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이순신과 그의 시대
[이순신] 이순신과 그의 시대
  • 강유정(영화평론가, 강남대 교수)
  • 승인 2024.01.02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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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점점 평면적 성웅에서 입체적 인간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누군가 이념으로 강제했던, 동상의 차가운 질감이 아니라 작가적 상상력으로 해체하고 다시 쌓아 올린 재해석의 산물 그 결과물을 보자면 결국 이순신은 어둡고 괴로웠던 한 시대를 온 몸으로 살아 내야 했던 가장 치열했던 동시대인이었다. 이순신은 그런 점에서 다양한 서사적 접근을 통해 새롭게 부활해, 끝없이 재창조될 생명력을 가진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1. 역사 소재의 편중과 왕조 중심의 역사 서사

돌이켜보면, 한국의 지난한 역사 가운데서 모든 국민이 거리낌 없이 추앙할 수 있는 인물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수많은 역사물이 현대사나 근대사를 뛰어넘어 조선시대로 향하는 것도 비단 500년의 역사가 실록의 형태로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는, 보존의 완결성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조선 시대 역사물도 기울어진 재현이 많다. 왕조 중심 기록이다 보니 필부필부들의 평범한 삶이나 장삼이사 민초들의 삶은 찾기 어렵다. 그나마 최근 들어 활발해진 이야기들조차 상상에 기댔다.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는 연산군이 한 광대를 가리켜 “너(이:爾)”라고 다정히 불렀다는 독특한 기록이 시작이었으며 마찬가지로 천만 관객을 동원했던 〈광해〉 역시 광해군 시절 사라진 『승정원일기』 일부가 모티프였다.

대개, 기록을 기반으로 재현된 한국의 역사물들은 왕조 스캔들을 다룬 애정사나 인물사가 주를 이루었다. 여기엔 이광수나 김동인 같은 문인들의 탓도 크다. 이광수는 1928년 『단종애사』를 동아일보에 연재해 인기를 끌었다. 김동인은 1933년 흥선대원군을 다룬 『운현궁의 봄』, 1941년에는 수양대군을 주인공으로 『대수양』을 썼다. 단종, 세조, 사도세자와 같은 인물들에 대한 편애는 드라마, 영화에서도 반복되었다. 따지자면 왕실 스캔들이 대중적 역사 서사의 주류였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장수 이순신의 부상은 이질적이었다. 사실상 박정희 군사 정권의 등장과 함께 나라와 영토, 신민을 지킨 철두철미한 군인 정신의 화신 성웅 이순신은 필요에 의해 재발굴되었다. 1968년 광화문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지고, 1970년 고안된 100원 주화의 인물로 이순신이 선택된 맥락도 여기에 있다. 100원 동전은 시민들이 가장 많이 접하고 사용하는 군인, 장수의 이미지를 완화할 뿐만 아니라 친밀도를 높이는 데 주효했다. 빈도가 낮았던 지폐와 달리 만만하게 자주, 사용되던 동전 중 유일하게 사람의 얼굴이 새겨진 것도 바로 100원 이순신이다.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왕조를 벗어난 역사 서사 특히 영화나 드라마로 재현되던 역사물이 「춘향전」을 비롯한 구전 문학에 한정되어 있던 시절 이순신의 부상은 새로운 소재의 발굴이기도 했다. 1961년 대한 민국 영화계 최고의 화제가 바로 신상옥, 최은희의 〈성춘향〉과 홍성기, 김지미의 〈춘향전〉의 대결이었을 정도이니 당대 대중적 친밀도가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간다.

최초로 이순신을 영화화한 작품은 〈오발탄〉으로 잘 알려진 유현목 감독의 1962년작 〈성웅 이순신〉이다. 이 작품은 이은상의 『난중일기』 주해를 원작으로 삼고 있는데, 이순신 역의 김승길 배우는 44세임에도 불구하고, 신인 오디션을 통해 발탁되었다. 이후 1971년 배우 김진규가 이순신 맡아 〈성웅 이순신〉이 개봉했고, 김진규가 한 번 더 이순신을 맡아 1978년 〈난중일기〉가 개봉했지만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1960년대, 70년대 등장했던 이순신 소재의 영화들을 보자면 『난중일기』를 소재로 세 번의 해전을 거칠게 요약한 작품들이 대개였다. 일본에 대한 미해결의 감정과 불분명한 외교 관계, 회복되지 않은 심리적 거리에 대한 일종의 정서적 판타지로 재현된 해전은 미완의 스펙터클로 아쉬움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이순신이 영웅적 면모가 강조되다 보니 계몽적 교화와 이데올로기적 순치의 측면으로만 그려져 인간적 이해나 입체성이 없어 캐릭터로서의 매력이 떨어진 것도 아쉬움을 보탰다. 역사적 인물이라 해도 그 인물이 납작한 활자로만 다가온다면 결코 공감과 몰입의 대상이 되긴 어렵기 때문이다. 이렇듯 평면적이며 단순한 영웅으로, 진부한 캐릭터로 대중에게 점점 잊혀진 이후 3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서야 이순신은 새로운 재해석을 통해 다시 재현되기 시작한다.

