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에세이] 폴 세잔의 도시, 엑상프로방스
[갤러리 에세이] 폴 세잔의 도시, 엑상프로방스
  • 손정순(시인, 본지 편집인)
  • 승인 2019.07.01 0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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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심장이 뛰는구나! 코트다쥐르

  창밖으로 코트다쥐르의 지중해가 나타났다. 아! 탄성을 내질렀다. 순간 나도 모르게 힘껏 자동차의 브레이크를 밟았다. 뒤따라오는 차가 없었으니 다행이다. 눈부시게 부셔지는 태양과 그 빛을 온전히 받아들인 바다의 반짝거림, 길게 뻗은 야자수 사이로 코발트빛 해변이 차창 스크린으로 스며들었다.

  오! 시간이 되니 심장이 뛰는구나!” 아르튀르 랭보의 절묘한 시구로 시작하는 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 <녹색 광선>(1986)이 떠올랐다. 영화 속 주인공 델핀느의 심경과는 무관하게 마법처럼 펼쳐지는 남프랑스의 지중해와 청명한 하늘, 포도밭과 지평선, 나무와 숲의 초록빛이 내 심장을 뛰게 했다. 정말 해가 질 무렵 하늘과 바다 사이에 잠깐 나타나는 녹색의 띠, “녹색광선”을 보면 “타인의 진심”(쥘 베른의 소설 『녹색광선』)을 읽을 수 있을까?

  아침 8시, 니스에서 출발한 자동차가 2시간 반을 달려 폴 세잔의 도시,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엑스)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영화가 시작되었다.

 

#2. 폴 세잔의 도시, 엑상프로방스

  희끗희끗한 백발의 노부부와 피어싱을 한 대학생들이 테이블이 다닥다닥 놓인 카페테라스에 앉아있다. 커피나 맥주를 마시며 밀어를 속삭이는 그들의 모습이 중세 건물과 어우러져 이국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여유롭고 따스한 기운이 감도는 엑스의 메인 스트리트, 쿠르 미라보Cours Mirabeau의 풍경이다.

  미라보 거리에는 푸른 하늘, 금빛으로 반짝이는 건축 물, 투명한 녹색 분수, 플라타너스 나무, 수백 년을 지켜 온 가로수 길을 따라 레스토랑, 노천카페 등이 펼쳐진다. ‘물의 도시’답게 미라보 거리 끝에 위치한 르네 왕의 분수, 중심에 자리 한 로통드 분수를 비롯한 크고 작은 분수가 뿜어내는 영롱한 물빛들로 엑스의 초여름은 찬란하다.

  미라보 거리에서 약 700m 떨어진 곳에는 세잔의 장례식이 치러진 생 소뵈르SaintSauveur 대성당이 있다. 로마네스크의 둥근 아치와 주랑, 고딕의 수직 첨탑 등 중세 건축의 다양한 양식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18세기 귀족의 저택을 개조한 코몽 아트센터 Caumont Centre d’Art와 태피스트리를 전시한 ‘태피스트리 미술관’과 프랑수아 그라네의 작품과 폴 세잔의 작품들이 전시된 그라네 미술관Le musée Granet, 폴 세잔과 에밀 졸라가 만났다는 미네 학교Collège Mignet가 모두 엑스에 모여 있다.

  세잔과 에밀 졸라가 함께 미술과 문학, 정치와 혁명을 이야기하던 카페 레 되 가르송Les Deus Garçons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신다.

  아를이 고흐의 도시라면 엑스는 단연 ‘근대 회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폴 세잔Paul Cezanne의 도시다. 엑스에서 태어 나 줄곧 고향의 풍광을 화폭에 담은 세잔은 이제 이 도시의 상징이 되었다. 엑스에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세잔 동상과 보도에 ‘C’라고 새겨진 표지판을 따라 걸으면 세잔의 자취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

 

  #3 세잔 아뜰리에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도심에서 엑스 북쪽 언덕길을 올랐다. 엑스의 모든 풍경은 세잔의 캔버스에 담겨 작품이 되었다. 언덕길을 오르니 제법 숨이 차고 땀방울이 맺혔지만 미술관에서 세잔의 몇 작품을 감상하는 것보다 이렇게 그가 그린 화폭 속 풍경을 체험하는 것이 훨씬 실감났다.

