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집태우기] ‘숯의 화가’ 이배, 베니스행 ‘달집태우기’: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비디오 설치작 〈버닝〉으로 상영
[달집태우기] ‘숯의 화가’ 이배, 베니스행 ‘달집태우기’: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비디오 설치작 〈버닝〉으로 상영
  • 박영민 기자
  • 승인 2024.02.28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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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달 밝은 밤을 신비롭게 여겼다. 둥근 달은 풍요를 상징한다. 그래서 1년 중에서도 첫 번째 찾아오는 정월보름은 더욱 귀히 여겨서 ‘대보름’이라고 불렀다.

어릴 적 나의 고향에서는 대보름달 맞이가 유독 각별했다. 마을회관에서는 윷놀이판이 벌어지고, 저녁이면 온 동네 사람이 동산에 올라 달맞이를 했다. 오곡찰밥을 먹으며, 건강하고 넉넉한 한 해를 기원하는 정월 대보름은 온 마을이 함께하는 축제였다. 이 중에서도 정월 대보름의 백미는 바로 ‘달집태우기’였다. 청솔가지를 베어다 세우고 짚단을 주위에 새끼줄로 붙들어 맨 달집에 불을 지피며 나쁜 기운을 보내고 복을 불러오는 송액영복送厄迎福을 적은 한지를 묶어 태웠다. 불은 모든 부정과 사악을 살라버리는 정화의 상징이다. 불에 타고 남은 숯 조각은 행운의 부적처럼 여겨 간직되곤 했다.

올해 정월 대보름날인 지난 2월 24일, 경북 청도군에서 열린 행사는 좀 더 특별했다. 커다란 달집과 세계 각지에서 날아온 소원이 적힌 한지에 불이 붙었다. 활활 타오르는 이 광경은 청도에서 태어난 ‘숯의 화가’ 한국 현대미술 거장 이배 작가가 영상으로 담았다. 전통 한복 차림으로 직접 달집에 불을 붙인 이배 작가는 달집에 불이 붙는 순간부터 불길이 달빛 밤하늘 높이 타오르다 이튿날 아침 숯만 남는 순간까지 전 과정을 〈버닝Burning〉이라는 이름으로 담았다.

이 설치 영상 작품은 4월 개최되는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선보인다. 숯의 예술에 영감을 준 것은 작가가 어린 시절 고향 청도에서 경험한 달집태우기였다. 농업의 순환성을 내포한 달집태우기 의례는 그 자체로 자연과 사람의 대립을 해소하는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이배의 ‘순환, 반복’의 세계관과 맞닿는다. 이질적인 문화가 하나로 이어지고, 한국의 전통문화를 서양에서도 깊게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배 작가는 자신의 예술적 기반이 되는 달집태우기 영상작품을 베니스비엔날레 작품으로 선택했다.

베니스비엔날레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축제로 꼽힌다. 올해는 본 전시에 4명의 한국 미술가가 이름을 올렸을 뿐 아니라, 이와 연계해 한국 미술의 흐름을 짚어보는 공식 부대전시가 6개나 열린다.

전통적인 K-미술을 세계 아트 시장에 알리는 장이 될 이 전시는 국내 작가의 비엔날레 공식 병행 전시 4개 중 하나이다. 한솔문화재단 뮤지엄산과 빌모트 파운데이션이 공동 주관하고 부산 대표 갤러리인 조현화랑이 후원하였으며, 이탈리아와 한국에서 활동하는 독립 큐레이터 발렌티나 부찌가 기획했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1964빌딩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배 작가는 “내가 세잔이나 모네를 이해하는 것만큼 서양에서 겸재나 추사를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하는 열망이 있었다”며, 이번 전시가 “동양을 이해하는 하나의 코드가 되면 좋겠다”고 밝혔다.

