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우리 시대의 소중함을 되찾아오기 위하여
[북리뷰] 우리 시대의 소중함을 되찾아오기 위하여
  • 박재희 인턴 기자
  • 승인 2024.01.30 16: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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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도 산문집 『육필로 나눈 문단 교우록: 진솔한 편지글 특이한 글씨』

문단의 큰 어르신들부터 가까운 선후배들까지, 당대를 대표하는 문학인들과 예술인들까지 최고 지성들과의 사적 교우의 산물로 나눴던 편지글들이 한 권의 책, 육필로 나눈 문단 교우록: 진솔한 편지글 특이한 글씨(이하 육필로 나눈 문단 교우록, 스타북스)로 발행됐다. 지난 20223, 60여 년간 문학 활동을 펼쳐 온 박이도 시인은 48인의 문객들과 나눈 육필 서명본을 엮어 문단 교우록 내가 받은 특별한 선물을 출간한 바 있으나, 인기에 힘입어 절판되었다. 이후 내가 받은 특별한 선물을 보완하여 1부 시담 33, 2부 편지 30, 3부 엽서·메모 34, 4부 자필 서명 77명으로, 최고 지성인 97명의 육필과 77명의 자필 서명이 담긴 글을 엮어낸 증보개정판 육필로 나눈 문단 교우록을 출간하였다. 저자가 오랜 세월 문객들과 나눈 진솔한 편지글과 특이한 글씨, 육필 서명과 함께 주고받은 글을 모아 엮어낸 국내 최초의 이채로운 형식으로 출간된 책이다.

박이도 시인은 머리말에서 오랜 세월 문단의 문객들과 나눈 육필 서명본을 비롯해 편지글과 엽서 글을 모아놓은 서첩書帖이다. 신문학이 싹트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단의 기라성들로부터 시화詩畫와 육필肉筆을 귀감歸勘 삼아 나의 정면교사正面敎師로 삼고자 하여 책으로 엮었다. 이분들의 시문時文에 담긴 저마다의 문학적 발상과 시 정신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다. 이미 고인이 된 어르신들의 예술과 인격을 기리고 명심불망銘心不忘하고자 한다. 특히 친필 육필로 받은 이분들의 함자와 필체를 한 자리에 모아 나 자신에게 귀감이 되는 서첩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박이도 시인이 평생 받아 소장하고 있는 있는 육필 서명본 중에서 그 필자들과 맺었던 특별한인연을 공개한 산문집 육필로 나눈 문단 교우록에는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 작가, 화가, 평론가들의 친필 서명이 모두 공개될 뿐만 아니라 그 서명본을 보내준 이들과의 인문학적 교유의 일화들이 곁들여져 있다. 이는 예술계 인사들과 폭넓은 교유를 해온 저자만이 집필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책에 수록된 문단 저명인사들의 이름만 들어도 놀라울 정도다. 우리 시대의 소중하고 귀한 인문학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친필 서명과 함께 엽서와 편지글들은 누구라도 한 번쯤은 보고 싶어 하는 자료들임에 틀림없다.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에서는 김광균, 서정주, 조병화, 박희진, 이탄, 오규원, 마광수, 박목월, 김영태, 박성룡, 김광협, 박화목, 김종길, 이승훈, 조태일, 김현승 등은 한국 현대 시문학사를 대표하는 시인들이 등장한다. 또 이경남, 강인섭, 문익환 같은 시인이면서 언론인 목회자, 전영택, 황순원, 이청준, 김승옥, 현길언 같은 당대 최고의 작가들, 한 시대 방송가의 전설이 되다시피 한 신봉승, 주태익 선생, 화가 송수남, 서예가 박종구, 수녀 이해인, 나태주 시인 등과의 교유를 보여준다. 증정본 필자 중 두 분 외에는 모두 작고한 분들이어서 이러한 자료들이 더욱 진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은 자명하다.

저자는 1959년 자유신문,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신문에 작품이 실리자 소포 하나가 배달되었는데 보낸 이가 김광균金光均이었다. 소포 속에는 김광균 시인의 저서 시집 와사등詩集瓦斯燈과 함께 만년필로 쓴 편지에 격려의 글이 들어 있었다. 저자는 이 일화를 책의 가장 첫 번째 시담으로 엮어냄으로써 지난 60여 년간 문학 활동을 펼쳐 온 원로시인임에도 여전히 그 순간을 잊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박이도 시인.

1부 시담은 문단인사들의 작품을 소개하며 그들 개개인과 있었던 일화들을 회상한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듯 생생하게 전달하는 저자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2부 편지는 박이도 시인과 문객들이 나누었던 소통을 독자들과도 나눈다. 육필로 수고로이 쓰인 편지와 엽서들은 저자와 문객들이 서로의 관계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를 증명한다. 3부 엽서·메모 역시도 짧지만 저자를 아끼는 문단인사들의 마음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육필로 나눈 문단 교우록은 일상을 나누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안녕을 빌었던 저자와 문단인사들의 따뜻한 관계를 독자들의 마음에 전하는 책인 것이다.

 

이런 친필 글씨를 받게 된 것은 나에게 황 선생님의 글씨를 대형 부채에 써달라고 간청해 온, 당시 동국대에 재직하고 있던 H교수 덕분이었다. 그 자리에서 원고지에 나도 글씨를 받게 된 것이다. 그날 선생님의 얼굴 표정은 아주 불편해 보였다. 나는 죄책감에 몸 둘바를 몰랐다. 남의 청탁을 받아 마지못해 취했던 내 처신을 뉘우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언젠가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선생님을 모시고 학교 앞의 다방에 들러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한 학생이 현장에 없는 어느 학우의 잘못을 얘기하는 것을 들으시고는, 정색을 하시고 “내 앞에서는 남을 흉보지 마라. 내 앞에선 남을 욕하지 말라”고 훈계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순간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나는 지금까지 그날의 말씀을 명심불망銘心不忘하고 있다. 그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해 왔다.

- 「“내 앞에선 남을 흉보지 마라”: 시로 등단해 소설가로 대성하신 은사 황순원」 중에서

 

손으로 직접 쓴 글씨를 의미하는 육필肉筆은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 수고를 들여 작성한 손편지와 함께 주고받던 정성은 조금은 불편할지언정 그 안에 담겨 있는 마음을 온전히 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편리함에 익숙해진 현시대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그것이 육필로부터 전해지는 마음인 것이다. 저자가 한국 문단의 기라성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듯 우리도 육필이 전하는 메시지를 마음으로 받아들여 편리함에 가려진 소중함을 되찾아올 필요가 있다. 소중한 것은 편리함으로 대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육필로 나눈 문단 교우록은 이러한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뜻깊은 책이다.

 

 


 

 

* 《쿨투라》 2024년 2월호(통권 11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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