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Theme] 카메라와 봉테일, 박태원과 봉준호
[7월의 Theme] 카메라와 봉테일, 박태원과 봉준호
  •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 승인 2019.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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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보仇甫 박태원朴泰遠의 장편소설 『천변풍경』의 무대를 역사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린 적 이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분관인 청계천박물관이 지난 해 여름 ‘천변풍경 특별전’을 개최한 것이다. 이 전시회에서는 『천변풍경』의 실질적 배경인 청계천 주변에서 살던 서민들의 삶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여 소개한 바 있다. 박태원은 이상, 김기림 등 과 함께 활약했던 근대 모더니스트로서, ‘갑바 머리’ 와 ‘대모테 로이드안경’을 전매특허로 하면서 섬세한 묘사와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당시 서민들의 삶을 사실감 있게 보여준 작가로 유명하다. 박태원의 집이 청계천 위에 걸친 광교 맞은편에 있었으니까 그에게 청계천이란 삶의 구체적 터전이기도 했던 셈이다.

   『천변풍경』은 1936년부터 『조광』에 연재하다 장편으로 개작되어 1938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는데, 연재 때부터 큰 주목을 받아 세태소설이나 리얼리즘의 범주에 대한 논쟁을 불러오기도 하였다. 『천변 풍경』은 당대 비평가인 최재서에 의해 ‘리얼리즘의 확대’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기법적 측면에서 마치 영화의 ‘카메라’와 같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는 것이었다. 작가의 주관과 해석을 극도로 배제한 채 이루어진 이러한 묘사 기법은, 이 소설로 하여금 천변에 깃들여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외관과 생태와 욕망을 실감나는 세목으로 담아내게끔 했다. 당대인들의 일상적 디테일은 이러한 기법과 작가정신에 의해 리얼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지난 5월에 열린 제72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 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을 연출한 봉준호 감독은 워낙 디테일에 충실하여 ‘봉테일’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카메라’ 기법에 의한 디테일의 충실성으로 유명했던 작가 박태원이 그의 외조부이다. 사연을 재구再構해보자. 박태원에게는 이상과 정인택이라는 1930년대 모더니스트들과의 일화가 유명하게 따라다닌다. 이상과 정인택은 권영희라는 여성을 두고 경쟁한 사이였다. 권영희는 이상이 두 번째로 인수했던 인사동 카페 ‘쓰루[鶴]’의 여급女給이었다. 권영희는 원래 이상과 연인 관계였으나 정인택이 음독자살 소동까지 벌여가면서 권영희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한다. 드디어 1935년 8월 29일 정인택과 권영희는 결혼하였는데, 이때 신부의 연인이었던 이상이 사회를 본다. 그때 박태원은 정지용, 김환태 등 9인회 동인들과 함께 하객으로 참석하였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헤어지고 만나고 또 사랑한 뜨거운 첨단의 근대인들이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어 박태원은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보도연맹에 가입하였다. 6·25전쟁이 나자 이승만 정부는 후퇴하면서 보도 연맹 가입자들을 구금하거나 처형했는데 인민군이 구금 시설을 접수하면서 간신히 살아남은 수감자들 가운데 박태원이 끼어 있었다는 것이 황석영이 1989년 북에서 들은 권영희의 증언이다. 박태원은 남에 부인과 아이들을 남겨둔 채 동생 박문원, 큰 딸 설영만 데리고 북으로 간다. 여러 추측이 있겠지만, 아마도 박태원은 잠깐 피신한 후에 남으로 돌아 오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결국 분단이 이루어지고 북으로 간 ‘박태원-설영 부녀’와 남에 남은 ‘부인-4남매’는 결국 만나지 못하고 항구적으로 헤어지게 된다. 그러다가 북에 온 정인택이 숨지자 박태원은 권영희와 결혼하였다. 숨지기 전 정인택의 부탁도 있었다고 한다. 박태원은 정인택과 권영희 사이에 난 태선과 태은을 수양딸로 삼았고 딸 설영을 데리고 살았다. 황석영이 방북했을 때 설영은 평양기계대학 교수였고, 정태선은 무용가, 정태은은 인민군 교향악단의 첼로 주자였다고 한다. 박태원은 1965년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 1부 1권을 출간하였으나 그 해에 실명하였다. 1968년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지만, 원고지 모양의 특수한 틀을 이용하여 원고를 쓰다가 나중에는 권영희에게 구술하여 받아쓰게 하였다. 그렇게 권영희는 『갑오농민전쟁』을 박태원과 함께 완성시켰다. 한때 이상 애인이었고, 한때 정인택 아내였던 그녀 가 끝까지 그들의 친구였던 남편 박태원 곁에서 대작을 남기는 순간이었다. 박태원은 1986년에 권영희는 2001년에 작고하였다고 한다. 이래저래 권영희라는 한 여성이 거쳐온 한국 근대사가 한편으로는 비극적으로 한편으로는 파란만장하게 다가온다.

