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어둡게 가볍게: 《두산아트랩 전시 2024》와 현대미술 분위기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어둡게 가볍게: 《두산아트랩 전시 2024》와 현대미술 분위기
  • 강수미(미학. 미술비평.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 승인 2024.02.28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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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같은 템포

미술사나 미학으로 엄밀히 하자면 정교한 정의가 필요하지만, 2000년대 이후 국내 미술계에서 ‘동시대 미술’, ‘현대미술’, ‘컨템포러리 아트’는 동의어처럼 쓰인다. 용어가 혼재돼 불리는 만큼 미술계 현장부터 전문 학계에 이르기까지 현대미술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관점과 해석이 범람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동시대 미술에서 느끼는 소위 ‘감성’이란 기존 조형예술의 형식 미나 인문예술의 문기文氣와는 다르다는 데 대체로 의견이 모일 것이다. 현대미술 작품은 미적 오브제로서의 질서 잡힌 아름다움 혹은 조형성보다는 다원적 예술 행위로서의 매체 효과와 취향의 편집을 우선시한다. 그래서 현대미술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에 지금 여기 미술은 형식이 조악하면서 전체적으로는 과장되고, 내용이 복잡해 보이지만 미적 가치 면에서 공허한 대상처럼 비춰진다. 현대미술 작가 스스로도 작업과정에서 예술에 대한 뿌리 깊은 신념이나 창작 계보의 정통성보다는 모호하고 파편적인 표현과 불안정하고 일시적인 스탠스를 긍정한다. 때문에 작품이 그런 경향성을 띠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동시대 미술 또는 현대미술은 ‘지금 여기와 템포tempo를 같이 하는con- 미술art’이라는 의미의 ‘contemporary art’가 지시하듯이 세상만사/부스러기까지 작업의 동력, 그리고 질료로 취한다. 심지어 어떤 전문가는 현대미술을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는 줄기이자 뿌리 식물, 즉 부정근不定根을 뜻하는 ‘래디컨트radicant’에 빗대고 그 속성을 “미적 불안정성과 방랑하는 형태”1로 규정하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모더니즘의 순수예술 정신과 관념 미학의 경전으로 현대미술을 평가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뿐만 아니라 다들 체감하다시피 ‘좋았던 과거(물론 그런 기억은 환상에 가깝다)’에 비해 세계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우리 현실은 더욱 더 나쁘게 문제적이 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만큼 현재와 같은 박자로 뛰는 현대미술 또한 사회현실의 복잡성, 문제성, 부정성에서 자유롭지 않고 작가들 입장에서는 그것을 이상적 미학에 기대 어설피 승화하기도 힘겨운 일이다. 특히 동시대 젊은 미술가들의 작업에서 세상의 객관적 리얼리티와 개인의 경험적 내용이 밀착된/싸우는/물과 기름처럼 분리된 채 공존하는 양태를 보이는 이유가 거기 있다.

임정수, 〈미신이 아닌 것은 없다〉, 2024, 조개껍질, 철사, 와이어 메쉬, 시멘트, 점토, 인공돌, 털, 가죽 각 15×25×30 cm, 12점, 두산갤러리 전시 전경. 사진: 강수미

두산아트랩

나는 두산아트센터 두산갤러리에서 열린 《두산아트랩 전시 2024》(2024. 1. 17. - 2. 24.)를 보며 위와 같은 현대미술 조건과 경향성을 다시 한 번 파악했다. 여기서 ‘다시 한 번’이라는 말은 이미 내가 다른 지면에서 동시대 미술에 관해 같은 맥락의 분석을 했다는 뜻이다.2 또한 이 전시가 최근의 구체적 사례로서 한국 현대 미술의 성격을 공속하고 있다는 의미다.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 위치한 두산아트센터는 2007년 리노베이션을 거쳐 갤러리와 공연장을 개관하고, 이후 본격적으로 시각예술과 공연예술 분야를 축으로 활발히 사업을 전개해왔다. ‘두산아트랩’은 그 가운데서도 신진 예술가들의 “발굴과 지원을 위해 2010년부터 진행해온 프로그램”3으로서 꽤 두터운 이력을 자랑한다. 그만큼 해당 프로그램은 동시대 한국의 문화예술 현장에 기여해왔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공모를 통해 선정되는 “35세 이하” 예술 창작 루키들이 날개를 펼치는 장場이 되어왔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십여 년 넘는 동안 두산아트랩을 통해 엄격한 장르 틀에서 비껴난, 다원적이고 다매체적인 작품들과 예술기획들이 표출되어 지금 여기의 시대적 리얼리티와 현대예술의 동시대적 감성 속으로 용해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두산아트랩 전시 2024》에는 김영미, 박지은, 송예환, 임정수, 정여름 이상 5명의 작가가 공모를 통해 선정됐고 각자 영상, 회화, 웹 영상설치, 조각, 영상 작품으로 참여했다. 갤러리 측은 이들의 전시가 “하나의 공통된 주제 아래 모인 것이 아닌” 상황이라고 명시했다. 다만 이 다섯 작가의 “주목할 만한 작업 세계를 지속적으로 지켜보고자” 하는 두산아트랩 프로그램의 방향에 따라 이번 전시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주제가 없다니, 큐레이팅의 객관적 구성 요소로 따지면 핵심이 빈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미술비평의 입장에서 유연하게 보자면, 《두산아트랩 전시 2024》는 주제나 맥락 대신 현대미술의 경향성 면에서 하나의 친연관계를 이룬다. 요컨대 출품작들을 꿰는 인문적 의미의 연결고리와 조형적 형식의 상관성은 애초 없었더라도 전시장 전체를 주도하는 감각 지각적aesthetic 분위기는 분명히 감지되는 식이다. 가령 《두산아트랩 전시 2024》에서 내가 느낀 분위기는 어둡고 약간은 그로테스크하지만, 정서적으로 짓눌릴 만큼 무겁거나 주체를 공격할 만큼 파괴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두산아트랩 전시 2024》는 한편으로는 미술을 어둡게, 다른 한편으로는 미술을 가볍게 대하는 작가들의 성과다. 자신의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현실 인식과 세계의 이미지는 힘들고 문제적인데, 작품 자체의 시청각적 전달은 그만큼 심각하거나 어려운 무엇으로 감상되지 않기를 원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김영미, 〈떨리는 돌〉, 2022, 인터렉티브, 반복, 두산갤러리 전시 전경. 사진: 강수미

