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수많은 전시들, 작가들의 흥미로운 비사
[북리뷰] 수많은 전시들, 작가들의 흥미로운 비사
  • 김혜원 인턴기자
  • 승인 2024.02.28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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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범모 『현대미술관장의 수첩』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을 역임한 윤범모 전 관장(이하 윤 관장)의 미술관 재임 시절 이야기를 총망라한 『현대미술관장의 수첩』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윤 관장이 한국국립현대미술관 관장으로 취임한 후 5년간의 회고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성격은 단순한 회고록, 혹은 자신의 치적을 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윤 관장은 이 책을 통해 국립현대미술관이 하는 업무와 방향 등을 소상히 정리함으로써 큐레이터 및 장래 미술관 업무를 희망하는 후학들에게 하나의 교과서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현재 미술과 미술관이 국가 위상을 제고하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방증함으로써 그 의의를 보여주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세계 최대 미술관의 수장이 문화 예술에만 전념할 수 없는 현실적 측면을 언급하며 전임 관장으로서 느낀 고충도 토로하고 있다.

윤 관장은 미술관 관장을 ‘백조 관장’이라고 비유했다. 백조는 겉에서 볼 때는 우아한 자태를 뽐내지만, 수면에 떠 있기 위해 두 발은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우아한 백조, 하지만 끌탕 속의 현실. 만일 관장이 대학 강단만 지켰다거나, 특히 외국에서 왔다면, 과연 관장직을 제대로 수행해 낼 수 있을까. 매일같이 시간을 다투며 작가와 작품을 결정해야 하는 미술관 관장이 기본기가 없다면 어떻게 원활하게 업무를 처리할 수 있을까. 윤 관장은 묵묵히 수행했던 현장 경험과 학술적 경험이 스스로 하여금 두 발은 정신없이 움직여야 하지만 백조 같은 자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윤 관장은 취임 당시 내세웠던 ‘이웃집 같은 미술관’, ‘한국미술의 국제화’, ‘한국미술의 정체성 확립’ 등의 목표를 위해 격무 속에서도 많은 글을 발표했다. 『현대미술관장의 수첩』은 이러한 발표문을 토대로 삼아 윤 관장의 미술관 시대를 정리하고 있다. 내용은 크게 6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제1부는 이 책을 위해 새롭게 쓴 관장 재직기간에 대한 회고담이다. 일종의 관장 업무 보고형식을 띠고 있는 1부는 윤 관장 재직 중 중요했던 일을 정리한다. 관장으로서 무슨 일에 방점을 찍었는지, 그 전후좌우의 사정을 정리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관장 선임 과정과 윤 관장이 재임 임기 1년 10개월을 남겨두고 미술관을 나오게 된 배경도 담담하게 밝히고 있다. 윤 관장은 “재임 시에 많고도 많은 일이 벌어졌다”고 밝히며 그중에서도 이건희컬렉션 기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삼성가의 이건희컬렉션 기증이 이루어진 지 이미 2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그 여운은 계속 가고 있다. 끊임없이 전시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희컬렉션 대부분을 수능 받은 당시 윤 관장의 감회가 이 책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나라를 대표하는 현대미술관임에도 불구하고 예산 때문에 한국 화가의 주요 작품이 부재한 현실. 만 점도 채 되지 않는 부족한 작품 수. 세계적 미술관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부족함이 눈에 보이는 재정적 현실을 단숨에 해결해 준 기적 같은 사건이 한국 사회를 강타한 것이다. 기증 문화가 부재한 한국에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국보급 문화재와 미술품을 여러 박물관에 고루 분배하여 기증한 이건희컬렉션 기증 사건은 미술관을 찾지 않는 많은 시민을 미술관으로 불러들였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이건희컬렉션’ 전시회.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 미술관,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국립 미술관, 소장품은 8,500점대였다. 미술관 가족은 언제 1만점 시대에 진입하는가, 꿈꾸기에도 바빴다. 하지만 꿈도 여럿이 자주 꾸면 현실이 된다는 말, 정말 좋은 말이지 않을 수 없다. … 그런데, 이 웬 사태인가. 이건희컬렉션 1,500점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그래서 올해에 수장고에 들어온 작품 2천 점은 물리적으로 10년어치 업무량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소장품과는 비상사태임을 실감하면서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소장품 1만 점 시대의 진입!’ 그것도 단숨에 1만 점을 돌파하는 행운을 잡았다. 이로써 국립현대미술관은 구매작품보다 기증품의 비중이 더 높아졌다. 경사스럽고 경사스러운 일이지 않을 수 없다. … 미술관 소장품 1만 점 돌파라는 사건도 획기적인데, 그것도 이건희컬렉션으로 소장품 가치를 드높였으니, 이 무슨 행복일까. 그래서 그런지 주위의 지인들은 나를 ‘행복 관장’이라고 부른다. 행복한 관장. 미술관에 즐거운 일이 자꾸 생기고 있기 때문이란다.

