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역사 속 이순신에게 배운다: - 〈노량: 죽음의 바다〉 그 비장함이 말해주는 것
[이순신] 역사 속 이순신에게 배운다: - 〈노량: 죽음의 바다〉 그 비장함이 말해주는 것
  • 도종환(시인, 국회의원)
  • 승인 2024.01.02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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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민 감독의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를 보았습니다. 이순신 3부작 〈명량〉, 〈한산〉에 이은 마지막 작품입니다. 〈명량〉에서는 두려움에 맞서 싸우는 용맹한 장수의 모습을, 〈한산〉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차분하게 절제된 지장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노량〉에서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절박한 장수의 비장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노량 해전은 조선과 중국과 일본 삼국이 모두 모여 벌인 전투입니다. 순천왜성에서 탈출하여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고니시 부대는 1만 5천 병력에 300척의 배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고니시 부대의 퇴각을 돕기 위해 사천왜성에서 온 시마즈 부대의 연합 함대는 전함 500척에 병력 2만이었습니다. 시마즈 부대는 칠천량 전투에서 원균이 지휘하던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부대로 일본 내에서 용맹하기로 이름난 군대였습니다.

1598년 11월 19일 새벽 2시 시마즈 요시히로와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고니시의 사위) 등이 이끄는 500척의 함대가 노량해협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판옥선 80척에 협선을 합쳐 200여 척이었고 병력은 1만이었으며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은 300여 척의 함대에 병력은 1만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서쪽의 고니시보다 동쪽에서 오는 시마즈 함대와 먼저 야간전투를 벌입니다.

고니시는 탈출해서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적이었고 진린은 남의 나라 전쟁터에 와서 자국 군사들이 너무 많이 희생되는 걸 원치 않는 처지였지만 이순신 장군은 달랐습니다.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니, 하늘에 바라옵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이렇게 하늘에 빌고 시작한 싸움이었습니다. 영화는 이 절박함을 담아내기 위해 애를 썼고 이순신을 연기한 김윤석의 표정은 시작부터 끝까지 비장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전체의 선봉장으로 부산성전투, 동래성전투, 탄금대전투, 한양 점령, 평양 점령을 통해 조선 전체를 유린한 장수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들을 살려 보낼 수 없었습니다. 새벽 2시 어둠 속에서 시작한 전투는 난전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잘 선택하지 않는 방식의 해전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죽기를 각오하고 선택한 해전이었습니다. 명나라 부총병 등자룡(허진호 분)과 수군들이 일본 수군에게 죽음을 당했고, 진린도 포위 당해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이순신 장군에 의해 구출됩니다. 1,000여 척에 가까운 세 나라 함대가 좁은 노량 바다에서 뒤엉킨 채 백병전을 벌였습니다. 전 세계 해전사에 보기 드문 대규모 전투였습니다.

이 상황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일본의 전함들이 남해 쪽으로 빠져나간다고 생각하여 뱃길을 튼 것이 관음포였습니다. 나가는 길인 줄 알았는데 막힌 길이었습니다. 일본 함선들이 관음포에 갇힌 것을 보고 이순신 장군은 하늘이 내린 기회로 생각하여 전 함대를 이끌고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그 사이에 동이 트고 날이 밝아옵니다. 이순신 장군이 전투 중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장면을 김한민 감독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7년 전쟁의 암흑 같은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날이 밝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왜병의 총탄에 맞고 쓰러졌습니다.

『선조실록』에는 “이순신이 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고 배 위에 쓰러졌다. 손문옥이 아들 이회가 울지 못하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린 뒤 북을 울리면서 나가 싸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절박함과 비장함과 죽음의 비통함을 영화가 어떻게 필름에 담아낼까 저는 그게 궁금했습니다. 김한민 감독은 북소리를 선택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치던 독전의 북소리. 장군이 쓰러진 뒤에도 계속되던 북소리에 가슴이 아파왔습니다. 적이 남아 있는 한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소리. 끝내서는 안 된다는 소리. 한 명의 적도 살려서 돌려보내지 말라는 소리. 그 소리의 여운은 컸습니다.

시마즈 함대는 500척 중에 50척이 살아서 돌아갔습니다. 200여 척이 침몰 되었고, 100척이 나포되었으며, 150척이 반파되었고, 일본 수군 1만 명이 죽었습니다. 임진왜란 7년 전쟁 중 가장 큰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노량대첩이라 하지 않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였기 때문입니다. 대장선이 부서지지 않고 그대로 있는데 통제사가 전사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 수군들은 판옥선 갑판 위에 엎드려 울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자기 생의 마지막 시간을 다 던져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입니다. 자기가 죽어야 이 전쟁이 끝난다고 믿었을 겁니다. 전쟁 중에 있는 장수를 끌어다 고문하고 계급장을 떼어내고 백의로 다시 종군하게 하는 임금과, 단 한 명의 병력도 지원해 준 적 없고, 단 한 척의 배도 만들어 준 적이 없으며, 단 한 번도 군량미를 보내거나 전쟁과 관련한 어떤 정보도 준 적 없는 조정을 원망하지 않고 이순신 장군은 최후까지 싸웠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의 끝에 생을 닫았습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수많은 백성이 영구를 붙들고 울어 길이 막히고 행렬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했습니다. 이덕형도 장계를 올리며 “아무 것도 모르는 늙은이나 어린이들까지도 많이 나와 울었다”고 했습니다.

훗날 살아 돌아간 시마즈 가문의 사쓰마번이 조슈번과 함께 메이지 유신을 이끌면서 다시 이토 히로부미나 데라우치 같은 정한론자들을 길러냈고 그들은 조선 말기에 침략의 선봉이 됩니다. 그들에 의해 식민지가 되는 치욕을 겪어야 했고, 아베총리로 이어진 그들은 현재 일본 정치의 극우세력이 되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한 명도 살려 보내지 말라고 하며 목숨을 걸었던 이유가 거기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를 보는 152분 내내 우리를 비장하게 하는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를 여러분께 추천합니다.

 

 


도종환 1984년 《분단시대》로 등단. 시집으로 『접시꽃 당신』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해인으로 가는 길』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흔들리며 피는 꽃』 『사월 바다』 등이 있음. 신동엽창작상, 정지용문학상, 윤동주상, 백석문학상, 공초문학상, 신석정문학상, 박용철문학상 등 수상.

 

 

* 《쿨투라》 2024년 1월호(통권 11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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