김진규 <성웅 이순신> 스틸컷. 연방영화주식회사

2. 인간 이순신의 매력

진부한 영웅 캐릭터로 여겨졌던 이순신은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를 통해 주화 속 납작한 인물이 아닌 피와 뼈 그리고 살을 갖췄던, 인간 이순신으로 다시 다가왔다. 『칼의 노래』라는 제목 자체가 『난중일기』에 대한 김훈의 작가적 해석인데, 칼과 노래라는 일종의 반어법이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김훈의 해석을 잘 보여준다. 지금도 명문장으로 손꼽히는 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라는 소설의 첫 구절은 이순신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는 미학을 압축하는 하나의 세계관이다. 이념과 피의 세계를 미학의 공간으로 망명케 한 언어적 도약이 김훈을 통해 가능해진 것이다.

『칼의 노래』 속의 이순신은 군인이기 이전에 남자, 아버지, 정치인으로 욕망과 두려움, 연민, 미움에 치를 떠는 인간으로 그려진다. 실제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이순신은 자신의 감정에 매우 솔직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지금껏 많은 번역자 혹은 해석자들이 그의 영웅적 면모를 강조하느라 인간성의 구체적 이면들을 제거해왔다면 김훈은 이런 면을 전경화해냈고 이러한 전략이 성공을 거둔 셈이다.

한국 영화 사상 가장 많은 관객이 선택했던 영화 〈명량〉의 접근법도 김훈의 것과 다르지 않다. 김한민 감독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영웅 이순신이 아니라 백의종군의 이면에 감춰진 감정적 격동과 전투의 스펙터클을 울돌목의 소용돌이 치는 감정의 파고와 겹쳐 표현했다. 해전의 볼거리만큼이나 전투의 감정적 격동이 대중적 몰입의 지점들을 제공한 것이다.

<명량> 사진제공_(주)빅스톤픽쳐스.

세 번의 해전에 대한 김한민의 영화화는 이순신에 대한 김한민 감독의 세 가지 독법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울돌목과 감정의 격랑이 〈명량〉이었다면 고요하고도 차가운 의의 독법이 영화 〈한산〉의 세계였다. 그리고 3부작의 마지막인 〈노량〉은 이순신의 유록인 『난중일기』에 대한 주석을 넘어선 인간 이순신에 감독 김한민식 해석의 집약체이다. 김한민은 노량을 죽음을 향해 달려간 파토스의 향연으로 그려낸다. 죽음이 결과가 아니라 목적이 되었던 마지막 해전 〈노량〉의 파토스, 그 정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이순신은 점점 평면적 성웅에서 입체적 인간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누군가 이념으로 강제했던, 동상의 차가운 질감이 아니라 작가적 상상력으로 해체하고 다시 쌓아 올린 재해석의 산물 그 결과물을 보자면 결국 이순신은 어둡고 괴로웠던 한 시대를 온 몸으로 살아 내야 했던 가장 치열했던 동시대인이었다. 이순신은 그런 점에서 다양한 서사적 접근을 통해 새롭게 부활해, 끝없이 재창조될 생명력을 가진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김한민 감독의 3부작은 그런 의미에서 완결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시작이다. 어둡고 괴로운 시대를 온 몸으로 살아 낸 한 사람, 그 고뇌와 선택은 그런 어려움을 겪을 누군가에게 거듭 다시 읽히고 해석되어질 것이 분명하다.

 

 


강유정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2005년 《조선일보》 《경향신문》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으로 등단, 저서로는 『영화 글쓰기 강의』 『타인을 앓다』 등이 있다. 현재 강남대학교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 《쿨투라》 2024년 1월호(통권 11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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