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방민호 시인의 「광화문 앞 이순신」
[신작시] 방민호 시인의 「광화문 앞 이순신」
  • 방민호(시인)
  • 승인 2024.01.0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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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앞 이순신

방민호

당신은
53년 7개월 18일만을
이 세상에 머물러 있었다
노량 앞바다에서 적의 흉탄에 쓰러질 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계속해서 북을 치라 했다

여기 광화문 앞에 선 당신의 동상은
고난이 죽어서도 끝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죽어서 당신은 중국식 갑옷에
일본도를 오른손으로 붙잡고 우뚝 서 있다

당신을 여기 모신 사람은
한때 당신의 적에게 충성을 맹세한
군복을 벗은 장군이다
그래도 나는 광화문 앞에 설 때마다
당신의 영혼이 이 나라를 굳게 지키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백성을 지키려는 당신의 마음은
나랏님보다도 넓고 깊고
악을 물리치려는 당신의 힘은
부동명왕만큼이나 세다
당신의 동상을 휘감고 있는 빛은
동상을 세운 이들에 얽힌
얼룩진 소문들을 밝게 씻어낸다

이 광화문 앞에 서서
당신의 동상을 올려다볼 때마다
내 병든 몸을 도는 피가 맑게 돌아온다
당신의 굳센 모습 아래서 우리들은 모두 하나가 된다
죄 지은 사람도 과거를 가진 사람도
변명을 잊고 고개를 숙인다
화가 난 사람도 슬픈 사람도
싸움을 멈추고 눈물을 씻는다

이 환한 날
올려다 본 당신의 엄숙한 얼굴은
희미한 미소를 내게 들켜 버렸다

 

 


방민호 1965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94년 《창작과 비평》 제 1회 신인 평론상을 수상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문학 평론집으로 『문학사의 비평적 탐구』 『감각과 언어의 크레바스』 『행인의 독법』 『문명의 감각』 『납함 아래의 침묵』 『비평의 도그마를 넘어』가 있다. 2001년 《현대시》로 시창작 활동을 시작했고 시집으로 『숨은 벽』 『내 고통은 바닷속 한방울의 공기도 되지 못했네』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가 있다. 2012년 《문학의 오늘》에 「짜장면이 맞다」를 발표하면서 소설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로 『대전스토리, 겨울』 『연인 심청』이 있으며 창작집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답함』이 있다. 산문집으로 『서울문학기행』 『명주』가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쿨투라》 2024년 1월호(통권 11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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