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문학] 쓰는 힘과 읽는 힘, 그리고 보는 힘
[K-문학] 쓰는 힘과 읽는 힘, 그리고 보는 힘
  • 김준철(시인, 본지 편집위원)
  • 승인 2019.06.01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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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러리 걸 - 러스킨 그룹 극장

  오늘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두 여자 때문이다. 한명은 지난달에 인터뷰한 수잔 루미스이고 또 한 사람은 쿨투라에서 몇 번 언급하기도 했던 타냐 홍 시인이다.

  산타모니카 공항 옆에 위치한 러스킨그룹극장은 1986년부터 연기학교로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앤서니 홉킨스, 에드 애스너, 딜런 맥더모트, 그리고 다른 많은 유명한 배우들과 감독들이 러스킨 스쿨에서 다른 선생들과 함께 연기를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학교에 부속으로 연결된 이 소극장에서 10년 전부터 문학 낭송모임을 해오고 있는데 그 낭송회에 초대를 받았다. 낭송회의 이름은 라이브러리 걸, 호스트는 수잔 헤이든이다. 이번 낭송회가 115회째이며 지금까지 모든 티켓 수입은 이 소극장에 기부하고 있다고 한다. 115회 이번 낭송회의 제목은 <Kiss Me, You Criminal!>로 수잔 루미스의 느와르 시를 중심으로 타냐 홍을 비롯한 게스트들이 참여했다.

  공연 시간보다 30분쯤 일찍 도착했다. 소극장 대기실은 이미 많은 관객으로 웅성이고 있다. 와인과 치즈, 비스켓을 나누고 있는 이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공연의 팬들인 듯 싶었다. 잠시 후, 입장을 시작했고 무대 안쪽 타냐 홍과 수잔 루미스가 반겨준다. 지금부터는 이번 낭송회의 흐름을 따라 소개해 보기로 한다.

  아직 관객들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잔 헤이든이 앞으로 나온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관객과 대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곧 관객석에서 수잔 루미스를 찾고 무대 위로 부른다. 두 여인은 약속도 없이, 순서도 없이 카페에서 수다를 떨 듯 대화를 이어간다. 느와르 시에 대해, 자신들의 인연에 대해, 오늘의 날씨에 대해, 객석에서 아는 사람을 찾고는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관객 역시 스스럼없이 대화에 끼어들고 웃으며 자연스럽게 낭송회는 시작되고 있었다.

  첫 게스트는 Mason Summit으로 20대 중반을 갓 넘긴 젊은 가수다. 진보적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은 자신을 설명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느와르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싶더니 곧 기타를 들고 자작곡을 연주하며 부른다. 기타 줄의 작은 스크래치 하나까지도 전해지는 무대였다.

  첫 낭송자는 Dale Raoul, 그녀는 배우다. <The Mexican>과 <Seven Pounds>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했다. 수잔 루미스의 작품을 낭송한 그녀는 호흡과 감정, 행간의 느낌까지 고스란히 전해주는 것 같았다. 낭송은 대화같이 이어졌고 관객도 중간 중간 크고 작은 웃음과 박수, 탄성으로 어우러졌다. 흡사 토크쇼를 보는 것 같았다.

  다음 낭송자로는 UCLA에서 시 창작을 가르치는 Rick Bursky가 나왔다. 자작시를 낭송하며 자신의 글에 추임새를 넣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무거운 분위기를 편안함과 친절함으로 청중에게 전달했다. 뒤이어 <The Manchurian Candidate>등의 여러 영화에 출연했던 Darrell Larson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느와르 영화 시나리오를 여러 번 연결하여 춤과 노래를 펼치며 자유로운 낭송으로 박수를 받았다.

