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하나님이 너 때리래
[드라마 월평] 하나님이 너 때리래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 승인 2019.06.01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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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착한 사람이야?” 엄마가 옆에 앉으며 물었다. 매일 새벽예배 때문에 밤 열 시가 넘으면 세상에서 제일 피곤한, 아니 은혜로운 얼굴로 잠자리에 드는 착한 엄마였다. 응? 착한 사람? 배우 김남길에게 매혹되어 아무 생각 없이 드라마에 몰입하고 있던 나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지. 지금 저렇게 절제된 몸놀림으로 상대 연기자를 두들겨 패고 있는 사람은 구담성당의 김해일 신부님이었지. 아, 그렇지. 바람에 휘날리는 지금 저 섹시한 검은 옷은 가죽점퍼가 아니라 신부님들이 입는 사제복이었지.

  감히 말하건대, ‘김해일 신부’는 한국드라마 역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캐릭터다. 일요일 오전에 예배 대신 <동물농장>을 보는 나 같은 탕자가 성당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 보면 그는 대중의 눈은 물론이고 마음까지 사로잡는 마성의 남자임이 분명하다. 20%대의 높은 시청률은 이러한 열광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준다. 지상파 드라마가 시청률의 늪에 빠져 사경을 헤매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열혈사제>의 인기는 바다를 가르는 홍해의 기적에 버금간다고 해도 무방하다. 심지어 MBC는 10시 월화 미니시리즈를 없앤다고 발표하지 않았던가. 이쯤에서 우리는 물불 안 가리고 거침없이 분노하는 ‘열혈사제’에게 왜 그토록 열광하는 건지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억울한 것도 많고, 한스러운 것도 많고, 그렇게 우리 속에 쌓인 게 많았던가. 불같이 화를 내는 것도 모자라 주먹이 먼저 앞서는 열혈사제에게 대리만족을 느끼는 건가. 드라마 흥행에 힘입어 편성된 특집 방송의 타이틀이 <우리는 열혈사이다>라는 것에서 이미 우리가 찾고자 하는 답이 다 나온 건 아닌가. 답답한 ‘고구마’가 아니라 톡 쏘는 시원한 ‘사이다’. 그런 건가.

  올해 개봉한 영화 <어벤져스 : 엔드게임>이 온갖 영웅들을 다 모아놓은 역대급 최고의 선善이라고들 하는데, <열혈사제>는 온갖 종류의 나쁜 놈들을 집합시켜 놓은 최고의 악惡이다. 우선, 분야별로 하나씩 악당이 있다. 경찰, 검찰, 정치인, 공무원. 여기까지는 여느 드라마에서 흔히 보아왔던 조합이다. <열혈사제>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악행을 깔끔히 뒤처리해줄 ‘나쁜 놈’ 까지 분야별로 준비해놓았다. 조폭 보스 황철범이 살인, 협박, 감금 등 불법적인 방법으로 거칠게 은폐한다면 서울중앙지검 특수팀 박경선 검사는 언론플레이와 공권력을 활용해 합법적으로 우아하게 정돈한다.

ⓒSBS

  아, 지나치게 영리하고 똑똑한 그대의 이름은 악惡이여! 선과 악의 전쟁 이야기인 페르시아 신화 『샤나메』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아리만은 매우 오랫동안 이란에서 자신이 무력했던 것에 화가 났다.” 아리만은 악마인데, 매우 적극적으로 사람들이 교만하도록 부추기며 돌아다닌다. 교만해진 사람들이 그릇된 행동을 하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악마의 열정 덕분에(?) 『샤나메』에 등장하는 왕들은 수도 없이 나라를 말아먹고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1%의 재능과 99%의 노력으로 성공이 완성된다고 했던가. 자기 전에 하루 일과를 반성하며 오답노트까지 작성하는, 지나치게 성실하고 머리 좋은 악마를 이길 자가 누구겠는가.

  그런데 악마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동안 천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샤나메』에서 천사는 인간이 곤경에 처했을 때 간혹 나타나 도움을 주긴 하는데, 대체로 문제가 발생하고 나서 뒤늦게 등장해 구슬프게 통곡하곤 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라는 성경 말씀처럼 천사는 한결같이 온유하고 자비로운 모습으로 우리 곁을 지킨다. ‘지킨다’ 보다는 같이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샤나메나 성경이나 오십보백보다.

  <열혈사제>의 나쁜 놈들은 그런 착하디착한 우리의 선善을, 아니 김해일 신부를 비웃고 조롱한다. ‘사랑’으로서 악을 용서하라고, 폭력은 나쁜 놈의 전유물이니 불의를 보고도 ‘오래 참음’으로 절제하라고. ‘구담구 카르텔’에 맞서 싸우는 김해일 신부의 발목을 잡는 것도 악당들의 사악한 권모술수가 아니라 사제인 그를 향한 사람들의 편견과 고정관념이다. 신부가 왜 저래.

