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호 감독] ‘늘 청년’ 이장호
[이장호 감독] ‘늘 청년’ 이장호
  • 이무영(영화감독)
  • 승인 2024.03.2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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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우연히 어느 화가의 전시회장에서 오랜만에 ‘늘 청년’ 이장호 감독을 만나 둘만의 자리를 가졌다. 막걸리 한 병 비웠을 즈음 그가 느닷없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한 마딜 던졌다.

“나는 지금 인생이 끝나도 여한이 없다. 아무런 미련이 없어. 돌아보면 마냥 즐거운 인생이었다.”

아, 어찌 이런 심각한 말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툭 내뱉는 인간 이장호를 사랑하지 않으랴! 나이가 들수록 더 가지려 아등바등하고, 조금이라도 더 살려 발버둥치는 게 대부분 인간의 본성일 텐데, 삶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듯 보이는 모습은 이제 막 환갑에 접어든 나를 꽤나 민망하게 만들었다. 곧바로 나는 자신 없는 심정으로 대꾸했다.

“저는 지금 하신 말씀의 경지에는 못 올랐지만, 추후 지금 감독님 나이와 비슷해질 즈음에는 그렇게 닮아있도록 애쓰겠습니다.”

내가 그토록 닮고 싶은 이장호 감독인데 정작 언제, 어디서 처음 만났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나와 그의 중간 또래 선배 몇몇과의 인연으로 비롯된 걸로 희미하게 기억할 뿐이다. 그러나 언제 ‘늘 청년’으로서 그의 존재가 내 마음에 확실히 각인됐는지, 그 순간만큼은 확실히 기억한다.

“위대한 예술은 존중하나 예술가를 숭배하진 않는다.”는 모토로 살아온 나에게 영화 〈별들의 고향〉이나 〈바람 불어 좋은 날〉,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등은 불멸의 걸작들이었으나 정작 이장호 감독은 그저 선배 몇몇과 친한 유명인이었을 뿐이다.

그런 나로 하여금 이장호를 ‘늘 청년’이라 일컫게 된 계기는 영화 〈시선〉 제작을 목전에 둔 어느 시점에서의 미팅이었다. 그가 나에게 시나리오에 대한 조언을 청했는데, 그게 어떤 계기로 이루어졌는지는 잘 모른다. 어쨌든 그 자리에서 ‘싸가지 없는 솔직함’이 ‘위선으로 포장한 사탕발림’보다 옳다는 생각에 가감 없이 시나리오에 대한 내 의견을 쏟아냈다.

시나리오에 대한 신랄한 주장을 내뱉으며, 대한민국 영화역사를 대표하는 이 유명영화인이 무척 언짢을 수도 있겠다는 나의 생각은 곧 기우로 판명 났다. 이장호 감독은 내 말 대부분에 동의했고, 제시한 수정방향도 대폭 수용하겠노라고 했다.

자신에 비해 경력도 일천하고 영화적 성공과도 거리가 먼 후배의 말에 귀 기울이고, 또 이를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까지 갖춘 이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그날 이후 나는 영화인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이장호의 추종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인간 이장호는 이런 사람이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사람이 아니라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웅크린 채 눈을 부릅뜬 누군가를 주목할 줄 아는 사람이다.

바보 선언 이장호 감독
〈바보 선언〉 이장호 감독

 

 

본 기사의 전문은 추후 공개됩니다.

 


이무영 대중음악평론가,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소설가, 방송인, 대학 교수 등 각기 다른 분야의 어떤 타이틀을 붙여도 충분히 설명이 되는 아티스트다. 어느 시점부터 영화인으로서의 존재감이 더 부각되기 시작한 이무영은, 시나리오 작가로 〈본투킬〉,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 〈소년, 천국에 가다〉 등의 시나리오를 썼고, 연극 〈선데이 서울〉의 각본을 쓰기도 했다. 영화감독으로 〈휴머니스트〉,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아버지와 마리와 나〉, 〈저스트 키딩〉, 〈한강블루스〉를 만들었다. 영화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으로 동서대 임권택영화예술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영화를 가르치고 있다.

 

* 《쿨투라》 2024년 4월호(통권 11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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