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근현대 한국문학과 한국영화사의 산증인
[북리뷰] 근현대 한국문학과 한국영화사의 산증인
  • 해나 에디터
  • 승인 2023.12.05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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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종원 영화평론가의 두 권 저서 『시정신과 영화의 길』 『시네마천국』

1957년 《문학예술》, 1959년 《사상계》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시인이자 1965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창립발기위원인 영화평론가 김종원 선생이 회고록 『시정신과 영화의 길』과 새 시집 『시네마천국』을 한상언영화연구소에서 동시에 출간하였다.

그는 우리에게 한국영화 100년사를 총결산한 『영화와 시대정신』(작가, 2020)저자로 한국영화사의 산증인이자 현역 영화평론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영화평론가 이전에 그가 50년대 한국시문학사의 교과서인 시인 조지훈과 박목월의 추천을 받은 유명 시인이었다는 사실은 잊고 있었다. 1937년 제주에서 태어난 김종원은 제주 출신 1호 등단 시인으로 학생 시절부터 소년시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는 제주의 대표적인 학생문예지 《별무리》의 편집을 맡았으며 제주 최초의 시 전문지 《시작업》의 발간을 주도하는 등 전후 제주의 문화사에 빼놓을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또한 그는 1959년 영화평론을 시작하여 1965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설립을 주도했으며 현재까지 현역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며, 한국영화사 연구의 한 획을 그은 권위 있는 연구자이기도 하다. 시인이자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로 평생을 살아 온 국헌 김종원 선생의 회고록과 시인 김종원을 다시 호명하는 새 시집을 펼치면 우리 현대사에 아로새겨진 문화예술의 일면을 낱낱이 살펴볼 수 있다.

회고록 『시정신과 영화의 길』

전쟁을 피해 제주로 온 계용묵 등 저명 문학, 예술인들의 영향으로 4·3으로 피폐해진 제주 문화계에 새로운 싹이 트기 시작했다. 1952년 12월 《학원》 잡지를 통해 그 이름을 전국에 알린 학생문사 김종원은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와 동국대학교 국문과에서 수학하며 《문학예술》(1957. 5.)과 《사상계》(1959. 2.)를 통해 시인으로 정식 등단하였다.

제주 출신 1호 등단 시인이라는 영예를 지닌 그는 중학시절 제주 최초의 학생잡지 《별무리》(1953. 12.)를 편집하였고, 제주 최초의 시전문지 《시작업》(1959)의 발간을 주도하며 1950년대 제주 문화계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이뿐만 아니라 엔솔로지 시집 『신풍토』(1959) 동인 및 “60년대사회집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강냉이사설』(1970)과 『광화문행』(1988), 『시네마천국』(2023) 등 세 권의 시집을 발간했다. 이 책을 통해 제주 출신 시인 김종원의 문학 인생을 살펴 볼 수 있다.

서라벌예술대학 재학 시절 서귀포 출신 시인 한기팔과 함께.

1950-60년대 명동 시대의 주역 4·19 혁명과 조선투위 참여

1950-60년대 명동은 젊음과 낭만이 넘치는 문화의 거리였다. 전후의 피폐한 거리에 들어선 수많은 다방과 음악 감상실에는 저명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물론 서울 시내 각 대학의 학생들이 모여 젊음을 꽃피웠다. 이곳 명동은 전후 우리 문화의 심장부이기도 했다. 각종 신문과 잡지의 원고청탁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며 연극, 영화가 기획되었고 각종 행사가 이곳에서 열렸다. 이 시기 명동을 거쳐 간 수많은 인물 중에 김종원도 있었다. 그는 공초 오상순 선생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던 “청동문학”의 중심인물로 오상순 선생의 추천으로 잡지 《녹원》(1957)을 편집하였으며, 동성영화사에서 일을 하며 영화를 기획했다. 이 책에서는 명동을 중심으로 모여든 수많은 인물들을 김종원의 눈을 통해 바라본다.

김종원은 1947년 제주 3·1절 행사를 비롯해 6·25전쟁, 4·19혁명, 유신과 80년 서울의 봄 등 한국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몸으로 겪었다. 이 책에서는 제주 4·3 당시 제주민전 위원장 안세훈을 만났던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부터 목포에서 겪은 6·25 당시 상황, 시위대의 한복판에서 활약했던 4·19혁명 전후의 이야기, 유신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언론자유를 부르짖다 해직된 “조선투위” 활동, 1980년 태창문화사에 근무하던 당시 재야의 거두 김대중의 자서전을 출판하려던 일 등 우리 현대사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씨네팬 직원들.

