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어떤 세계의 복원: 〈소년들〉
[영화 월평] 어떤 세계의 복원: 〈소년들〉
  • 강유정(영화평론가, 강남대 교수)
  • 승인 2023.12.04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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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일회적 사건을 다룬다면 문학은 일어날 법한 일을 다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두고 일어날 법한 일의 재현이 일어난 것에 대한 기술보다 윗길이라 말한바 있다. 허구가 사실의 나열보다 더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영화화할 때 간혹 사람들은 질문하곤 한다. 그렇다고 역사가 바뀌거나 달라지는 것은 아닌데, 허구적으로 다시 그려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있었던 사건을 있을 법한 일로 만드는 동안 그 과정에서 무릇 일어난 일을 헛되이 버리지 않고 더 나은 삶의 도래를 기획할 수 있다. 사건이 아니라 사람을 배우는 것, 영화를 만들고 보는 게 인문학인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 소년들의 이야기도 그렇다. 정지영 감독이 2023년 새롭게 선보인 영화 〈소년들〉은 실제 있었던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1999년 전북 완주군 삼례읍의 작은 슈퍼마켓에서 3인조 강도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3명의 소년이 범인으로 지목되었고 일사천리로 사건이 해결되었다. 하지만 사실 3명의 소년은 진범이 아니었고 경찰의 강압 수사로 인한 허위 자백의 결과로 이루어진 엉터리 사건이었다. 소년은 청년이 되도록 감옥에 있어야 했고, 잘못은 바로잡히지 않았다. 17년이 흐른 후 2016년이 되어서야 재심을 통해 소년들의 무죄는 겨우 입증되었다. 이 기막힌 사연은 공중파 르포 프로그램, 사건 재연 프로그램 그리고 영화 〈재심〉을 통해 재현된 바 있다. 재심을 통해 사건이 바로 잡히는 경우도 워낙 드물지만 사실 소년들이 용의자에서 범인으로 지목되는 과정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소재 자체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공분을 살 만했고, 뒤늦은 사필귀정이 말 그대로 영화적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2023년, 다시 이 사건을 〈소년들〉이라는 영화로 재구성한 차별성은 무엇일까? 재심으로 밝혀진 진실은 그 사건 자체로 강한 호소력을 지닌다. 사건의 우여곡절이 그 중심이 된 사람을 오히려 소외시킬수도 있는 것이다. 사건이 가진 불합리성 자체가 관심의 대상이 되어 이런 과정 속에서 소년들이 잃은 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재심을 통해서도 복원할 수 없었던 시간에 대한 주목은 멀어지기 십상이다. 영화 〈재심〉이 일종의 영웅담처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억울한 소년들의 이야기를 세상으로 끌어낸 미디어 주체, 미디어의 관심을 법적 효력으로 실현한 변호사에게 힘을 실어 준 것이다.

〈소년들〉의 차이점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정지영 감독의 관심사는 사건보다 사람이다. 삶의 중심으로부터 밀어 넘어뜨릴 만큼 강력한 사건을 만나게 되었을때, 사람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순간 누군가 그 곁을 지켜주고자 했던 사람은 없었는지 그리고 만약 누군가 뒤늦게 용기를 낸다면 그런 사람에게 두 번째 선택의 기회는 없는지, 시간과 거리를 두고 살펴보는 것이다.

정지영 감독의 〈소년들〉에는 그래서 인간은 있지만 영웅은 없다. 누구 한 명, 빼어난 영웅의 고뇌에 찬 선택 덕분이 아니라 우리와 별 다를 바 없는, 겁 많고 시행착오투성이인 보통 사람이 늦었지만 용기를 내어 결국 어긋난 세상을 조금 고쳐 낸다. 흐른 세월만큼이나 빗나간 선택을 고쳐, 제자리로 가져오는 정도의 힘, 이 자기 수정과 교정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엄청난 마중물이라는 사실을 감독 정지영은 강조해낸다.

