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영웅 서사의 초월적 체험: 〈듄: 파트 2〉
[영화 월평] 영웅 서사의 초월적 체험: 〈듄: 파트 2〉
  • 강유정(영화평론가, 강남대 교수)
  • 승인 2024.02.28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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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을 지칭하는 드라마drama의 그리스 어원은 행동을 뜻하는 dran이다. 〈듄: 파트 2〉는 그런 점에서 드디어 행동한다. 드라마를 전개하는 것이다. 3년 전 공개된 파트 1이 상황과 배경의 제시였다면, 파트 2는 본격적인 행위를 보여준다. 그 행위는 회의, 시험, 발견, 사랑, 주저, 복수로 연쇄된다. 답보하던 파트 1의 지지부진함은 파트 2에 이르러, 몰아치는 행위 가운데 분쇄된다. 이제, 폴 아트레이더스(티모시 샬라메 분)는 폴 무앗딥 우슬로 변신하고 마침내 자신을 폴 무앗딥 아트레이더스로 지칭하며 다시 태어난다.

1965년 출간된 프랭크 허버트의 장편소설 『듄』은 현대 대중 영웅 신화의 원형 서사를 제공했다. 오디세우스의 표류기, 아더왕의 자기 증명 서사, 〈반지의 제왕〉의 자기 심문은 『듄』에 이르러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웅의 자기 각성과 발견, 구원의 대하 서사로 확장되었다. 아직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폴 아트레이더스는 영웅으로 태어났으나 운명을 불신하는 메시아로 여정을 떠난다. 영웅은 스스로 길을 만든다는 메시지는 소설과 영화를 통해 거듭 확인된다. 스스로를 알지 못하던 영웅이 추앙과 모험, 여정, 절대적 사랑을 통해 그 힘을 깨닫고 메시아로 거듭나는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우리가 이미 여러 번 보아왔던, 기시감이 너무 짙은, 진부한 이야기이다. 1965년 소설 『듄』이 자기 발견의 스페이스 오딧세이와 스페이스 오페라를 시작했지만 대중은 이미 〈스타워즈〉나 〈매트릭스〉를 통해 영웅서사를 미리 체험했던 것이다. 자신을 의심하는 영웅의 고난과 모험의 여정 가운데 각성하는 인물들, 『듄』의 후예들이 그 유전자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을 『듄』의 세계관을 일종의 복제처럼 여겨지게 만든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드니 빌뇌브의 〈듄〉이 공략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영화로서의 절대적 감각과 그 체험이다. 시각적으로 〈듄〉은 컴퓨터 그래픽이나 3D 혹은 이모션 캡쳐와 같은 시각 기술보다는 재래적 영화 시점이 줄 수 있는 환상적 시각 예술의 극한을 추구한다. 영화가 추구하는 것은 시각적 환상의 재현이 그 목표라는 듯이 말이다. 이를테면, 슈퍼 하이 앵글의 부감으로 내려다본 사막의 질감은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으로서의 사막의 감각을 전달하고, 지평선을 너머 인간의 나안이 지닌 한계를 초월하는 풍경의 파노라마는 광학적 경이를 선사한다. 우주선을 올려다보는 인간의 시각을 로우 앵글의 과감한 앙각으로 잡아냄으로써 기계 문명의 위압감은 고스란히 상상에서 체감의 영역으로 삽입된다. 평면적 게임 공간이나 그래픽 시뮬레이션의 조악함이 아니라 관객이 그 안에 있는 것 같은 황홀함을 〈듄〉의 시각환경이 제공하는 것이다.

한편 한스 짐머가 사람의 목소리로 창조해낸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과 사막 벌레를 불러 내는 기계음, 사막 행성 전반을 감싸는 앰비언스 체험은 영화관이 아니라면 제대로 경험할 수 없는, 영화적 감각 체험의 앙상블을 제공한다. 중력을 거스르며 우주선에서 활강하는 군인들이나 모래 위를 춤추듯 걸어가는 프레맨의 스텝은 드니 빌뇌브가 추구하는 우아함을 장면화한다. 장엄함과 웅장함이 크기와 위압감이 아니라 더하거나 덜할 것이 없는 단정함이라는 사실을 장면마다 보여주는 것이다. 이 과정은 여분의 체지방이라곤 없는 듯 가벼운 티모시 샬라메의 폴 아트레이더스, 무앗딥으로도 변주된다.

