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영광이자 부담”… 영화·드라마에서 이순신으로 활약한 ‘배우 열전’
[이순신] “영광이자 부담”… 영화·드라마에서 이순신으로 활약한 ‘배우 열전’
  • 이은주(서울신문 기자)
  • 승인 2024.01.02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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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로서 조선 최고의 성웅 이순신을 연기한다는 것은 영광이자 부담이다. 한국인은 물론 세계인이 존경하는 영웅을 연기한다는 것은 벅차고 의미있는 도전이지만, 제대로 표현해야 한다는 무게감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동안 수많은 배우들이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에서 기꺼이 ‘무게’를 감당하며 이순신을 연기했다.

한국 영화사에서 이순신을 가장 처음 스크린에 옮긴 작품은 1960년대를 대표하는 유현목 감독의 〈성웅 이순신〉(1962)이다. 시조시인이자 이순신 연구자로도 유명했던 이은상이 시나리오를 썼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해전 특수 촬영이 시도됐다. 특히 천재 조각가 권진규가 특수 미술을 맡아 해전을 완벽하게 구현시킨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이순신 역에는 당시 44세였던 배우 김승길이 전격 발탁됐다. 기성 배우보다 참신한 이미지가 더 어울린다는 기획하에 주역 선발 콘테스트를 열었고 500명 가운데 김승길이 선발됐다. 그는 이전에 연극에 단 한편 출연한 이력이 전부인 신인이었지만 이순신 장군의 기백과 충혼뿐만 아니라 백의종군하는 과정에서 인간적인 면모까지 선보이며 스크린에 이순신을 재현했다.

1971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 〈성웅 이순신〉에서는 배우 김진규가 이순신 역을 맡았다. 충무공의 일대기에 남다른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이 작품의 제작을 맡아 자신이 20년간 모은 재산을 쏟아부었다. 아쉽게도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7년 뒤 〈난중일기〉(1978)에서 또다시 이순신 역할에 도전했고 제16회 대종상에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배우 김진규가 1970년대 이순신을 대표했다면, 1980년대에는 고 김무생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는 MBC 대하 사극 〈조선왕조 오백년〉의 제5부 ‘임진왜란’ 편(1985-1986)에서 왜적에 맞서 바다를 지킨 이순신 장군 역할을 맡아 ‘칼을 찬 선비’를 연상케 하는 근엄하고 대쪽같은 면모를 연기했다. 성우 출신이었던 그는 깔끔한 딕션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침엽수 같은 이순신을 완성했다.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2004-2005)은 2000년대 본격적으로 이순신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작품이었다. 타이틀롤을 맡은 배우 김명민은 ‘가장 이순신 같다’는 수식어를 얻을 정도로 이순신의 ‘원형’을 창조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청년에서 임관까지, 6진 조산보만호 근무 시절부터 전라좌수사를 맡아 임진왜란까지, 그리고 백의종군 이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세 가지 시기로 나눠 각기 다른 발성과 움직임을 연구해 이순신의 초년, 중년, 말년을 충실하게 연기했다.

김명민은 104부작에 걸친 장편 드라마에서 지장과 덕장, 명장의 매력을 두루 지닌 ‘진짜 장수’로서 이순신의 신념과 인간적 고뇌를 세밀하게 표현했다. 오랜 무명 생활을 거친 김명민은 이 작품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2005년 KBS 연기 대상을 수상했다. 당시 이순신의 아역으로는 배우 유승호가 출연했다.

배우 박중훈도 2005년 코믹 액션 영화 〈천군〉에서 임관 이전의 이순신을 연기한 적이 있다. 〈천군〉은 이순신이 무과에 낙방해 한때 우울한 젊은날을 보냈다는 사실에 착안한 SF 사극이다. 남한과 북한 군인들이 과거로 돌아가 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운다는 줄거리로 박중훈은 이순신이 방황하던 청년에서 영웅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연기했다. 역사적 영웅을 희화화했다는 일각의 비판도 있었지만 박중훈의 코믹하면서도 능청스러운 연기가 기발한 캐릭터를 잘 살렸다는 평가가 중론이었다.

배우 유동근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사극 드라마 MBC 〈구가의 서〉에도 이순신 역을 맡아 안정적인 연기를 펼쳤다. 극중 유동근은 주인공 최강치(이승기 분)에게 인간적인 가르침을 주는 평생의 멘토이자 지혜와 명쾌한 통찰력을 지닌 전라도 좌수영 이순신 역으로 등장한다. 분량이 많지는 않았지만 힘있는 목소리와 특유의 무게감 있는 연기로 위풍당당한 이순신을 그려 언젠가 ‘유동근표 이순신’을 보고 싶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뭐니 뭐니 해도 대중문화계에서 이순신을 대표하는 배우는 영화 〈명량〉(2014)의 최민식이다. 총 1,791만명을 동원해 여전히 역대 한국영화 흥행 1위라는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는 〈명량〉에서 최민식은 용장勇將으로서의 이순신을 열정적으로 표현했다.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도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의 각오로 12척의 배로 330척의 왜군을 물리친 이순신의 리더십은 시대를 초월해 사회적으로 이순신 신드롬을 일으켰다.