- 「이건희컬렉션의 기증과 특별전」 중, 본문 55쪽

 

제2부는 신문 연재 칼럼을 중심으로 비교적 짧은 에세이를 모았다. 특히 방탄소년단 RM과 미술에 관련해 작성한 칼럼이 흥미롭다. 윤 관장은 ‘미술한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인물로, 미술계에서 MZ 세대가 자신들의 디지털 모바일 환경에서 새로운 창조정신으로 한류를 선도할 수 있도록 기성세대 화단을 이끌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류를 선도적으로 이끈 것은 누가 뭐라 해도 방탄소년단이라 말할 수 있다.

윤 관장은 방탄소년단의 성공 원인을 “예술적 감수성의 승리”라고 설명하며 문학, 미술, 음악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RM의 예술세계가 세계를 이끈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평한다. 한국의 대표격인 젊은 음악인이 한마디를 보태주는 전시는 그야말로 세계인들의 관심을 불러모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세상의 전시가 RM이 본 전시와 보지 않은 전시로 나뉠 정도로 이제 젊은 층을 미술관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과, 세계를 한국미술로 움직이게 하는 힘은 K-pop과 자연스레 연동되고 있다. 이렇게 한류는 나날이 발전하며, 세계 전시를 통한 미술 한류로 하나의 축을 담당하고 있다.

 

“산간벽지의 청소년들도 미술책을 보면서 예술적 감수성을 키웠으면 좋겠다.” 방탄소년단 RM(본명 김남준)의 말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생일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에 1억 원을 전달했다. 이에 미술관은 이중섭, 김환기, 유영국, 박래현, 이승조 등 도록 8종의 4천 권을 보급할 예정이다. … 누군가는 말했다. 두 가지의 미술 전시가 있는데 RM이 본 전시와 그렇지 않은 전시라고. 전시장에서 만난 RM은 나에게 손상기 화가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웬 손상기? 나는 놀랐다. 그는 물었다. “관장님이 굴레방다리의 손상기 화실을 찾아가셨잖아요.” 그렇다. 나는 무명시절의 손상기와 가깝게 지냈고, 그의 작가적 성장 과정을 지켜봤다. 〈공작도시〉와 〈시들지 않는 꽃〉 같은 연작은 울림이 큰 작품이었다. 더 이상 시들 것도 없어 더 이상 버림받을 것도 없다는 시든 꽃, 바로 꼽추 화가의 자화상이었다. 개성적 예술세계와 극적인 삶을 살다 요절한 화가 손상기. RM은 손상기를 주목했고 문학적 서정성을 기반으로 한 그의 작품을 공부하며 또 자신의 집에 그의 작품을 걸어놓고 음미하고 있다. RM의 미술에 대한 열정과 해박한 지식은 수준급 이상이다.

- 「방탄소년단 RM과 미술」 중, 본문 160쪽

 

그리고 제3부는 비교적 긴 글의 모음이다. 이들 발표문은 미술관 활동의 구체적인 내용을 짐작하게도 하지만 미술관 밖의 다양한 관심사도 포함되어 있다. 누군가는 윤 관장을 두고 ‘르네상스 맨’이라고 불렀지만, 윤 관장은 동서고금 등 관심 폭이 넓었다. 3부는 이와 같은 일상의 작은 파편들을 모았다. 제4부는 언론 인터뷰 가운데 몇 꼭지를 선정했다. 관장 재임 시의 윤 관장의 생각을 밝힌 내용이다. 제5부와 6부는 부록형식의 자료 모음으로, 윤 관장 재임 시의 전시목록을 정리했다. 다양하고도 많은 각종 전시 내용은 관장 업무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제6부에 해당하는 부록은 관장실의 앨범이다. 재직 중 촬영한 기념사진 가운데 추억어린 장면을 모았다고 한다. 이는 시각자료로 본 미술관의 역사이고 윤 관장의 개인적 추억 앨범이기도 하다.