  15분 정도 지났을까? ‘아뜰리에 세잔Atelier Cezanne’이라고 새겨진 표지판이 보인다. 아틀리에라는 표지판을 보지 않았으면 자칫 지나칠 정도로 대가의 작업장이라고 보기엔 소박하다. 인디고 핑크로 칠해진 작은 대문 안으로 들어 서자 울창한 정원 속에 아담한 2층 주택이 나타났다. 순간 풀냄새, 나무냄새가 진동했다. 얼마만에 맡아보는 자연 의 냄새, 유년의 냄새인가. 세잔에게 아름드리 꽃나무가 숲을 이루는 이곳은 도시를 조망하며 한가롭게 그림을 그리기에는 안성맞춤이었으리라.

  은행가가 되길 원했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화가의 길을 선택한 그의 젊은 시절은 궁핍했다. 혹여 아버지의 심기를 해칠까, 아버지로부터 생활비가 끊길까, 늘 전전긍긍했다. 이 아뜰리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상속받은 유산으로 세잔이 직접 설계한 건물이다. 그는 파리에서 돌아온 1901년부터 1906년 세상을 뜰 때까지 5년간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다.

  1층에는 관람객을 위한 아트숍과 세잔의 그림 일생을 해설해주는 상영실이 있으며,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밟고 2층에 오르면 세잔의 자취가 15평 남짓의 공간에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다. 2층으로 올라가자 창문으로 프로방스의 따사로운 햇빛과 푸른 나무들이 방안 깊숙이 들어왔다. 아뜰리에는 세잔이 직접 그린 설계도에 따라 북쪽에 벽면전체에 해당하는 커다란 유리창을 설치했고, 바로 옆은 1894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대작 <목욕하는 여인들>의 캔버스를 들여놓기 위해 상하로 길고 좁은 통로를 만들어 문을 달았다. 여기다 남쪽으로 두 개의 창문을 더 내어 자연광이 실내에 일정하게 들어오도록 유도했다.

  이젤과 대형 사다리를 비롯하여 세잔이 정물의 대상으로 삼았던 과일과 갖가지 소품들을 바라보노라면, 왠지 잠시 외출한 그가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것만 같았다. 모서리에는 그가 입었던 물감 묻은 작업복과 모자, 외투가 걸려 있으며, 화구가 담긴 가방, 토끼 물병, 유리잔, 술 병, 큐피드 석고상, 세 개의 두개골, 화병 등 세잔의 생전 작업실의 흔적을 그대로 재현해놓았다.

  세잔의 <사과와 오렌지>는 저렇게 각도를 두고 작업했겠구나, 추운 날씨에 그림 그리다 손끝이 시리면 세잔은 저 난롯가에 앉아 언 손을 녹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련해진다.

  관람객을 위한 영어가이드는 정말 사명감이 깊었다. 순간순간 들리지도 해석되지도 않고 날아가는 단어도 많았지만 파블로 피카소가 얼마나 세잔을 흠모하고 영향을 받았는지 그의 열정적인 설명과 제스처를 통해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예로 피카소의 대표작이자 큐비즘의 전조를 보인 <아비뇽의 처녀들>이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모방했는지를 일일이 그림을 대조하며 설명했다. 나는 외국어에 능통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해석은 통쾌했다.

  아뜰리에 밖으로 나오자 옆의 작은 전시 공간에도 전시가 열리고, 자연의 정취가 넘치는 정원과 연결된 산책코스가 보였다. 세잔의 발길이 수없이 가닿았을 작은 숲길을 거닐었다. 화구를 짊어지고 지팡이를 짚으며 모티브를 찾아다녔을 세잔을 생각하며 오솔길을 걸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숲에서 절친했던 친구의 사망 소식을 접했을 때 그가 겪었을 고독과 슬픔도 상상해보았다. “이 작업실은 미술관이 아니다. 세잔 이외의 다른 것을 찾으러 오지 말 것”이라는 안내문처럼 오로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만들어진 이 공간이 순간 울컥해지기도 한다.

