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피렌체한국영화제] 피렌체를 수놓은 작지만 알찬 ‘한국’ 영화제: 이병헌 회고전부터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거미집〉, 〈잠〉까지
[제22회 피렌체한국영화제] 피렌체를 수놓은 작지만 알찬 ‘한국’ 영화제: 이병헌 회고전부터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거미집〉, 〈잠〉까지
  • 전찬일(영화비평가)
  • 승인 2024.04.03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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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한국영화제Florence Korea Film Fest; FKFF는 한국 최대 인터넷 포털 사이트인 네이버에 다음과 같이 소개돼 있다. “다양한 장르의 한국영화를 이탈리아에 소개하는 영화제로, 한국과 이탈리아 문화교류의 장을 만들어 주고 있다.”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짤막하긴 해도 더할 나위 없이 적확한 소개다. 지난 2011년과 2012년에는 부산국제영화제BIFF 한국영화 담당 프로그래머로, 올해는 전문위원으로 영화제를 찾은 전문가로서 단언컨대 FKFF는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FKFF는 1996년 BIFF 출범 이후 우리 영화의 국제적 위상이 서서히 높아지고 있던 2003년,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비롯해 김지운의 〈장화, 홍련〉, 김기덕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박찬욱의 〈올드 보이〉, 그리고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천만영화인 강우석의 〈실미도〉 등 한국영화사를 빛낸 숱한 문제적 수·걸작들이 대거 개봉되며 그야말로 ‘한국영화의 빅뱅’이 일어났던 바로 그해 전격 첫발을 내디뎠다. 한국영화만을 선보이는 영화제로선 세계 처음이었다. 그 역사적 막을 올린 이래 22회를 맞은 올해까지, 명실상부하게 이탈리아 전역의 한국영화 팬들이 기다리는 문화 축제이자 나아가 한국문화를 알리는 가장 중요한 행사로 자리잡아왔다.

개막작 상영 전 엄태화 감독이 무대인사를 하고 있다. 우측 남자는 리카르도 젤리 집행위원장.
개막작 상영 전 엄태화 감독이 무대인사를 하고 있다. 우측 남자는 리카르도 젤리 집행위원장.

올 FKFF는 3월 21일(현지 시간 기준) 개막해, 30일 폐막한다. 개막작은 《쿨투라》 선정 2023년의 베스트 한국영화 〈콘트리트 유토피아〉(엄태화), 폐막작은 故 이선균의 유작이어서 더 유의미하게 다가서는 〈잠〉(유재선)이다. 이 두 수작 포함 총 30편의 장편 영화들과, 올해 신설된 ‘중앙대학교 단편 섹션’에서 선보인 첨단영상대학원 재학생들이 만든 18편 등 56편의 단편 영화들이 상영된다. 상영작들 가운데 한 편이 유난히 더 큰 눈길을 끈다. 2023년 76회 칸영화제 비경쟁 심야 상영 부문에서 월드 프리미어된, 김태곤 감독의 〈탈출: PROJECT SILENCE〉(이하 〈탈출〉)다. 물론 그 연유는 이선균의 또 다른 주연작이어서다. 영화는 마스터클래스의 주인공들로 피렌체를 찾은 두 스페셜 게스트 김지운 감독과 송강호 주연의 〈거미집〉 등 총 11편이 선보인 코리안 호라이즌에서 관객들과 조우했다.

〈탈출〉은 붕괴 직전의 공항대교에 고립된 사람들이 한치 앞도 구분할 수 없는 짙은 안개 안에 도사리고 있는 예기치 못한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같은 그 재난성 휴먼드라마에서 이선균은, 공항에 딸(김수안 분)을 배웅하다 공항대교에 갇히는 청와대 행정관 차정원으로 분해, 특유의 섬세함과 활력으로 그다지 내세울 것 없는 영화를 일정 정도 ‘구원’하는 역할을 한다. 인생의 대박을 노리는 렉카 기사 조박(주지훈 분)과 ‘프로젝트 사일런스’ 책임 연구원 양 박사(김희원 분) 등과 함께….

