었다. 비록 졌으나(2-3) 축구를 사랑하는 모든 이로부터 찬사받을 만한 명승부였다. 스포츠전문매체 《디 애슬레틱》은 조별리그 1·2차전 32경기 중 이 한 판을 최고의 승부 4위에 놓으며 “미친 경기”라고 감탄했고,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월드컵 드라마의 모든 요소를 다 가진 대단한 대결”이라며 열광했다. 1차전 우루과이전과 마찬가지로 연달아 교체로 들어와 경기장 공기를 바꾸고 지각 변동을 주도한 이강인은 월드컵 무대 데뷔 소감을 묻는 말에 “월드컵에서 뛰는 일은 꿈이었다”라고 답했다.

도하는 그에게 긴 세월 분투 끝에 얻어낸 증명의 장소였다. 일찍 유럽행 축구 유학길에 올랐던 소년은 세계의 재능이 답지하는 가혹한 전장에서 당장의 출전 시간 확보를 위해 싸워야 했고, 데뷔 5년 차가 되어서야 마요르카에서 주전 자리를 쟁취했다. 이 발판은 1년 7개월 만의 태극마크로, 생애 첫 월드컵으로 돌아왔다. 카타르에서 훈련 첫날, ‘성장의 비결’을 묻는 기자의 말에 그는 “달라진 것은 없다”며 “그저 자신을 믿고 열심히 했을 뿐”이라는, 그저 자신을 믿고 열심히 해온 이들 만이 입에 담을 수 있는 가장 자신만만한 답변을 했다.

10월 3일 프랑스 파리의 파르크 데 프랭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2023 시즌 리그1 파리 생제르맹과 몽펠리에 경기에서 이강인(오른쪽)이 골을 넣은 뒤 킬리안 음바페와 포옹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제공.

마요르카에서의 2022-2023시즌은 더없이 값진 시기였다. 앞선 네 시즌 동안 이강인은 스페인 라리가 기준 74경기에 출전해 3골 6도움을 올렸는데, 이 시즌에는 36경기(33경기 선발)에 나서 6골 6도움을 기록했다. 그는 전 시즌 리그 16위의 강등권 경쟁팀을 9위로 수직 상승시킨 마요르카 축구의 원동력이었고, 그 가치는 여러 수치에서 드러난다. 대표적인 지표는 크로스와 드리블인데, 둘 다 리그에서 두번째로 많았다(크로스 201개, 드리블 성공 90회). 특히 드리블은 유럽 7개 리그를 통틀어 5위를 차지할 정도로 위협적인 무기였다.

그간 단점으로 지적됐던 수비 위치 선정과 활동량, 피지컬이 개선되면서 이강인은 그라운드 위 어디에서든 상대 수비 한두 명쯤 단숨에 벗겨내는 드리블과 수비라인을 무장해제시키는 패스 한 방을 겸비한 전천후 미드필더에 다가섰고, 7월 9일 그의 성장세를 유심히 지켜봐 온 프랑스 리그1의 명문 구단 파리 생제르맹의 부름을 받았다. 계약 기간 5년에 추정 이적료는 2200만 유로(약 300억 원). 이강인이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호화로운 스타 군단 파리의 일원이 됐다는 소식에 한국의 축구팬들은 황홀했다. 그로서도 중대한 시험대였다.

파리는 이번 여름 킬리안 음바페와 리오넬 메시, 네이마르를 한 팀에 묶어뒀던 스타 프로젝트의 실패를 인정하고 리빌딩에 돌입했다. 메시와 네이마르를 내보냈고 자리에 이강인을 비롯해 랑달 콜로 무아니, 우스만 뎀벨레, 마르코 아센시오 등 젊고 실용적인 선수를 데려와 진용을 재편했다. 여전히 쟁쟁한 멤버들이지만, 기조 변화는 명확하다. 이강인은 그간 비효율적인 투자에 신물이 난 파리의 새로운 야심에 응답해야 하고, 생애 그 어느 때보다 거대한 무대에서 자신을 입증해야 한다. 현재 기록은 모든 대회 9경기 2골 1도움, 적응은 순조롭다.

10월 13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축구대표팀 평가전 한국과 튀니지의 경기에서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이 교체 아웃된 이강인과 포옹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한국 축구사의 계보는 알다시피 차범근, 박지성, 손흥민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의 한계를 돌파한 변곡점이었다. 다만, 셋 모두 헌신과 겸양, 국위선양 같은 비장한 정조의 영웅담 속 주인공이었다는 점에서 하나의 맥락 위에 있다. 그 이야기들은 감동적이었지만, 다소 버겁고 무거운 것이기도 했다. 이강인은 아직 이들과 같은 반열에 오르기까지 보여줘야 할 것이 많지만, 그간 한국 축구가 보유했던 어떤 재능과도 다르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축구를 즐기고, 그 태도가 플레이에서 묻어난다.

4년 전 2019 U-20월드컵 준우승 당시, 이강인과 선수들은 결승전 패배에도 상심한 기색이 아니었다. 이미 거대한 성취를 합작한 그들은 기뻐 보였다. 선배들의 유산 위에서 선배들이 미처 누리지 못한 미덕을 과시하는 당찬 스타 탄생의 현장이었다. 이강인은 지난 한 해 동안 월드컵을 뛰고 파리로 이적한 뒤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땄고 A매치 데뷔골도 넣었다. 이제 그는 위르겐 클린스만의 한국 대표팀 상수다. 〈날아라 슛돌이〉의 천재 꼬마로 세상과 만난 소년은 굴곡진 비탈길을 뚫어 한국 축구가 경험해보지 못한 미래를 그라운드에 가져왔다.

 

 


박강수 2021년 입사해 스포츠팀에서 2022 카타르월드컵을 현장 취재했습니다. 지금은 미디어 관련 기사를 씁니다.

 

 

 

* 《쿨투라》 2023년 12월호(통권 11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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