  #4 생트 빅투아르산과 비베뮈스

  세잔은 1901년부터 엑상 프로방스의 이 아뜰리에에  자리를 잡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산의 모습에 빠져들었다. 엑스의 모든 풍경은 세잔의 캔버스에 담겨 작품이 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그는 생트 빅투아르Sainte-Victoire 산을 배경 으로 무려 87점을 남겼다. 그리고 산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비베뮈스Bibemus 평원에서 30여 점의 유화와 수채화를 완성하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버려진 채석장의 혼란스러운 풍경을 담은 작품 중에는 유명한 <붉은 바위le rocher rouge>가 있다. 현재 비베뮈스 채석장은 리노베이션 중이며 2021년경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세잔의 가족들이 40년 동안 소유했던 자 드 부팡Jas de Bouffan 별장은 세잔에게 다양한 영감을 제공했다. 별장 앞의 공원에 화판을 설치하고 농장, 연못, 마로니에 나무 등을 그리기도 했다. 총 36점의 유화 작품과 17점의 수채화가 가족들의 생활 모습을 그려냈다.

  아뜰리에를 빠져나와 세잔이 자주 화구를 짊어지고 그림을 그렸던 산으로 올라가본다. 산을 오르는 길 담벼락에는 햇빛을 받아 유난히 진초록으로 빛나는 담쟁이가 너무 생생해서 꼭 조화 같았다. 지중해의 강렬한 빛 때문이리라. 엑스 거리 마켓에 진열된 사과도 우리가 평소 즐겨 먹던 사과의 빛깔과 달라서 놀랐다. 얼마나 붉고 선명한 색조를 띠는지 왠지 독이라도 든 사과 같았다. 세잔이 그린 정물 <사과>가 현실 속의 사과를 과장하여 그린 상상력의 산물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내 오만과 편견이 산산조각났다. 이 세상에 영원불변한 진리란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세잔은 일평생 어떻게 하면 자연 자체를 캔버스 위에 가장 기본적이며 기초적인 형태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재현이 아닌 표현으로서의 그림을 그린다는 건, 눈에 보이는 대로의 자연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머릿속에서 재구성한 자연을 그리는 것이다. 생트 빅투아르 산은 이러한 세잔의 생각이 연구 되고 실험되고 실천되어 탄생한 작품이다.

  그래서일까, 세잔을 흠모했던 피카소는 세잔의 마을, 생트 빅투아르 산기슭의 보브나르그 마을에 있는 이름 없는 성채에서 그의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한편 1863년에는 살롱전에서 작품을 거절당한 미술가들을 위한 ‘낙선전’이 열렸다. 세잔은 이 전시회에서 다른 ‘불합격자들’인 에두아르 마네, 카미유 피사로, 앙리 팡탱 라투르 등과 함께 작품을 전시했다. 20년 후인 1882년, 그의 작품은 처음으로 살롱전에 통과된다.

  전형적으로 침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어둡고 우울한 색조로 그려진 세잔의 초기 작품들은 다소 밀실 공포증적인 느낌을 주며 침울한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1870년대 들어서면서 그의 양식은 변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플랑드르 미술에 감명을 받았던 세잔은 플랑드르의 대가들이 사용한 것과 유사한 색조로 정물화를 그렸다. 세잔의 정물화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사과와 오렌지>로 이 그림은 무미건조한 주제를 위대한 미술로 끌어올렸다.

 

  #5 사과 한 알의 혁명

  다른 아이들과 달리 파리 말씨에 근시안인데다 늘 어색한 태도로 말을 더듬기까지 하는 졸라는 친구들의 조롱과 야유를 받곤 했는데, 그때마다 세잔이 그를 보호해주고 너그럽게 감싸주었다. 이런 친절에 감사하는 뜻에서 어느 날 졸라가 사과 한 바구니를 들고 세잔의 집을 찾아갔다. 그들의 우정은 이 사과 바구니와 함께 시작된 것이다.

- 김화영 산문집 『여름의 묘약』(문학동네) 중

  작가 에밀 졸라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사과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세잔의 도움으로 괴롭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졸라는 고마움의 표시로 세잔에게 사과들을 가져다주었다. 이후 세잔과 졸라는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30여 년간 편지를 교환하며 예술을 논했다. 사과는 이러한 면에서 세잔에게 개인적인 추억뿐만 아니라 졸라와의 각별한 우정이 담긴 상징적 의미를 내포한다.

  후기 인상파 화가인 세잔은 200여 점에 달하는 작품을 통하여 사과의 형태와 색채를 탐구했다. 세잔은 절친한 벗인 에밀 졸라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사과 한 개로 파리 를 놀라게 하고 싶다”고 언급하였으며,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일과 그릇을 소재로 한 정물화를 많이 그렸다. 특히 대상에 내재하는 실재성을 가장 잘 포착할 수 있는 위치를 잡기 위해 끊임없이 정물의 대상을 옮겨가며 실험하였고, 이 실험에서 몇 가지 소재를 계속 사용했는데, 그중 하나가 사과였다.