 

그런 점에서, 〈소년들〉에서 경찰 황준철 역을 맡은 설경구의 연기는 탁월하다. 〈불한당〉 이후 댄디한 중년 남성의 세련미로 소비되곤 하던 설경구는 〈소년들〉에서 아주 오랜만에 설경구다운 평범한 소시민의 얼굴로 돌아왔다. 두려워하고, 주저하지만 결국 소신을 잃지 않는 평균적 인물 말이다. 한때 의협심을 불태웠지만 이젠 은퇴를 앞두고 파출소 한직으로 돌아온 평범한 장년, 무엇인가를 해내서 자기 이름을 남긴다기보다, 자신의 과오와 실수를 하나라도 지움으로써 회한의 기록 한 줄을 덜고 싶은 얼굴, 그런 어른의 연기를 해내는 것이다. 설경구가 보여주는 사람의 얼굴은 그의 아내 역을 맡은 염혜란과의 조화로 핍진한 입체성을 담보한다. 염혜란은 그가 맡는 어떤 역에서나 그렇듯이 어떤 허구의 역할마저도 피와 살을 가지고, 어디선가 숨쉬며 살아가고 있을 인물로 설득시켜준다.

〈소년들〉에 구현된 세계는 선과 악, 정의와 부당함이 선명하게 나뉘는 세계이다. 현실에 그것이 모호하게 섞여 있다면 적어도 정지영 감독의 프레임 안에서 그 세계는 선명히 나뉘어 선택의 결과와 몫을 알려 준다. 자신의 입신이나 양명을 위해 타인의 삶과 행복을 짓밟는 자, 함부로 짓밟아도 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해 차별적 기준을 제시하는 자, 잘못을 알면서도 수정하지 않는 자, 잘못이 드러나도 사과하지 않는 자. 정지영 감독은 우리의 현실 세계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이 불공정의 세력들을 영화 속 캐릭터로 형상화해 오늘의 허구적 판단을 매개한다. 비록 현실에서 그들이 권력을 가진 채 살아갈지언정 그것이 올바른, 그럴듯한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감독은 힘있게 전달한다. 그런 점에서, 정지영 감독의 영화 세계는 최근의 희비극적 세계와는 다른 완결의 통쾌감을 준다. 적어도 옳은 건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세계가 2023년 정지영의 영화 세계인 셈이다. 현실이 주지 못했던 세월에 대한 보상과 위로, 격려를 정지영 감독은 이렇게 영화적 언어로 대신해 준다.

어느덧 2023년은 감독 정지영이 데뷔한 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1983년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로 데뷔한 이후, 정지영 감독은 동시대의 질문에 답해 온 현재적 감각의 여전한 현역이다. 1990년 〈남부군〉이나 1994년 〈헐리우드 키드의 인생〉은 90년대라는 사회문화적 스펙트럼에서 반드시 등장했어야 할 작품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10년 이상의 공백기 이후 2012년 개봉했던 〈부러진 화살〉은 한국영화사나 정지영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도 매우 전환기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정지영 감독이 견지하게 되는, 정지영식 사실주의의 토대가 바로 이 작품에 있기 때문이다. 정지영 감독은 꾸준히 자기 혁신을 통해 사실적 기법과 집중력으로 자기만의 영화적 세계를 돌파해 간다. 여전히 흥미롭고, 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실제 사건과 인간적 접근 그리고 집중력과 돌파력, 이 네 가지는 정지영 감독의 2000년대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적 요소이다. 봉인된 실제 사건을 파악하는 뛰어난 감지력과 그 안에 잠재된 맥락을 짚어내는 날카로운 해석력,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중심으로 사건을 재해석해 단숨에 서사화하는 돌파력은 영화가 가진 원초적 힘, 이야기를 통한 진정한 승부사의 면모를 엿보게 한다. 정지영 감독을 데뷔 40주년의 노장이 아닌 데뷔 40주년의 현역 감독이라 부르는 게 마땅한 이유이기도 하다. 정지영 감독의 생물학적 나이나 데뷔의 숫자가 아니라 집중력과 돌파력은 오히려 더 현재적이며 힘이 넘친다. 그가 복원한 세계가 현실에 날카로운 화살이 되는 이유이다.

 

사진제공 CJ E&M

 

 


강유정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2005년 《조선일보》 《경향신문》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으로 등단, 저서로는 『영화 글쓰기 강의』 『타인을 앓다』 등이 있다. 현재 강남대학교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 《쿨투라》 2023년 12월호(통권 11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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