현실 의문과 대체 현실

출품작 일부를 들어 세부적으로 논함으로써 내가 말하는 어둡고 가벼운 현대미술의 분위기라는 것이 그저 주관적 느낌이 아니라 한국 현대미술계의 30대 작가들이 형성한 내적 형질임을 설명해보자. 두산갤러리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1층 윈도우갤러리에서 보게 되는 임정수의 〈미신이 아닌 것은 없다〉(2024) 설치작품부터 그런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동물의 사체가 썩어 문드러진 후 남은 뼛조각을 연상시키는 조각 작품들이 밝고 매끈한 통유리 박스 안에 일렬로 걸려 있다. 보자마자 원시적/신화적(“십이지에 해당하는 동물”)이거나 파괴적/피학적(해체된 몸체) 존재에 관한 연상 작용이 일어난다. 하지만 가까이 가서 그 조각들의 표피가 알록달록하게 “장식”되었음을 알아보고, 거기에 그 시각성과는 거리가 좀 먼 작품 제목을 겹쳐 생각해볼 때 〈미신이 아닌 것은 없다〉는 안심할만한 감상 대상으로 돌아온다. 작품에 대한 첫인상은 어두웠는데 시각적으로 즐기기는 어렵지 않고, 말(작가 의도)과 사물(작품의 액면)의 관계는 자의적인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는 임정수의 다른 작품, 즉 갤러리 내부에 설치한 〈욕망이 도착했다는 소문을 들었다〉(2024)에서도 비슷하게 경험하는 감상자의 지각경험과 인식의 과정이다. 제목이 주는 인상이 유사pseudo 인문학적이라 해도 이 작가의 작품은 동시대 미술의 공간설치 언어와 사물을 다루는 디자인 문법에 충실하다. 때문에 우리 감상자도 후자에 영향 받는 향유에 충실해진다.

김영미의 〈떨리는 돌〉(2022)은 두 개의 영상이 한 작품을 이룬 구조다. 전시장 벽면에 크게 투사된 영상에서는 공기놀이를 하는 손을 크게 클로즈업해 보여준다든가 하면서 속도는 느리지만 동적인 이미지를 구현한다. 그 영상 앞에 세로로 세워진 작은 모니터에서는 뒤의 영상과는 달리 정적인 이미지가 재현된다. 마치 화성처럼 낯선 우주의 어느 지표면에 쌓인 돌무더기 사이로 오렌지색 점들이 느리게 발광하는 것 같은 장면이 연출된다. 이렇게 두 영상이 조형적으로 유기적이거나 내러티브로 상관interact하지 않는 〈떨리는 돌〉에서 관객은 어떤 상상 혹은 생각거리를 찾을까. 아니, 이런 질문 자체가 미술작품에서 유기적 체제와 서사 관계를 중시해온 기성 미술 전문가의 편견일지 모른다. 작품 설명에 따르면 “작가는 결과를 알 수 없음에도 더 나은 삶을 바라며 기원하는 마음과 행위를 데우고 보관하고자” 〈떨리는 돌〉을 창작했다. 그 의도를 고려해 영상을 다시 보면 돌무더기는 옛사람들의 구복求福 상징인 돌탑의 이미지로, 발광하는 오렌지색 점들은 일종의 은총으로 해석될 수 있다. 게다가 “떨리는 돌”이라는 제목과 “마음과 행위를 데우고 보관”한다는 서술은 작품 속 이미지에 대한 문학적 표현이자 물리적 운동의 질적 변양變樣을 묘사한 화두로서 타당성을 얻을 것이다. 그럼 이 시적인 분위기의 영상들에서 과연 우리가 바라는 “더 나은 삶”이 무엇인지, 그것을 위한 마음과 행위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듣고 볼 수 있을까. 어려울 듯하다. 왜냐하면 작가는 처음부터 그러한 내용을 답변하고자 현실에 관해 작업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정경, 그러한 분위기, 그러한 서정성을 영상매체로 가시화하는 데 주력한 것 같기 때문이다.