이 영화, 언제 국내 개봉할지 여부는 미정이다. 전문위원으로서 제작자 김용화—그의 연출작 〈더 문〉도 같은 섹션에 초청됐다—에게 연락해 상영을 요청했으나 긍정적 답변을 받지 못했던 터라, FKFF 상영작 목록에서 〈탈출〉을 발견하고 얼마나 놀라고 반가웠는지 모른다. 역시 개봉이 불투명한 〈행복의 나라〉(추창민)도 그렇고, 안타깝게도 사회적 타살이라 평해야 마땅한 극단적 선택으로 저세상 사람이 된 이선균의 연기 세계를 먼저 맛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한데 어떻게 이 영화가 국내외 굴지의 영화제도 아니고 FKFF 같은 ‘알차지만 작은 영화제’에게 선보일 수 있게 된 것일까.

장은영 부위원장의 전언에 따르면, 적잖은 다른 장편들도 그렇지만 〈탈출〉을 수입한 이탈리아 배급사가 그 기대작을 흔쾌히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 덕에 〈잠〉과 더불어 이선균 주연작을 두 편이나 공식 상영하면서, 〈탈출〉로 일종의 프리미어 효과까지 거둘 수 있게 되는 행운을 잡게 된 것이다. 아울러 감독이 참석한 가운데, 폐막작 상영에 앞서 이선균을 추모하는 영상이 상영된단다.

일찍이 다른 지면에 보도자료 전문을 필자의 이름으로 전했듯, 한국영상자료원의 전폭적인 협력으로 이탈리아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1960년대의 주옥같은 한국 고전영화 5편도 각별한 주목을 끌기 모자람 없다.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을 필두로 신상옥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이만희의 〈마의 계단〉(1964), 김기덕의 〈남과 북〉(1965), 그리고 김수용의 〈안개〉(1967)가 그 주인공들이다. 이 보석들에 각별한 관심이 쏠리는 까닭은, 전문위원으로서 필자가 (리카르도 젤리 집행위원장과 함께) 선택해서이기도 하다. 참고삼아 밝히면,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가 포함되지 않은 것은 이미 수차례나 선보여서다.

그렇다면 이탈리아 관객들 및 영화 전문가들은 저들 흑백의 1960년대 영화들에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23일 밤, 예정보다 30분쯤 늦은 11시경부터 선보인 〈마의 계단〉 상영 때의 광경이 그 반응을 적절히 제시한다. 그 열기는 그 어느 현대물 못잖았다. 늦은 시간대이거늘, 족히 50명은 넘었을 적잖은 이들이 끝까지 상영장을 지키는 게 아닌가!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작품상, 감독상 등 4관왕을 거머쥐면서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역설했던 ‘자막’이라는 1인치 장벽을 훌쩍 뛰어넘어 영화를, 그것도 수십 년 전의 흑백 타국 영화를 즐기는 아름다운 진풍경이었다.

필자는 26일, ‘인플루언서’라는 이탈리아의 젊은 평론가 등과 같이 마스터클래스를 펼쳤다. ‘1960년대, 한국영화의 경이로운 10년The Wonderful Decade of Korean Cinema: The 60s’이라는 제목으로였다. 관련해 필자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전형과 일탈 사이’라는 제하의 총론을 작성해 보냈다. “아무리 엄격하게 보더라도, 그 통설에는 별다른 문제 제기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산업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거의 모든 지표에서 그 진단은 합당하다.”면서.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1960년대의 역사적 호황은 1955년부터 59년까지 중흥기의 ‘연장extension’이었다는 사실이다.”면서…

지면 제약 상 상술하진 않겠으나, 필자가 참여한 마스터클래스는 FKFF 역사에서 여러모로 의미 깊은 기념비적 프로그램이었다. 내 이름을 내걸어서는 아니다. FKFF를 찾았던 한국 비평가로는 처음으로, 송강호-김지운(22일)이나 회고전의 주인공 이병헌(28일) 같은 별들과 나란히 마스터클래스라는 육중한 프로그램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이번 비평가 마스터클래스가 단발성으로 종결될지, 내년과 그 이후로도 지속될지는 두고 봐야 한다. 지속될 경우, 필자가 또 하게 될지 아니면 또 다른 비평가가 하게 될지 등도 지켜봐야 한다. 하지만 평론의 무용성을 넘어 심심치 않게 그 사망마저 회자되고 있는 마당에, 올 FKFF가 비평가에게 스타 배우 및 감독에게나 열어줬던 마스터클래스의 문을 개방했다는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래저래 FKFF는 규모나 예산 등의 한계를 극복하는 선구적 영화제로 손색없는 셈이다.

