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은의 시조 안테나] 임성구 시인의 「탈고(脫苦)」
[이승은의 시조 안테나] 임성구 시인의 「탈고(脫苦)」
  • 이승은(시인)
  • 승인 2024.02.2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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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꽃샘추위가 엿보기는 하지만 바람 맛은 삼월입니다. 지난 시간들을 추스르니 카뮈의 말이 떠오릅니다. -모든 잎이, 꽃이 되는 가을은 두 번째 봄이다.- 가을단풍처럼 우리 생의 가을은 그 자체로 꽃이기에 인생의 두 번째 ‘봄’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인식의 전환처럼 인생에 대한 관점의 전환을 ‘탈고脫苦’에서 봅니다. 타들어가는 ‘망자의 모란이불 한 채’... 그 매캐한 연기가 두 눈을 가시바늘로 찔러대는 아픔의 시절을 건너오셨군요. 그렇게 이별한 사람이 누구였을까요. 화자의 삶이 잠시 비극적으로 비칩니다.

활짝 핀 모란이 그려진 이불을 덮고 살면서도 망자의 삶은 고통의 강 속이었나봅니다. 막막한 생을 살아온 ‘두꺼운 얼룩’은 하나님도 못 읽어냈지만, 얼룩진 울음을 끊어내자 가슴에 갇혀있던 고통의 ‘새’는 멀리 날아갑니다. 탈고의 상태지요. 떠난 이는 오로지 그리움으로만 남는 것. 고마운 감성천국의 ‘바람이 지나간 자리’로 말입니다. 우리네 삶의 전면과 이면을 깨닫습니다. 이제 못 부를 노래는 없는 것이지요. 한때 져버린 꽃들도 다시 만발한 얼굴로 피어날 것이고요.

관점을 전환해서 짚어볼까요. 시를 쓰는 과정에서의 산고와 완성하지 못한 원고를 태우는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을 알면서도 만발한 모란을 보기 위해 끊임없이 천착하는 시인의 숙명을 노래한 것으로도 가슴에 담습니다.

이 작품을 끝으로, 시조 안테나를 접으며 떠오른 생각.

고대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개선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그 행렬 뒤에서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를 크게 외치게 했다지요.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마라, 오늘은 환영을 받지만 언젠가는 죽는 인생이니. 부귀영화도 한순간이니 겸허한 마음을 잃지 말자는 풍습이었다지요.

〈죽은 시인의 사회〉 덕분에 잘 알려진, 고대 로마시인 호라티우스 시집에 실린 “Carpe diem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은 과거에 휩싸여 후회만 하지 말고 발전 가능한 생각으로 지금을 맞으라는! 해가 갈수록 공감의 폭이 커집니다. 이 봄날, 우리 모두 자신의 운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사랑하기를. “Amor fati!”

 

 


이승은 1958년 서울 출생. 1979년 문공부·KBS 주최 전국민족시대회로 등단. 시집으로 『첫, 이라는 쓸쓸이 내게도 왔다』 『어머니, 尹庭蘭』 『얼음동백』 『넬라 판타지아』 『환한 적막』 외 5권, 태학사100인시선집 『술패랭이꽃』 등이 있다. 백수문학상, 고산문학대상, 중앙일보시조대상, 이영도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쿨투라》 2024년 3월호(통권 11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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