정여름, 〈조용한 선박들〉, 2023, 2채널 영상, 4K, 컬러+흑백, 스테레오. 사진: 두산갤러리 제공.

기획 측은 다섯 작가들이 “현실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하고, 그들의 작품들로 이뤄진 “전시는 현실과는 또 다른 가능성을 내포하는 ‘대체된 현실’을 잠시나마 우리 앞으로 가져올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 말들은 귀하게 들린다. 하지만 《두산아트랩 전시 2024》에서 그에 맞는 작가와 작품은 정여름의 〈조용한 선박들〉(2023) 2채널 영상에 한정돼 보인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비디오는 ‘누구나 한 번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시도를 한다’는 충격적인 진술로 시작해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들을 보여주며 ‘그래서 나는 베트남으로 떠났다’라고 발언한다. 알고 보니 작가는 “베트남의 ‘DMZ 다크 투어’에 나선 화자”를 상정하고 그 사람의 행보를 따라 1950-70년대 베트남전쟁의 장소들을 간접 경험하는 구조로 〈조용한 선박들〉을 작업했다. 십여 년 전부터 국제비엔날레와 국내외 주요 기획전에서는 ‘다크 투어리즘’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리서치 기반 작품들이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현대미술이라는 느슨하고 개방된 틀을 통해 역사, 정치, 민족, 전쟁, 파국, 기억, 잔여, 패권 같은 인문학적 이슈를 한데 모으는 효과를 발휘하기에 담론 중심 컨템포러리 아트 신에서 앞 다퉈 키운 면이 있다. 게다가 세계사적 상흔이 새겨진 장소, 트라우마 지역, 분쟁의 공간을 둘러보는 다크 투어리즘은 인식론적 통찰과 동시에 폭력에 대한 관음과 스릴을 경험하는 미적 이율배반의 모티프로서 현대미술의 경향에 들어맞는다. 정여름의 〈조용한 선박들〉 또한 그러한 작업들과 다르지 않은 군집에 있어 보인다. 다만 내게 유독 이 영상작품이 문제적으로 다가온 것은 앞서 썼듯 ‘자살’ 관련 언급과 그것을 베트남 여행과 연결 지은 젊은 작가/화자의 사적 내러티브 때문이다. 여기서 비로소 《두산아트랩 전시 2024》가 “현실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하는” 35세 이하 작가를 선정하고 그/녀의 작품이 “대체된 현실”로서 감상 가능하다는 전시 해설이 성립한다. 즉 이때 현실은 거대서사가 아니라 개인사의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징글징글하게 문제가 되는 나를 둘러싼 바깥세상(왜 내가? 왜 내게?)이다. 그리고 〈조용한 선박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대체된 현실은 기성세대의 거창한 문제의식 대신 비극적 역사를 사적 내면으로 어둡게 건너다보는 시선과 여행 욕구를 자극하는 묘한 풍경이 병렬하는 4K 이미지의 양태다. 그 점에서 작품이 두 개의 채널로 구성된 데는 그만한 명분이 있는 것이다. 현실과 같은 템포의 다른 이미지 현실로서.

《두산아트랩 전시 2024》 전시전경. 오른쪽 끝 송예환 〈(누구의) World (얼마나) Wide Web〉, 2024, 웹사이트, 마분지, 영상 설치, 300×300×280cm. 사진: 두산갤러리 제공.

 

 


1 니꼴라 부리요, 『래디컨트』, 박정애 옮김, 미진사, 2013, p. 109.

2 강수미, 『다공예술: 한국 현대미술의 수행적 의사소통 구조와 소셜네트워킹』, 글항아리, 2020.

3 이상 전시 관련 인용은 《두산아트랩 전시 2024》 보도 자료를 출처로 한다.


강수미 미학. 미술평론. 동덕여자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부교수. 『다공예술』, 『아이스테시스: 발터 벤야민과 사유하는 미학』 등 다수의 저서, 평론, 논문 발표.주요 연구 분야는 동시대 문화예술 분석, 현대미술 비평, 예술과 인공지능(Art+AI) 이론, 공공예술 프로젝트 기획 및 비평. 현재 동덕여자대학교 사회봉사센터 센터장, 한국미학예술학회 기획이사 및 편집위원, 《쿨투라》 편집위원.

 

 

* 《쿨투라》 2024년 3월호(통권 11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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