〈명량〉의 이순신은 거북선이 불타고 전의를 상실한 병사와 두려움에 가득 찬 백성 등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용맹한 리더십을 발휘해 고도의 심리전과 독창적인 전술로 승리를 이끌어낸다. 최민식은 연륜이 녹아 있는 연기로 역대 가장 역동적이며 카리스마 넘치는 원조 히어로 이순신을 표현해냈고 관객들에게도 카타르시스를 안겼다. 왕을 모시는 신하이자 한 사람의 아버지, 군사를 이끄는 장수로서 먼저 목숨을 걸어야 했던 이순신의 외로움과 두려움 등 인간적인 면모도 동시에 그렸다.

그런가 하면 배우 김석훈은 KBS 드라마 〈징비록〉(2015)에서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넘치는 이순신을 연기했다. 김석훈은 이순신 역 캐스팅 당시 ‘의외의 카드’라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지만 강인함과 온화함이 잘 조화된 연기를 펼쳤다.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류성룡이 집필한 『징비록』 및 사료에 나온 이순신은 ‘성격이 위엄있으되 성냄이 없고, 조용하지만 카리스마 있고 무게감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극 중반부에 투입된 김석훈은 앞서 김명민, 최민식과는 달리 신중한 리더로서의 이순신을 부각시키는데 중점을 뒀다.

KBS 〈임진왜란 1592〉(2016)에서 가장 인간적인 덕장德將 이순신을 연기한 최수종은 ‘인생 연기’를 펼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작품에서 이순신 장군은 두려움 없는 타고난 영웅이 아니라 매 순간 끊임없이 고뇌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최수종은 지금까지 선보인 다른 시대의 왕이나 장군과 다르게 표현하기 위해 따뜻하고 편안하게 대화하면서도 한이 서린 연기를 소화했다.

이 작품은 일종의 다큐멘터리처럼 역사적 고증을 통해 최대한 사실 그대로 표현하는 팩츄얼 드라마를 표방했는데 최수종은 위인이나 영웅 이전에 ‘가장家長’의 모습에 초점을 맞췄다. 때문에 이순신이 전투 결과를 장담할 수 없어 힘들어하거나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가족들에게 내색하지 않고 혼자 짐을 짊어지고 가는 등 한 인간으로서의 고독한 모습이 비춰진다. 최수종표 이순신은 엄격한 지휘관이 아니라 부하들을 따뜻하게 보듬는 아버지이자 형님같은 따뜻한 리더십을 갖춘 인물로 표현됐다.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 중 두 번째인 〈한산: 용의 출현〉(2022)에서 박해일이 맡은 이순신은 냉정한 시선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지혜롭게 전략을 펼치는 지장智將으로 나온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상대로 압도적 승리를 거둔 한산도대첩을 다룬 이 작품에서 박해일은 출정을 앞두고 고뇌하는 이순신의 심경을 깊은 눈빛과 진중한 표정으로 표현해냈다.

〈한산〉의 이순신은 대사가 거의 없는 절제된 인물로 그려지는데, 박해일은 특유의 묵직함으로 자신만의 이순신을 차분하게 완성했다. 박해일은 당시 인터뷰에서 “주도면밀하게 전략을 짜서 압도적인 승리의 쾌감을 선사하는 지혜로운 장수로서의 이순신 면모에 집중했다”면서 “신파나 감정의 과잉을 덜어 내고 인물이 버텨 내는 이야기에 집중했다”고 밝혔다.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의 대미를 완성하는 〈노량: 죽음의 바다〉(2023)에서는 배우 김윤석이 이순신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김 감독은 “김윤석은 현장賢將 이순신 장군의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아우라를 가진 아주 희귀한 배우”라고 평가했다. 이 같은 기대에 부응하든 김윤석은 이순신 장군의 최후를 묵직하게 표현했다.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을 종결하고 다시는 이 땅에 왜군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비장한 책임감이 연기를 통해 드러난다.

김윤석은 말수가 적고 겉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이순신의 우직한 모습을 설득력있게 그렸다. 적을 섬멸하기 위해 북을 치며 부하를 독려하는 장면은 스크린 너머 관객들의 마음에 가슴 뭉클한 울림을 준다. 이어진 이순신 장군의 장렬한 최후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안위 보다 아군의 승리를 먼저 생각했던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절제된 감정으로 표현해 더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다 내려놓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촬영에 임했다”는 김윤석은 백의종군해 나라를 위해 싸웠던 이순신 장군의 진정성 있고 충심 어린 모습과 어느새 닮아있었다.

 

 


 서울신문 기자 겸 유튜브 크리에이터. 연세대학교 불문과·동대학원 영상학 석사. 한국 방송대상 심사위원 역임. 유튜브 채널 〈은기자의 왜 떴을까TV〉 진행. 저서 『왜 떴을까: ‘K-크리에이티브’ 끌리는 것들의 비밀』.

 

* 《쿨투라》 2024년 1월호(통권 11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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