  <사과와 오렌지>는 세잔이 만년에 그린 대표적인정 물화로, 쿠션이 있는 긴 의자에 천과 냅킨을 깔고 그 위에 도자기와 과일을 배치한 구도이다. 사과를 담은 접시가 앞으로 떨어질 듯한 느낌이 들지만, 전혀 불안정하지 않고 오히려 발랄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붉은색에서 노란 색에 이르기까지 그 변화가 매우 아름다우며, 형태나 양감이 매우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항아리와 굽이 달린 과일 그릇은 옆에서, 그리고 앞에 있는 과일 접시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그려졌는데, 이 같은 다양한 시점과 소실점은 화면에 역동성을 부여해 준다. 하나의 시점에서 대상을 포착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원근법에서 벗어나 복수화된 시점에서 대상을 묘사하는 이러한 방식은 이후 구성주의라는 이름으로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두산백과 참조)고 한다. 그는 대상을 화폭에 ‘재현’하는 것으로 사진과 경쟁이 되지 않는다면, 사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화폭에 그리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그것을 ‘표현’이라고 보았다. 결국 사과 한 알로 회화 역사에 혁명을 일으켰으며, 파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입체파를 선도했던 파블로 피카소는 세잔을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고 칭송했고, 폴 고갱은 ‘세잔의 그림은 내가 가진 소중한 보물’이라고 고백했다.

 

  #6 에밀 졸라와 세잔의 우정

  추억을 가진 이들은 행복하니/ 폴, 자네가 나의 청춘이네/ 돌아보면 내 즐거움과 슬픔 하나하나에// 자네가 함께 하고 있어/ 오직 자네를 위해 이 글을 쓰네

- 에밀 졸라 ,「나의 벗 폴에게」

  이 절절한 고백처럼 폴 세잔의 곁에는 언제나 그를 지지 하고 지켜준 한 친구가 있었다. 『테레즈 라캥』, 『목로주점』, 『나나』와 같은 세기의 명작의 저자이자 ‘드레퓌스 사건’으로도 유명한 ‘행동하는 지성’ 에밀 졸라였다. 다니엘르 톰슨 감독에 의해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Cezanne and I>(2015)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듯이 소설가 에밀 졸라와 화가 폴 세잔은 절친한 친구였다. 둘은 어린 시절을 엑스에서 보냈다.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예술적 교감을 나누었다.

  세잔이 화가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은 것도, 세잔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본 졸라 덕분이었다. 졸라의 격려 덕분에, 세잔은 엑상프로방스를 떠나 파리로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유명한 소설가로 명성을 얻고 있던 졸라가 1886년에 『작품』을 출판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클로드 랑티에는 늘 불안해하고 성적으로 자신이 없으며, 실패한 화가로, 이후 자살을 한다. 세잔은 랑티에가 자신을 풍자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세잔은 수십 년 동안 졸라에게 털어놓은 비밀들이 우롱당한 것처럼 느껴졌다. 랑티에는 졸라가 알고 있던 많은 화가들의 특성을 섞어 놓은 허구적 인물 이라고 해명했지만, 이 사건으로, 둘의 30년 우정은 끝나 버렸다. 결별을 선언한 후 세잔과 졸라는 만나지 않았지만 졸라가 죽었을 때 세잔은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그들은 서로를 영웅처럼 숭배했다. 졸라는 세잔의 미술을 경외했고, 세잔은 졸라의 글을 경외했다. 두 사람은 누구보다 든든한 지원군으로, 때로는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사랑하는 이성보다 더 깊은 정을 나누는 동반자로, 그리고 서로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적으로 평생을 동반 성장했던 것이다. 비록 두 사람의 우정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30년 동안 서로에게 주고받은 그 영감과 예술과 논쟁, 그리고 순수하면서도 열정적이고 강렬했던 그들의 우정이야말로 세기적인 두 예술가를 탄생시킨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믿는다.

  나는 순례자처럼 생트 빅투아르 산을 오르내리며, 온종일 부셔지는 엑스의 찬란한 자연광선을 받으며 그들의 우정을 경외한다. 곧 일몰이 시작될 것이다. ‘녹색광선’을 보러 바다로 떠나자. 졸라에 대한 세잔의 진심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 《쿨투라》 2019년 7월호(통권 6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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