“영원한 현역”이고 싶은 영화평론가
영화사가에서 이제는 한국영화사의 증언자로

1959년 종합잡지 《자유공론》에 실은 “한국영화평론의 위기와 과제”를 시작으로 60여 년의 세월을 영화평론가로 활약한 그는 한국영화평론가협회(1965)를 조직하여 3대 회장(1981)을 역임하였으며 《씨나리오문예》, 《씨네팬》, 《실버스크린》, 《영화예술》 등 여러 영화 관련 잡지의 발간에 관여하였으며 1964년에는 시인 김규동이 발행하던 《영화잡지》의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1986년 손석희와 공동으로 진행했던 《퀴즈,명화여행》을 비롯해 영화평론가로서 다수의 방송매체에 출연하여 영화를 대중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맡아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이 책에는 영화평론가로 영화잡지 발간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해 영화평론가협회의 운영에 관한 이야기, 영화의 등급을 매기는 심의 활동에 관한 사항 등 1950년대부터 최근까지 영화와 관련한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려준다.

1990년 무렵 대학 강단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본격적인 영화사 연구의 길에 들어선 김종원은 『우리영화 100년』 등 저명한 영화사 서적과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여 한국영화사 연구의 권위 있는 연구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영화 도래에 관한 사항, 한국영화의 기점에 관한 사항, 춘사 나운규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이끌면서 한국영화사 연구의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남겼다. 이뿐 아니라 이제는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영화의 제작현장과 평론계에서의 활동을 바탕으로 그 스스로가 후학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제공하는 등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영화사의 재료이며 그의 글은 중요한 참고문헌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그가 겪었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우리가 한국영화의 황금기에 관한 디테일한 이야기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김종원 새 시집 『시네마천국』

김종원 시인이 이번에 펴낸 새 시집 『시네마천국』은 『광화문행』 이후 35년 만에 내놓는 영화평론가 김종원의 세 번째 시집이다. 이 시집에는 ‘영화에의 헌사’ 등 영화 관련 시편을 비롯한 ‘자연과의 교감’ 등 모두 다섯 묶음, 총 73편으로 구성했다. 여기에는 첫 시집 『강냉이 사설』과 두 번째 시집 『광화문행』에 들어가지 않은 「네온의 물결 속에」(『현대시학』 1966년) 등 두 편이 추가되었다. 영화로 얽힌 사람들과의 추억을 노래하고 노년의 일상을 사색하는 김종원의 시편은 “영화와 시가 함께 자라는 숲”이자 “살아온 삶과 장소에 물든 추억의 창문”과도 같다.

김종원 시인은 새 시집을 내며 “일찍이 시를 쓴답시고 밤을 설친 일이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였으니 1952년 열여섯 살 때였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것이 고향의 일간지 《제주신문》에 게재된 「비탈길」이라는 시였다. 이를테면 처녀작인 셈이었다. 이에 힘입어 같은 해 12월 피난지 대구에서 창간한 중고등학생 잡지 《학원》에 「국화는 피어도」가, 그리고 이듬해인 1953년 7월에는 「봄」이라는 시가 《소년세계》 제1회 문학상에 우수작으로 선정되어 은메달을 받았다. 각기 조지훈 시인과 이원수 아동문학가에 의해 뽑힌 것이었다. 특히 「국화는 피어도」는 조지훈 선생이 언급했듯이 《학원》지가 창간되고 최초로 뽑힌 시였다. 이런 습작 시대를 거치는 동안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폐를 갉아먹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처방받은 ‘나이드라지드’를 끼고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밝힌다.

이런 투병기를 거쳐 김종원 시인은 대학 2학년과 4학년 1학기 때 월간 《문학예술》과 《사상계》의 추천으로 문단에 나올 수 있었다.

김종원 시인과 함께 소년 시절을 비롯하여 50여 년 함께 살아온 후배 문충성 시인은 김종원의 두 번째 시집 『광화문행』의 발문에서 시인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형은 50년대 제주섬에서 일류로 꼽던 제주북초등학교 제주일중 오현고교를 다녔고 나는 형의 1년 후배가 된다. 초·중·고교 시절의 형은 문학소년으로 제주섬의 유일한 존재였다.

4·3사건이 참담하던 시대, 6·25동란을 겪어 보낸 초·중학교 시절의 제주섬은, 때로 학교가 게릴라 토벌대의 주둔지도 됐고, 팔도의 피난민들이 제주 바다를 건너와서 들끓고 있었다. 이런 참담한 시대에 우리의 중학시절은 문학에서 꿈을 찾았고 깊숙이 빠져들어갔다. 이 시절에야 문학 소년 아니던 사람이 뉘 있었을까.

