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오늘의 드라마] 처절하고 절실한 그녀의 복수에 매혹되다: 〈더 글로리〉
[2024 오늘의 드라마] 처절하고 절실한 그녀의 복수에 매혹되다: 〈더 글로리〉
  • 최정인(중앙대학교 교수)
  • 승인 2024.02.28 14: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밤을 지새우며 그녀의 복수에 가담하다

별반 새롭지 않아 보이던 학교 폭력 소재의 드라마에 새삼스레 충격을 받았고, 사연을 그득히 지닌 송혜교의 표정에 매료되어 나는 차마 플레이 버튼을 멈추지 못했다. 드라마의 첫 시즌을 접한 많은 이들이 두 번째 시즌을 기다리며 곧 이어질 내용을 앞다퉈 예측하며 작가가 뿌려두었다고 생각하는 떡밥의 단서들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악마의 나팔꽃처럼 밤잠을 잊고서 온갖 카페와 블로그 글들을 탐독하며 그들의 기발한 상상력에 무릎을 친다. 한쪽 눈의 혈관이 터진 줄도 모른 채 알고리즘이 이끄는 수많은 유튜브 콘텐츠들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그럼직한 주장들에 감탄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실상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는 스트리밍이 시작되고 나서 우리 사회에 무거운 파장을 일으켰다. 학교 폭력에 대한 엄중함이 거듭 재담론화 되었고, 학교 폭력 피해의 아픔을 쓰게 삼키며 숨어 살던 여러 ‘문동은’들이 용기를 내어 세상으로 나왔다. 그리고 별 죄책감 없이 잘만 살아가던 많은 ‘박연진’들이 사회에 고발되었다. 드라마 〈더 글로리〉는 사회적 이슈들을 무수히 생산하며 2023년 상반기를 단번에 접수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찾아다니며 복수하는 쿠엔틴 타란티노식의 익숙한 기본 플롯이 김은숙 작가의 손을 거치면서 색다른 스토리로 구축되었다. 그것은 문학적이고 때로는 발칙하기도 한 대사들을 고이 품고 신선함으로까지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피해자 문동은이 복수하려는 처절한 이유를 납득해가며 출근 시간의 압박도 잊은 채 밤샘을 감행한다. 그리고 그녀의 복수 계획에 이견 없이 가담하게 된다. 드디어 철저하고도 치밀한 계획을 본격적으로 실행하려는 그녀의 뒤를 우리는 조심스럽게 따르기 시작한다.

자신의 영혼을 파괴한 가해자가 곧 꿈이 되어버린 비장한 현실

동은은 18년 동안 복수를 꿈꾸며 박연진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운” 그리고 때로는 “보고 싶은” 연진에게 마음 깊이 담아두었던 말들을 담담하게 써간다. 어조의 높낮이 없이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어투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동은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의 감정이 읽힌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그동안의 시간을 견뎌냈는지 어떤 힘으로 세상을 버티며 살아왔는지를 짐작하면서 말이다. 마침내 부치지 못하고 재로 남게 될 그녀의 편지글은 그녀에게 잔인한 과거이면서 그녀의 비장한 현재이고, 이내 처연한 그녀의 미래가 된다. 그리고 그녀가 편지에 썼듯, 곧 “타락할” 문동은은 “추락할” 박연진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함께 동조했던 가해자들과 연진을 서서히 옥죄기 시작한다.

한편 동은의 망나니 칼을 자처한 주여정 역시 아버지를 살해한 강영찬에게 편지를 받는다. 그에게 강영찬의 편지글은 곧 폭력이고, 고통이며 지옥이다. 강영찬의 수인번호가 그의 집 도어락 비밀번호가 되었고, 그는 복수를 향한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매일 수인번호를 누른다.
박연진과 강영찬이 행했던 폭력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심심해서”라니. 단순히 ‘실수’라니. 사람에 대한 존엄은 고사하고,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을 만큼의 참혹한 폭력으로 피해자들의 영혼은 산산이 부서져 갔다. 절대 악을 처단하기 위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동은과 여정의 사적 복수에 나 역시 분노하며 기꺼이 동참하기로 한다. “죽이고 싶은 박연진”과 죽어 마땅한 강영찬이 곧 그들의 꿈이 되어버린 현실을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정성껏 지은 집을 허물고 빼앗는 게임

문동은은 목적을 가지고 바둑을 배운다. 상대방이 정성껏 지은 집을 빼앗는 게임이라 “아름답더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앞서 김은숙 작가는 드라마 〈상속자들〉에서 바둑에 대해 “상대보다 한발 앞서기 위해 침묵 속에서 전력으로 싸우는 게 너무 멋있다”고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말하기도 했다. 바둑은 이 드라마에서 다의적 메타포로 다분히 기능하고 있다.

바둑은 말없이 손으로 돌을 두는 두 사람의 대화이다. 동은은 주여정에게 기풍을 배우며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갔고, 이후 서로를 향한 마음을 바둑판을 통해 확인한다. 그리고 바둑은 동은이 연진의 남편 하도영을 유혹하는데 절대적 수단이 된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서로의 기풍으로 상대를 알아갔고, 때로 그 기풍을 느끼며 상대의 욕망을 자극하기도 했다. 동은과 도영이 바둑을 두는 장면이 이 드라마를 통틀어 가장 매혹적이고 아슬아슬하며 숨 막히게 하는, 제일 역동적인 장면으로 여겨졌다면 믿을까. 그들의 바둑은 느리고 고요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강한 긴장감 속에서 크고 빠르게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바둑은 결국 집을 부수고 빼앗아 이기는 게임이다. 동은은 어린 시절, 절대적 ‘힘’을 겪었다. ‘힘’은 곧 돈이면서 계급이었고, 공권력이기도 하며 무력 그 자체였다. 동은이 경험한 그 ‘힘’은 강력했으며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좌절했다.