귀중한 연료 스파이스를 가진 사막의 땅 아라키스, 그 사막의 거주민들인 프레맨 족은 스파이스 때문에 제국의 수탈에 시달린다. 황량하고 거친 사막에서 자신이 흘린 땀과 눈물을 거둬 다시 물로 써야 하는 프레맨들에게 어딘가에 존재할 메시아, 리산 알가입은 척박한 삶을 견인할 원초적 서사이자 근원적 희망이다. 북부 아라키스의 군대를 이끄는 스틸가는 폴을 그들에게 구원을 줄 리산 알가입으로 추앙하지만 정작 폴을 사랑하고 폴에게 사막의 삶을 알려 주는 조력자 챠니는 불모지에 있기 마련인 맹신이라며 스틸가의 믿음을 애써 부정한다.
폴의 능력은 이미 예언과 독심술 능력을 가진, 베네 게서리트 어머니로부터도 예지되었던 바이며 스스로도 감지하고 있던 것이었다. 제국에서는 퀴사츠 해더락으로 불리는 예언자, 예지자로서의 능력은 폴이 겪었던 모든 고난의 시작이기도 하다. 능력이기도 하지만 재난의 씨앗이기도 한 그것, 폴은 고통스러운 운명을 받아들여간다. 〈듄: 파트 1〉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궁금증은 〈듄: 파트 2〉에 이르러 상당 부분 해소된다. 폴이 퀴사츠 해더락 혹은 리산 알가입이 맞는지 황제는 왜 폴의 아버지를 배신하고 아트레이더스를 멸족시키려 했는지 까닭이 드러나는 것이다.

1편에 대한 궁금증을 푸는 부분도 있지만 무엇보다 매력적인 것은 바로 폴의 자기 발견 과정이다. 예지몽과 악몽 사이에서 방황하던 폴은 평범한 프레맨이 되려는 과정에서 정말 특별한 사람이 된다. 척박한 사막에 적응함으로써 진정한 능력을 틔우게 되는 것이다. 정치적 은유로도 읽히는 이 과정들에서 흉내내기가 아닌 진짜 서민됨을 통해 폴은 자기 안의 진짜 영웅됨을 발현할 수 있게 된다. 전쟁과 종교, 신앙심을 이용하려는 세력과 메시아가 있어야만 견딜 수 있는 척박한 환경 등은 여러모로 현대 세계사와 정치의 난맥과 닮아있다.
사막 북부의 수장 스틸가는 폴을 기둥으로 받들며 우슬이라는 전사명을 바치려 하지만 폴은 사막에서 가장 흔한, 작고 약한 들쥐, 무앗딥을 이름으로 삼는다. 작지만 강한 생명력을 가진, 자기 스스로 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생명력과 지혜를 가진 쥐, 무앗딥. 그는 작은 것, 서민적인 것이 강력한 리더십의 근간임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 깨달아 가는 것이다.

결국 폴은 복수에 성공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복수를 일컬어 회복할 수 없는 손해와 상처가 초래한 분노의 마땅한 되갚음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를 잃고, 조국을 잃었던 폴 아트레이더스는 폴 무앗딥 아트레이더스로 다시 태어나 복수하고 응징한다.

이미 몇 차례 영화와 드라마가 된 적이 있지만 프랭크 허버트의 『듄』은 늘 난공불락의 원작으로 여겨졌다. 방대한 양 때문만은 아니었다. 판타지 세계로 입문하기 위한 사전 지식도 만만치 않지만 각자의 상상력 안에 마련된 아름다운 사구의 풍경을 충족시키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드니 빌뇌브의 〈듄〉 1, 2부는 그 아름다운 세계를 영화적 체험으로 재현하는 데 있어 현재로서 더할 나위 없는 해석이라 할 만하다. 초월적 앰비언스와 극사실주의를 통한 초현실주의의 체험을 맛보기 위해서라도, 노력을 기울여 아이맥스 환경에서 보기를 추천한다.

 

사진제공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강유정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2005년 《조선일보》 《경향신문》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으로 등단, 저서로는 『영화 글쓰기 강의』 『타인을 앓다』 등이 있다. 현재 강남대학교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 《쿨투라》 2024년 3월호(통권 11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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