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디카시] 김종회 시인의 「휘장」 외 4편
[신작 디카시] 김종회 시인의 「휘장」 외 4편
  • 김종회(문학평론가, 한국디카시인협회 회장)
  • 승인 2024.04.01 17: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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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장

애리조나 앤텔롭캐년
사암과 물과 빛의 조화
천고의 세월을 기다려
여기 휘장을 열었네

 

 

불꽃

동굴 끝 햇빛은 불타는 날개
이 질곡 벗어나면 창공이리니
오르막 힘들어도 마침내 갈 길

 

 

짐승들

지저地底에 웅크린 짐승의 형상
오랜 갈구와 욕망에 주린 영혼
내 안에는 저 절박한 모습 없을까

 

 

날개

모래바위 적층이 쌓아온 광휘
어둠을 타고 넘는 천사의 날개
내 작은 소망도 거기 함께 싣고자

 

 

격류

빛의 흐름이 이토록 격렬하다니!
암반의 표정에도 휘몰이가 있었네
저 높은 곳을 향한 내면의 열정

 

 


시작노트

별유천지 빛의 화가

 

지난 3월 초, 미국 LA의 문인 몇 분과 함께 애리조나 주 페이지 시市 외곽에 있는 엔텔롭캐년을 다녀왔다. 콜로라도 강의 상·하류 위치에 따라 어퍼Upper, 로워Lower, 엑스 등 세 지역으로 나뉘어 있고, 모두 인간 세상에서 보기 드문 절경을 자랑한다.

전 세계 사진작가들이 꼭 가보고 싶어 하는 로망의 장소이자, 미국인들도 쉽게 가지 못해 버킷리스트에 올려두는 곳이라 들었다. 수천 년에 걸쳐 빗물이 사암砂巖의 협로에 동굴을 만들고, 여기에 태양광이 스며들어 형형색색의 신비로운 풍경을 연출한다. 디카시인으로서 그야말로 별유천지를 다녀온 행운을 누렸다.

나는 이 동굴과 그 주변을 탐사하면서 백 장이 넘는 사진을 찍고 12편의 디카시를 썼다. 이 가운데 다섯 편을 골라 여기에 공유한다.

「휘장」은 동굴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이다. 이 기묘한 세계에 입장하는 것이 하나의 축복이요 인생극장의 세리머니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암청색 암벽이 무슨 휘장을 걷어준 것 같이 보였다.

「불꽃」은 천장으로 보이는 하늘이 백색인데 비해, 주광晝光의 반사가 용광로의 불꽃처럼 강렬하게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만약 이 곳이 인생행로의 험지라면, 힘이 들어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야 할 판이었다.

「짐승들」은 어퍼 캐년 중간 어름에서 만난 풍경이다. 어쩌면 맹수 두 마리가 엉켜서 으르릉거리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그야말로 지저地底를 상징하는 듯했다. 문득 되돌아보았다. 내 안에도 저런 형용의 갈구가 있을 터였다.

「날개」는 오랜 세월에 단련되고 또 곱게 마모되어 날개의 형상을 얻은 바위다. 나는 그 앞에 뒷짐을 지고 서서, 짐짓 천사의 흉내를 내보았다.

「격류」는 동굴 속을 휘돌아 흐르는 빛의 격한 율동을 카메라에 담았다. 우리 가락으로 비유하자면 휘모리장단이었다. 어느 예술인들 이와 같은 내면의 열정이 없고서는 촌보寸步의 성취도 이루기 어려울 것이다.

 

 


김종회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6년 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중국 연변대학교 객좌교수이다. 1988년 《문학사상》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문단에 나온 이래 활발한 비평 활동을 해 왔으며 《문학사상》 《문학수첩》 《21세기문학》 《한국문학평론》 등 여러 문예지의 편집위원 및 주간을 맡아 왔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한국비평문학회, 국제한인문학회, 박경리 토지학회,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한국아동문학연구센터 등 여러 협회 및 학회의 회장을 지냈다. 현재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 이병주기념사업회 공동대표, 한국디카시인협회 회장, 한국디지털문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김환태평론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편운문학상, 유심작품상 등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문학과 예술혼』 『문학의 거울과 저울』 『영혼의 숨겨진 보화』 등의 평론집,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 등의 저서, 『삶과 문학의 경계를 걷다』 등의 산문집이 있다. 그리고 『어떤 실루엣』 『눈꽃나무』 『징검다리』 등 3권의 디카시집이 있다.

 

* 《쿨투라》 2024년 4월호(통권 11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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