송강호-김지운의 마스터 클래스의 한 장면.
송강호-김지운의 마스터 클래스의 한 장면.

영화 평론(가)의 역할과 관련, 송-김 마스터클래스에서는 한바탕 해프닝(?)이 있었다. 필자는 행사 시작 전 송강호와 김지운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시종 그 현장을 지켰다. 김지운은 평론가의 오해, 무시, 왜곡 등으로 인해 때론 섭섭하긴 해도 만약 평론가가 없었다면, 감독으로서 좀 더 외로웠을 것이라고, 요즈음의 한국 영화평론계가 워낙 무뎌져 예전처럼 치열하게 치고받고 싸우던 시절이 그립다고, 들려줬다. 과연 김지운다운 답변이었다. 고백건대 필자는 단 한 번도 김지운을 향해 독설을 날리기는커녕 이렇다 할 비판을 가한 적조차 없다. 〈조용한 가족〉(1998)으로 장편 데뷔를 하기 수년 전, 백수 시절부터 알고 지내온 사적 인연을 넘어 그의 영화 세계를 그 누구 못잖게 잘 이해하고 좋아해 왔기 때문이다. 가령 흥행 참패작 〈거미집〉은 말할 것 없고 그의 대표작들인 〈반칙왕〉(2000), 〈장화, 홍련〉(2003), 〈달콤한 인생〉(2005), 〈악마를 보았다〉(2010) 등에 열광해왔고, 심지어 졸작이라는 〈인랑〉(2018)에도 관대한 입장을 취해왔다. 그러니 김지운 그에게 전찬일은 평론가로 각인돼 있지 않을 법도 했다.

송강호와 필자. 가운데는 알베르도 알베세티라는 이름의 와이너리 오너.
송강호와 필자. 가운데는 알베르도 알베세티라는 이름의 와이너리 오너.

해프닝은 송강호에게서 비롯됐다. “평론가에게 관심이 없어서….”로 일축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는 듯했다. 한데 갑자기, 필자가 현장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했는지, “전찬일 선생님, 계시죠?” 하면서 내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닌가. 입장을 갑자기 바꾸면서, “평론에 관심이 많다고 얼버무리면서….” 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좌석에서 일어나 어정쩡한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한바탕 웃음이 장내를 채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올해 회고전의 주인공인 이병헌과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왼쪽부터 장은영 부위원장과 리카르도 젤리 집행위원장, 이병헌.
올해 회고전의 주인공인 이병헌과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왼쪽부터 장은영 부위원장과 리카르도 젤리 집행위원장, 이병헌.

이병헌은 27일 새벽 가족과 같이 피렌체에 도착하고, 필자는 27일 낮 피렌체를 떠나는 바람에 애당초의 계획과는 달리 그를 직접 만나긴 무리였다. 개막작과 6편의 회고전 주인공인 그가 어떤 마스터클래스를 펼칠지는 목격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단언컨대 올 FKFF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갈 것이 확실하다. 개막작의 주인공 엄태화 감독과, 송강호-김지운 콤비가 일으킨 열광 이상으로….

이밖에도 올 FKFF에 대해 할 말은 차고도 넘친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를 노려야겠다. 이 정도면 2024 FKFF의 현장 분위기를 전하는 데는 충분하다고 여겨져서다.

 

 


전찬일 영화비평가, 본지 편집기획위원, 경기영상위원회 위원장, 부산콘텐츠마켓 전문위원. 팟캐스트 〈매불쇼〉 ‘씨네마지옥’ 코너에 5년 째 고정 출연 중이다. 저서로 유튜버 평론가 라이너와의 대담집 『10개의 시점으로 보는 영화감상법』(2024), 『봉준호 장르가 된 감독』(2020) 등이 있다.

 

* 《쿨투라》 2024년 4월호(통권 11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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