  이제 타냐 홍 시인이 나온다. 이번 행사의 유일한 한국작가로 초대된 그녀는 조금 긴장한 모습이었지만 그녀 특유의 당당함으로 무대 중앙에 섰다. 그녀는 총 4편의 자작시를 낭송했다. 그 중 한편은 한국어로만 낭송할 것이라고 관객에게 알리며 한국어가 주는 소리의 느낌으로 감상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녀가 한국어로 시를 낭송할 때였다. 관객들은 정말 한국어를 이해하는 듯 진지하게 그녀의 낭송을 경청했다. 글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소리의 파장으로 의미를 전달하려는 시인의 시도가 신선하고 의미 있게 느 껴졌다. 그런 그녀의 생각은 그녀가 낭송한 ‘양공주’, ‘보고 싶어’ 등 그녀가 낭송한 다른 작품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제목 자체를 한국어로 써서 의미를 전달하려는 노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어서 80년대 미국 그룹인 ‘The Bangles’의 베이스 기타리스트였던 Nannette Zilinskas가 나왔다. 생각보다 많이 긴장한 모습이었지만 무리 없이 편안하게 낭송을 마쳤다. 다음은 배우이자 디렉터이고 작가이기도 한 Tony Abatemarco. 그는 영화 <I Am Sam>, <Clockstppers> 등에 다수에 출연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작품을 낭송하는 모습이 마치 모노드라마를 보는 듯 관객을 압도했다.

  에세이 작가로 활동하는 Erika Schickel은 현재 자신이 쓰고 있는 자서전의 내용 중에 결혼했을 때 자신이 다른 작가와 불륜을 했던 이야기를 대담하게 낭송했다. 그런 당당함이 묻어나는 선명하고 큰 목소리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풍성한 음성과 감정은 깊은 높낮이로 듣는 내내 집중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수잔 루미스가 다시 나왔다. 힘을 빼고 읊조리는 그녀의 낭송은 다시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정확히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묘사할지 알고 있었다.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 그녀의 입에서 시가 흘러 나왔다.

  대체로 나이가 많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던 낭송회였다. 하지만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되돌아가보면 그리 늙지 않은 시간부터 인연을 이어왔던 것이다. 참석했던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수잔 헤이든과 라이브러리 걸을 사랑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라이브러리 걸을 지켜보며 너무나 부럽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여러 직업군이 나와 낭송을 했고, 하나같이 풍부한 감정과 전달력으로 작품을 관객들에게 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관객들의 반응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느와르라는 쉽게 접근하기도 어렵고 무게감 있는 주제였음에도 그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낭송자와 함께 작품을 이끌어 나갔다.

  주고받는 낭송회의 자유로움은 오랜 시간 이들이 단련하고 배워 온 토론 문화의 산물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작품을 구상하고 써내는 힘과 그것을 소리 내어 낭송하는 힘 그리고 결국에 이 모두를 함께 보는 힘이 이 낭송회를 이끄는 것이 아닐까. 또한 그 산물을 깊이 누리는 관객의 힘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포용 속에서 한국어로 들리는 작품조차도 진지하게 몰입하는 그들의 문학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이 새삼 부러워졌다. 끝으로 이날, 유일한 한국작가로 낭송회에 참가한 타냐 홍 시인의 작품을 소개하며 마친다.

 

겨자꽃 질 때

I

노란 택시가
어둠에
선다.

반달을 가리는 먹구름
녹슨 주전자에서
끓는 물소리

페퍼민트
냄새 나는
여자.

창밖의 네온사인
불빛 같은
고양이 눈

천천히,
천천히
읽혀지는 한 줄의 시

벗어지는 그대 옷 위로
떨어지는 
마른 꽃잎

그대 오래된 칫솔로
이를 닦고 
떠나는 여자

II

떠나는 여자
이를 닦고
그대 오래된 칫솔로

마른 꽃잎
떨어지는
벗어지는 그대 옷 위로

읽혀지는 한 줄의 시
천천히
천천히,

고양이 눈
불빛같은
창밖의 네온사인

여자
냄새나는
페퍼민트

끓는 물소리
녹슨 주전자에서
반달을 가리는 먹구름

선다.
어둠에
노란택시가 

 

 

* 《쿨투라》 2019년 6월호(통권 6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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