그러나 바둑은 고수와 하수가 최대한 힘의 균형을 가지고 시작한다. 하수가 쥔 흑돌은 승패에 유리한 선공이 가능하다. 동은은 흑돌을 쥐고 박연진을 공격했고, 언제까지 백일 것 같았던 연진의 돌은 바둑판에 던져진다. 결국 문동은이 이겼다. 하지만,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고 했던가. 언제고 연진의 딸 예솔이 동은의 바둑판에 들러 복수의 돌을 던질지 모를 일이다. 부디 동은의 집은 언제까지나 굳건하길.

 

엄마라는 이름

드라마 〈더 글로리〉에는 여러 모습의 ‘엄마’들이 존재한다. 일찍이 노희경 작가는 드라마를 통해 ‘엄마’가 ‘꽃보다 아름답다’고도 했다. ‘엄마’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더 글로리〉에 등장하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남편의 끔찍한 폭력에서 딸을 구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마땅히 남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선아 엄마인 현남, 이제 멍에를 벗어던지고 가죽 잠바에 빨간 립스틱을 마음껏 바르며 부디 행복하기를. 딸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무력하게 울며 빌기만 했지만, 이후 소극적인 방식으로나마 딸의 죽음을 밝혀낸 소희 엄마, 이제 딸을 마음에 묻고 눈물을 닦으며 굳건하게 살아가기를. 아들이 그예 스스로 파멸하지 않도록 동은에게 아들의 손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던 여정의 엄마, 동은과 여정은 서로의 마음을 이미 확인했으니 아들에 대한 걱정은 떨치기를. 아들이 죽은 이후 정신을 놓아버리고 물에 빠져 죽고자 했지만, 춥다며 봄에 죽자던 빌라 할머니,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아서 어느 봄날에 훌쩍 꽃을 보러 올 동은과 꼭 반가운 재회를 하기를.

한편으로 〈더 글로리〉에는 돈 때문에 두 번이나 딸을 저버린 동은의 엄마처럼 인생의 절대적 가해자거나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엄마들도 등장한다. 마약에 찌든 딸을 수액으로 관리하며 그릇된 과잉보호를 하던 이사라의 엄마, 우월감으로 베이비 시터에게 금수저론 시전하고 해고를 강행했던 하도영의 엄마, 이혼한 아들의 짝이 될 수도 있었던 최혜정의 조건을 시시콜콜 따지던 사채업자 태욱의 엄마, 연진의 비행을 알고도 묵인하다가 스스로를 위해 끝끝내 딸을 포기해버린 연진의 엄마, 딸에게 출생의 비밀만을 만들어주고 수감된 예솔이 엄마 연진에 이르기까지. 이 드라마는 세상의 모든 엄마에게 모성애가 필요 충분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제일 가까운 가족이 가장 잔인한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의견을 현실적으로 제시한다.

흉터가 아닌 상처를 보듬다

동은이 복수의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몸에 남겨진 화상 흉터들 덕분이었다. 시시때때로 느껴지는 엄청난 가려움은 함께 떠오르는 아픈 기억과 함께 지독히도 그녀를 괴롭혔다. 여정은 그녀가 지닌 것은 “흉터가 아닌 상처”라고 한다. 흉터는 그저 흉하게 남은 자국이지만, 상처는 언젠가 아물 수 있는 것이기에.(여정의 직업이 하필 성형외과 의사인 것은 운의 덤이다)

어느 순간부터 드라마 속 세상은 동은을 중심축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동은의 계획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거나 때로는 동은의 계획을 넘어선 찬란한 복수의 향연이 알록달록한 카오스 속에 이판사판 벌어진다. 이이제이以夷制夷. 동은은 가장 경제적이고 스마트한 방식을 선택한다. 복수의 대상들은 결국 서로를 해치며 무참히 몰락을 맞게 되고, 동은이 신의 선택을 받은 것인지, 신과 합의를 본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벌전으로 죽음을 맞이한 무속인에 이르기까지 동은과 관련된 가해자들 모두가 단죄된다.

복수가 끝을 향하면서 다소 작위적 상황과 과잉적인 표현은 사이다를 마시고 트림하고 난 후에도 애매하게 혀끝에 남은 달근한 맛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동은이 교사로서 연진의 딸아이를 연진을 협박하는 복수의 수단으로 삼고자 계획했던 것도 역시 정당치는 못했다. 아무리 “넝담”을 일삼으며 아이들의 이상한 사진들 찍어대던 추정호를 예솔의 생물학적 아빠인 재준이 흠씬 패도록 했더라도 말이다.

이제 동은의 복수는 마무리가 되고, 여정의 복수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며 모든 복수의 끝에 서게 될 그들에게 반드시 영광이 있기를.

 

 

사진제공 넷플릭스

 

 


최정인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영상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드라마 교과목을 개설하여 수업하고 있다. ‘열정적인 중재자’ 유형의 MBTI로 늘 드라마틱한 하루를 꿈꾸지만, 직업 덕에 ‘재기발랄한 활동가’를 코스프레하며 하이퍼리얼한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영화를 전공했고, 영화 프로듀서로 일을 한다. 가끔 시간 되고 돈이 될 때 독립영화 연출도 간간이 하고 있다. 2021년에 다큐멘터리 〈청춘선거〉의 프로듀서를 맡아 극장 개봉을 시켰고, 2022년에 〈Onstage〉라는 VR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다. 드라마에 대한 애정으로 논문 「A Study on the Topographical changes in Korean drama since the 2000s(2023)」을 쓴 바 있다. 오래전에 『배우 연기 연출』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 《쿨투라》 2024년 3월호(통권 117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