윤 관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관장이기에 앞서 미술평론가이자 한국미술전문가이다. 그의 한국미술에 대한 애정은 학문적 의미에서 많은 저작에서 드러나고 있는데, 관장직을 수행하면서 기고한 많은 신문, 인터뷰 등의 글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한국미술의 연원과 한국미술이 어떻게 발전해야 하는가에 대한 평생에 걸친 고민이 결국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직을 맡으면서 실천에 옮겨져 한국미술의 위상을 높이게 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 전 관장

한국미술의 역동성과 확장성은 『한국미술 1900-2020』을 펴내면서 드러났다. 해외에 한국미술을 설명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책자가 없는 상황에서 일제강점기의 미술, 전쟁과 이산의 미술, 50~70년대 조국 근대화의 미술, 80년대 저항 미술, 90년대 이후 국제화 미술 등으로 분류된 이 책자는 한국미술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도구가 되었고, 한국에서도 해외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윤범모 관장은 80년대 저항 민중 예술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미술 현장에서 축적된 지식과 경험을 망라하여 한국의 심미론을 무애미론으로 정리하며 한국 사회의 복잡성이 어떻게 한국미술의 다양성과 역동성으로 확장되는지 언급하고 있다.

특히 윤범모 관장은 우리 미술에 관한 강한 애착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 채색화에 대한 재해석이다. 동양화 및 한국화로 알려진 수묵화는 중국미술의 전유물이며, 오방색을 중심으로 한 채색화야말로 우리 미술인데, 이것이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에 의해 민화라고 명명되면서 저평가되고 있었다. 민화라는 명칭의 오류를 바로잡고 우리 미술의 전통을 찾고 전통을 현대화하는 문제, 즉 법고창신의 정신을 새로이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서양미술 범람 시대에 우리 미술의 참모습을 만나고자 많은 세월을 보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의 ‘한국미술의 정체성 찾기’는 국립현대미술관의 관장으로 재임하면서 학술적 맥락에서 실천의 단계로 옮겨졌다. 그것은 다분히 성공적이었다.

 

우리는 미술 한류의 시대를 맞고 있다. 한국미술의 국제 경쟁력을 염두에 둘 때, 채색화 분야의 경쟁력을 꼽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이른바 민화계의 새로운 각오를 촉구하게 한다. 잠재적 가능성은 농후하다. 하지만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사전 정지 작업이 절실하다. 이는 민화라는 명칭과 개념의 새로운 정리를 강조하게 한다. 야나기 산맥의 극복은 필수조건이다. 민화계의 모사와 창작의 영역 구분의 철저, 이 부분은 스타 작가를 양성하기 위해서도 현실적으로 중요하다. 훌륭한 작가는 투철한 작가 정신으로 무장되어야 하고,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제 민화계의 경쟁 상대는 민화계 내부가 아니다. 일반 미술계를 경쟁 상대로 두어야 하고, 이는 좀 더 발전하여 국제 미술계를 경쟁 상대로 두어야 한다.

- 「미술 한류 시대의 채색화」 중, 본문 340쪽

 

이 책은 윤범모의 전기가 아니다. 하지만 그가 현대미술관 관장으로서 이루어낸 성과가 크다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러한 성과는 한류라는 세계적인 시류에 잘 올라탄 덕분도 있다. 하지만 코로나라는 미술관으로서는 비극적 상황에서도 그것을 전화위복으로 삼았다. 이러한 길흉화복의 상황에서 최대치의 업적을 이끌어 낸 것은 관장 개인의 치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후대를 위한 모범 사례로 기록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쿨투라》 2024년 3월호(통권 11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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