  이 지점에서 영화 <미션>(1986)의 서로 다른 삶의 철학을 가졌던 두 신부님이 떠오르지 않는가. 원주민 과라니족의 마을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무력으로 맞선 멘도자 신부와 십자가를 지고 죽음으로 맞선 가브리엘 신부. 과연 어느 길이 진정한 선인가. 영화가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정서적 울림을 주는 이러한 철학적 메시지 때문일 것이다. 물론 영화 OST <가브리엘의 오보에>를 듣는 순간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느낌이지만. 그런데 요즘 그 질문이 잘못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고작 몇천 원짜리 아이스크림을 고를 때도 31가지 맛 메뉴판이 필요한데, 이렇게 중요한 문젤 가지고 고작 둘 중 하나를 고르라니.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SBS

  자, 우리가 알고 있는 착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보자. 음, 너새니얼 호손의 ‘큰 바위 얼굴’처럼 인자한 미소가 떠오르지 않는가. 그렇다면 악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보자. 음, 음, 착한 사람에 비해 시간이 조금 더 걸릴것이다. 악은 버럭 화를 내기도 하고 속마음을 숨긴 채 활짝 웃기도 한다. 악은 화려한 외모로 우리를 현혹하기도 하고 허름한 옷 차림을 한 채 조용히 다가와 우리 목을 인정사정없이 조르기도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악은 꽤 구체적이고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 가령, 『샤나메』에는 나른한 오후에 낮잠을 자는 악마의 사소한 습관까지 적혀 있다.

  그런데 선은, 너무 추상적이고 단편적이다. 인자한 미소라니. 우리의 가난한 상상력 때문에 선이 가진 무한한 생명력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다. 가브리엘 신부만 선이 아니라 멘도자 신부 역시 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선 또한 다양한 얼굴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래 간과해왔다. 그건 마치 신을 절대적인 자리에 올려놓고 나와는 다른 사람으로 거리두기한 것과 같다. 저 멀리 높은 곳에 매달린 십자가처럼 선은 내가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이다.

  죄책감이랄까, 죄의식이랄까, 혹은 원죄랄까. 아니,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외로움’이다. 절대 善의 세상에 속하지 못한 자에게 주홍글씨처럼 새겨진 지독한 외로움. 그래서였다. 분노조절장애와 알코올의존증이 의심되는, 어딘가 모르게 허점 많은 <열혈사제>의 김해일 신부는 대리만족이나 카타르시스를 넘어선 그 무언가를 우리에게 선사해준다. 그것은 위로일 수도 있고 희망일 수도 있다. 『샤나메』를 읽다 보면 신기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역대 가장 존경받는 왕 카이코로스가 ‘악’ 인 아리만 일족의 후손이라는 사실이다. 도대체 누가 선 이고 누가 악이란 말인가. 조로아스터교 최고의 신 ‘아후라 마즈다’는 선과 악이 모두 공존하는 신이다. 어쩌면 우리가 기다려온 신은 선과 악 사이에 서 있는 김해일 신부, 그러니까 뜨거운 체온의 인간적인 신은 아니었을까. 

  김해일 신부와 함께 악의 무리를 무찌르는 다른 캐릭터들 역시 비슷하다. 다들 흑역사가 있다. 상관의 명령으로 열한 명의 아이들을 죽인 전직 국정원 출신 김해일 신부를 시작으로 도박으로 인해 남동생을 잃은 타짜 ‘수녀’와 어린 시절의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부패한 권력에 빌붙었던 부패 ‘검사’, 그리고 동료의 죽음 이후 조폭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무능한 ‘형사’까지. 그렇다. 선은 완벽하지 않다. 악처럼 성실하지도 않고 영리하지도 않다. 선은 평범한 우리의 얼굴을 하고 있다.

ⓒSBS

  어린 시절 성경을 읽을 때 존경할 만한 위인들인 줄 알았던 성경 속 인물들이 알고 보면 그저 그런 사람들처럼 불륜, 사기, 절도 등등 온갖 부도덕한 일들을 저질렀고, 그런 그들을 제자로 삼아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후대에 전하게 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때 가졌던 의구심에 대한 답이 안에 담겨 있다는 걸 요즘 새삼 깨닫는 중이다. 이것도 선이고 저것도 선이고 모두 다 선이로구나. 아, 신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

  <열혈사제>가 죽음에서 구원해낸 것은 비단 지상파 드라마뿐만이 아니다. 점점 신자가 줄어드는 종교계는 물론이고 점점 암흑으로 침잠해가는 우리의 영혼이 그의 뜨거운 손에 이끌려 부활하고 있지 않은가. 김해일 신부는 그토록 우리가 기다리던 그 메시아일지 모른다. 김남길, 아니 김해일 신부님 사랑해요.

 

 

 

* 《쿨투라》 2019년 6월호(통권 6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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