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Theme] 상하이上海 : 오락과 전쟁, 우익과 좌익, 중국과 서양, 전통과 근대가 뒤범벅된 도시
[6월 Theme] 상하이上海 : 오락과 전쟁, 우익과 좌익, 중국과 서양, 전통과 근대가 뒤범벅된 도시
  • 임대근(한국외대 교수)
  • 승인 2019.06.05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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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대물박地代物博. 넓은 땅, 풍성한 물산. 이처럼 중국을 잘 묘사하는 말이 또 있을까. 그만큼 중국은 복잡하다. 복잡하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으랴만, 중국은 유독 그렇다. 수천 년의 역사, 14억이 넘는 인구, 56개에 이르는 종족, 산과 물을 건너면 섞이기 힘든 언어…. 이 모든 복잡성을 동시에 가진 나라를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중국을 마음에 품은 이들은 그 가운데 어떤 한 곳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가까운 이웃 나라이니 훌쩍 떠날 수 있는 여행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우리 땅과 전혀 다른 오지만을 찾기도 하고 누군가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고도古都의 소리에만 귀 기울이기도 한다.

 중국에 첫발을 들여놓은 건 20년쯤 전이다. 군복무를 마치고 나니 버킷리스트가 쏟아졌다. 마침 친구 하나가 살고 있던 상하이를 택한 건 그저 그런 우연일 뿐이었다. 상하이는 다른 세상을 보여준 첫 도시였고, 중국을 알게 해 준 첫 사귐이었다. 꼭 그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 뒤로 상하이는 쉴 새 없이 드나드는 ‘동네’가 됐다. 상하이는 가까우면서도 이국적인 풍취를 적나라하게 맛볼 수 있는 도시다.

 상하이는 1842년 아편전쟁의 결과로 생겨난 도시다. 오랜 중국 역사에서 상하이가 주목받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말 그대로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도시지만, 중원을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상하이 앞바다를 통해 다른 세상과 만날 일이 없었다. 한적한 어부들의 마을이었던 곳은 1842년 아편전쟁이 끝난 뒤, 영국의 요구로 개항하면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백 년도 안 되어 동아시아 최대 메트로폴리스로 자라났다. 1850년대만 해도 50만 명 남짓하던 인구는 1937년에 385만 명으로 급증했다.

 영국은 아예 상하이를 통째로 갖고 싶어 했다. 황해에서 황푸강黃浦江을 거스르는 물길은 제국이 진입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뿐 아니라 상하이는 대륙의 허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상하이를 통하면 대륙을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전쟁에 졌지만,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있던 청 왕조는 그것만은 안 된다 막아섰다. 영국은 하는 수없이 홍콩을 통째로 가져가고 상하이 일부를 빌리는데 만족했다. 미국과 프랑스가 차례로 들어와 조계租界를 만들었다. 조계는 점차 넓어졌고, 상하이는 중국인과 서양인이 함께 사는 ‘화양잡거華洋雜居’의 도시가 됐다. 그렇게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도시는 중국의 옛 모습과는 전혀 다른 자기만의 아우라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지금도 화려한 야경을 자랑하는 와이탄外灘은 서양 나라들이 서로 경쟁하듯 자신의 스타일로 쌓아올린 건물 전시장이다. 신흥 도시의 산업을 위해 금융업을 장악하려 했던 그들은 높은 빌딩에 은행들을 불러들였다. 상하이 남북을 세로로 지르는 황푸강을 마주보며 서 있는 즐비한 빌딩들은 여전히 눈부시지만, 제국의 아시아 침략이라는 아픈 역사를 함께 간직하고 있다.

 영화는 상하이를 대표하는 오락이자 문화였다. 베이징에서 시작한 중국영화는 1910년대부터 상하이로 건너와 활기를 띠었다. 중국영화 1세대와 2세대 감독들은 1949년 상하이가 사회주의 중국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수많은 영화를 찍어냈다. 영국과 미국의 조계였던 인민광장 주변에는 으리으리한 수백 석 영화관이 지금도 남아 있다. 할리우드 영화가 연신 들어왔고, 상류층 중국인과 서양인이 뒤섞여 영화를 즐겼다.

 문학과 예술, 학문을 꿈꾸던 젊은이들은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상하이는 어느 누구의 도시도 아닌, 모두에게 새로운 기회를 준 땅이었다. ‘이민’의 도시는 여기저기서 서로 다른 색깔들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온통 뒤섞인 정체성을 만들어냈다. 가난한 젊은이들은 시내와 가까우면서도 싼 월세를 낼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도시가 만들어지면서 영국식 주택이 중국적으로 모습을 바꿔 즐비하게 들어섰다. ‘스쿠먼石庫門’이라는 이름의 상하이 근대 주택 양식은 위로 3층 남짓한 높이에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자연광이 들어올 수 있게 하늘을 뚫어놓은 마당이 있는 집이었다. 층을 돌아 올라가는 계단 옆에 생긴 삼각형 모양 자투리 공간은 돈 없는 청년 지식인들에게는 둘도 없는 천국이었다. 문인들은 거기서 글을 썼고, 화가들은 그림을 그렸고, 감독들은 영화를 찍었다. ‘신텐디新天地’라고 불리는 지금 번화가는 원래 스쿠먼이 빼곡히 들어선 곳이었다. 상하이시는 10여 년 전 스쿠먼을 모두 철거하고 거기에 유럽풍 거리를 만들었다. 그래도 스쿠먼 하나는 박물관으로 남겨 두었다.

 신텐디 입구에는 중국 공산당이 창립대회를 열었던 이른바 ‘일대회지一大會址’가 있다. 1921년 7월 프랑스 조계였던 이곳에서 ‘밀회’를 갖던 공산주의자들은 프랑스 경찰의 급습에 놀라 항저우로 피신하여 서호西湖에 떠있는 배 안에서 창립대회를 마무리한다. 상하이는 정치적으로도 주목받는 도시가 됐다. 일본은 1932년 1월 28일 상하이 일대를 침공하면서 뒷날 다가올 전면전을 예고했다. 1930년대 상하이는 오락과 전쟁, 우익과 좌익, 중국과 서양, 전통과 근대가 뒤범벅이었던 도시였다.

 항일 운동을 위한 우리 선조의 근거지도 상하이였다. 어쩌면 그 역동성이 선조의 독립운동에 기운을 더 불어넣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일대회지’에서 조금만 더 가다보면 마당로馬當路라는 곳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남아 있다. 상하이는 그렇게 우리에게 역사이자 현재로 다가오는 도시다. 거기에는 근대의 역사가 있고, 사회주의가 있고, 우리의 독립운동이 있고, 중국의 발전된 경제가 있다. 이만큼 화려하고 복잡한 도시가 또 있을까. 지금도 내가 상하이의 매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까닭이다.

 꼭 덧붙이고 싶은 사족 하나. 대도시 상하이의 규모를 얼렁뚱땅 서울 정도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상하이의 전체 면적은 6340.5㎢로 서울의 열 배가 넘는다. 우리가 주로 다녀오는 상하이는 시내 중심부에 오밀조밀 몰려 있는 네댓 개 구에 불과한데, 그 넓이가 서울쯤 된다. 그러니 상하이의 역사와 정치, 문화와 경제를 모두 둘러보려면 이만저만한 일이

상하이 모습
상하이 모습

 

아닌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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