  박태원의 장남 박일영은 『구보, 남조선문학가동맹 평양시찰단 일원으로 평양에 가다』라는 글에서, 구보의 생애를 지근에서 바라본 장남의 시선과 기억을 증언해주었다. 한국전쟁 때 구보가 북으로 가게 된 과정을 경험적으로 재구성하면서 그는 구인회와 카프의 기억, 구보의 심한 야맹증 일화, 남조선문학가동맹 평양시찰단의 행로를 섬세하고도 선연하게 들려주었다. 특별히 1990년에 평양에 있던 선친 서재에 들른 기억을 통해 박일영은 구보야말로 “글을 쓰기 위해 이승에 오셨으며, 어떠한 환경에 처한다 하더라도 창작을 떠나서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외곬의 전업작가”라고 해석하였다. 아들로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깊은 고백을 한 것이다. 평양 광복거리 큰누나 아파트에 그가 들르기까지 지나버린 저 40년 세월을 통해, 우리는 구보 일가 혹은 한국 근대사의 만만찮은 비극을 만나보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선친의 문학을 복원하고 빛을 입히는 박태원 가家의 높은 품격도 만나보게 된다. 차남 박재영은 『구보 씨와 더불어 경성을 가다』(2005)에서 ‘구보의 길’을 제창하기도 하였는데, 이분은 지금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각종 학회에서 아버지에 대한 연구와 증언을 열심히 하고 계시다. 봉준호 감독은 구보가 남에 두고 떠난 차녀 박소영의 아들이다. 박태원의 남다른 가족사가 식민지와 분단을 가로지르는 순간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한 <기생충>은 모두 백수인 가족이 벌이는 ‘가족희비극’이다. 하층민들의 삶과 욕망을 통해 현대사회의 자화상을 '카메라’처럼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봉 감독은 자본주의의 난숙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상생의 삶을 원하지만 그게 잘 안 되는, 기생의 처지로 내몰린 사람들이 등장한다. 같이 잘 살고 싶어도 같이 잘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그리며 거기서 나오는 웃음과 공포와 슬픔을 담은 희비극이 아닌가 생각된다.”라고 작품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그러고 보니 박태원도 시종 자신의 작품을 통해 사회적 부적응자나 약자들을 따뜻하게 옹호하지 않았던가. 해방 후 박태원은 『조선 독립 순국 열사전』, 『약산과 의열단』, 『이충무공행록』 등 항일투사와 애국자들의 전기물 집필에 매달렸다. 최근 ‘약산 김원봉’에 대한 사회적 의제가 제출되어 한바탕 논쟁을 치른 바 있는데, 영화 <암살>, <밀정>, 드라마 <이몽> 등에서 김원봉의 모습이 다루어진 바 있다. 기회가 되면 외할아버지 박태원의 『약산과 의열단』을 원본으로 하는 김원봉 영화가 ‘봉테일’에 의해 실현된다면, 우리는 70년을 훌쩍 넘어서고 있는 분단 역사를 가로지르는 영화사 의 쾌거를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몽상 아닌 기대를 한번 해보게 된다.

 

 

* 《쿨투라》 2019년 7월호(통권 6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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