정월 대보름인 지난 24일 경북 청도군 화양읍에서 이배 작가의 점화로 달집태우기 행사가 열렸다. 이날 달집태우기 과정을 담은 영상은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비디오 설치작 〈버닝〉으로 상영된다. 조현화랑 제공

이 전시는 액운을 날리고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정월대보름에 열리는 전통 의식인 달집태우기를 통해 현대 인간사를 재조명하고 지역과 세계의 연결·순환의 의미를 짚는다. 이배 작가의 고향 경북 청도에서 열리는 달집태우기 현장을 생생하게 담은 영상 〈버닝Burning〉으로 전시는 문을 연다. 전시장 입구에서 주 전시공간으로 이어지는 복도 전면을 가득 채운 영상을 통해 세계의 관객들은 한국의 달집태우기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타일처럼 배치된 숯이 연마 과정을 거쳐 각기 다른 빛을 내는 〈불로부터〉에서 시작된 전시는 바닥과 벽면에 숯의 흔적이 굽이치는 〈붓질〉로 이어진다. 대형 설치작품인 〈먹〉은 짐바브웨의 검은 화강암으로 문방사우의 하나인 먹을 형상화했다. 명상과 성찰, 비움과 채움 등 거대한 동양문화권을 대변한다. 전시 마지막은 〈달〉이 채운다. 스테인드글라스로 제작한 천장을 통해 재현된 달빛은 청도의 달집을 비추는 대보름의 빛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탈리아 베니스 빌모트 파운데이션에서 다음달 20일부터 열리는 베니스비엔날레 개인전 ‘달집태우기’를 준비하는 이배 작가가 〈붓질〉 연작 작업을 하고 있다. 조현화랑 제공

“내 근원과 베니스비엔날레를 이을 수 없을까”를 고민했다는 이배 작가는 “그때 떠오른 것이 고향 근처 선사시대 유적지였고, 이 생각은 프랑스 카르나크의 거석 유적과 영국 스톤헨지까지 이어졌다”며 "‘먹’은 보는 전시라기보다 느끼는 전시가 됐으면 한다"고 언급했다. 또한 “나는 평면을 하는 화가이고 싶지만 조각 설치 영상 작업을 하며 새로움을 향한 열망을 느꼈다”며, 새롭지 않으면 앞으로도 공감을 얻기도 어렵기에 “새로워지기 위해 노력한다”고 고백했다.

벨렌티나 부찌 큐레이터는 “복잡한 현실과 정체성 고민 속에 자연과 멀어지고 이웃과는 소원해지는 오늘날, 이 전시는 회복과 화합에 대한 깊은 울림을 줄 것”이라고 평했다.

청도 <달집태우기> 영상 작품에 사용될 이배 작가의 달집. 조현화랑 제공

‘숯의 화가’로 불리는 이배는 해외 미술계가 인정하는 작가다.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30여 년간 ‘숯’이라는 독특한 재료와 흑백의 서체적 추상으로 만든 한국적인 회화를 선보였다. 나무가 타버리고 나서도 새로운 쓸모를 발견하는 숯에서 나온 순환과 나눔의 개념은 드로잉, 캔버스, 설치 등 여러 형태로 확장돼 왔다. 이배는 지난해 한국 작가 최초로 미국 뉴욕 맨해튼의 심장부인 록펠러센터에 6.5m 높이의 숯 더미 형상 조각 〈불로부터〉를 전시해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2024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청도의 달집이 남긴 숯을 도료 삼아 이탈리아 파브리아노 지역의 친환경 제지를 한국 전통의 배접 방식으로 담아낸 이배의 〈붓질〉을 만나보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새로움이 느껴지지 않을까. 어린 시절 고향에서 눈에 담았던 정월 대보름의 달빛을 연출한 구조물 〈달〉이 세계의 관람객을 비추며 대미를 장식한다면 얼마나 감동적일까. 상상만으로도 벌써부터 두근두근 설렌다.

 

 


 

 

* 《쿨투라》 2024년 3월호(통권 11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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