우리의 문학 작품 읽기는 국민학교 4학년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중학 전학 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중학 3년을 꼬박 책읽기에 바쳤다. 조숙했던 형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동시를 썼고, 중학 3년 때는 이미 소년 시인의 모습을 내보여 주었다.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6·25 동란의 와중에도 52년 11월 《학원》이란 중학생 잡지가 대구에서 처음 나왔는데 창간호에 학생 작품 모집이 있었고 다음 달인 12월호의 ‘학원 문단’에 형의 시 <국화는 피어도>가 조지훈 선생 선평과 함께 게재된 것이다.

문충성 시인은 이어 “자그마한 키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형은 문학 분야 말고도 그림이나 붓글씨까지 예술이라면 음악, 연극까지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시인이 된 것이 어느새 예순 네 해가 되었지만 김종원 시인은 그동안 『강냉이 사설』(1970)과 『광화문행』(1988), 두 권의 시집밖에 내놓지 못했다. 시를 쓴 연륜에 비해 초라한 실적이 아닐 수 없다. 세 번째 시집 『시네마천국』을 펴낸 그를 다시 시인으로 호명한다.

네오드라마 동인회.

영상자료원 주최, ‘저자와의 대화’

지난 11월 22일 오후 3시에는 한국영상자료원 주최로 김종원 ‘저자와의 대화’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있었다. 평소 저자를 흠모하는 전국의 팬들이 좌석을 가득 채웠다. 3시간여에 걸친 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눈을 반짝였다.

저자는 “정작 시인이 된 뒤에는 시보다 오히려 영화에 매달려 살았다”고 고백했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시작詩作의 고통과 달리 영화적 상념들, 이를테면 르네 크렐의 <인생유전>, 캐롤 리드의 <심야의 탈주> 같은 오묘한 영상언어들에 매료되면서 시의 이미지를 편안하게 스크린 영상으로 연결”시켰으며, “표현 방식과 장르가 다르지만 느낌의 언어를 논리적으로 조직하고 표현하는 일은 시와 영화가 다를 게 없다.”고 말했다. 저자의 고백처럼 그가 쓴 시중에는 이번 시집의 표제작 「시네마천국」을 비롯하여 「ET가 머물다 간 마을」 「나운규」 「분홍신」 「북치는 소년」 등 영화를 소재로 한 시편이 많이 보인다. 중학교 때 《학원》 창간호에 실린 「국화는 피어도」에 대해 질문하자 시인는 “국화가 피기까지는 고향에 가자고 했다// 노을이 고웁게 물드는/바닷가 언덕에 누워/휘파람을 불면서 소년은 생각한다.”로 시작하는 시의 앞 부부분을 암송하며, “4·3사건으로 집안이 어수선할 때 목포로 유학 가 목포상업학교(현재의 목포상고)를 다니며 고향을 그리워했던 기억을 살려 쓴 시”라고 밝혔다. 그 때 함께 당선한 동기가 “정규남(목포중학) 시인과 최해붕(영덕중학)”이라고 또렷이 언급했다. 이듬해에는 유경환, 이제하, 황동규, 마종기 등 기라성 같은 시인들이 문학소년들로 학원을 거쳐나갔다고 전했다. 저자는 6·25전쟁을 만나 영암으로 피난갔지만 바다 저편의 두고 온 고향을 잠시도 잊지 못해 유달산을 한라산으로 느끼며 향수를 달랬다고도 고백했다. 또한 《학원》지 덕분에 전국에서 팬레터도 많이 받았다며 문청 시절을 추억하기도 했다.

그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 같은 대한민국 문화사였다. 두 권 저서의 일독을 권한다.

 


김종원 선생은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와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57년 《문학예술》, 1959년 《사상계》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1959년 영화평론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65년 창립된 한국영화평론가협회 발기인이자 3대 회장을 역임했다.(1981. 2. 1. - 1982. 1. 31.) 학원사와 조선일보사에서 근무했으며 1975년 자유언론 수호를 위해 조선투위에 참여하여 강제 해직 당했다. 이후 공연윤리위원회(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심의위원을 역임했으며 인하대, 동국대, 청주대, 한국예술종합대학 영상원 등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청룡영화상 제1회 정영일영화평론상,(1994. 12), 제주도 문화상(예술부문, 2000. 12.), 한국예술발전협회 주최 제1회 ‘한국예술발전상’(2001. 12.),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특별 공로예술가상(영화평론, 2007. 12.), 영평상 영화인 공로상(2020. 11.) 등을 수상했다.


 

* 《쿨투라》 2023년 12월호(통권 11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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