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네가 죽인 사람들이 생각날 때가 있어?
[드라마 월평] 네가 죽인 사람들이 생각날 때가 있어?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 승인 2019.07.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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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alking Dead
ⓒAMC

 대학 다니면서 총 다섯 번의 미팅에 나갔다. 만나는 장소와 시간, 그리고 사람들은 매번 달라졌지만 달라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어떤 영화 좋아하세요?”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미팅이든 소개팅이든 맞선이든 그걸 부르는 명칭만 다를 뿐 그것의 구성요소는 동일하다. 사람과 사람, 그리고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집요한 탐색전. 혈액형을 물어보고 별자리를 따지는 건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알 수 없다’는 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의 일환이다. “느 아버지 머 하시노?”라는 한 문장 속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숨어 있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누구냐 넌.

 전쟁영화를 좋아한다는 나의 말에 살짝 당황해하며 커피 한 모금을 마시던 그 사람을 탓할 생각은 없다. 아, 그런 거 좋아하시는구나. ‘그런 거’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쟁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수많은 연관검색어가 무엇인지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죽는 사람과 죽이는 사람. 어떤 명분으로 시작된 것이든 전쟁이란 비극이고 슬픔이다. 그리고 공포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여자는 어떤 사람일까. 왠지 타인의 감정에 무심하고 냉정하고 가끔은 잔인하다고도 생각되는, 그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조금 과장되게 이야기하자면 타인의 고통에 희열을 느끼는 사이코패스 같은. 어쩌면 이 글은 좀비 드라마 <워킹데드>에 대한 글이면서 <워킹데드>를 최고의 드라마로 꼽는 내 취향과 그걸 통해 드러난 ‘나’란 사람의 캐릭터를 고백하는 자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도대체 누구냐 넌.

 ‘좀비’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험한 몰골의 시체가 다리를 질질 끌면서 걸어 다니거나 산 사람에게 달려들어 살점을 게걸스럽게 뜯어먹는 모습이다. ‘전쟁영화’란 단어가 주는 폭력적인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나로서는 억울한 감이 없지 않다. 전쟁영화가 그냥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영화는 아니지 않은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라이언 일병 한 명 구하기 위해 수십 명이 비참하게 죽어 나가는 잔인하고 매정한 영화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혹여나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전쟁이란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의 고귀함이 어떻게 발현되는가’에 관한 진지한 메시지를 전달한 스티븐 스필버그와 그에게 아카데미 감독상을 안겨준 심사위원들, 그리고 그 뜻에 공감하며 돈 주고 그 영화를 감상한 수천만 명 관객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리며 명상의 시간을 갖길 바란다.

 분명히 말하건대,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대하는 태도’다. 뒤늦게 영접한 <워킹데드>를 시즌 8 까지 한 달 만에 돌파한 것은 흥미진진한 스토리 덕분이기도 했지만 내가 만약 저 상황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나는 과연 어떤 캐릭터와 흡사할까, 라는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워킹데드>는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 산 사람들을 공격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등장인물을 크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좀비)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그 경계가 무의미해진다. 중요한 것은 좀비로 가득 찬 세상이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 ‘어떤 삶’을 사느냐, 다.

 별 비중 없이 나왔다가 사라졌지만 내 뇌리에 오래 남아있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닥터 제너.

 극중 생존자들은 바이러스 백신과 안전한 보호처를 찾아 존재도 확실하지 않은 질병통제센터로 향한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그곳에서 한 달 넘게 연구실에 갇혀 지내던 유일한 생존자를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제너 박사다. 이제는 안전할 거라고 믿은 생존자들과 달리, 그는 좀비로 변한 아내까지 실험대상으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 퇴치 연구에 실패하고 무기력한 상태다. 나머지 연구원들이 모두 도망가거나 자살한 상황에서 그는 센터를 폭발시킴으로써 스스로 삶을 마감할 작업을 이미 해놓았다. 하루 사이 엄청난 굉음과 함께 그는 센터와 함께 잿더미로 변한다.

 현재 시즌 9가 방영 중이라는 걸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생존자의 대부분은 끝까지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비록 수많은 좀비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될지라도 그들은 센터를 탈출하여 새로운 모험에 나선다. 그들의 삶은 그렇게 새로이 시작된다. 얼핏 제너 박사가 ‘더러운 꼴’ 안 보고 고결하게 삶을 마감한 것 같이 보이긴 하지만 그는 결국 삶을 포기한 사람이라는 것을 <워킹데드> 보는 내내 깨닫게 된다. 그가 죽고 나서 많은 사건·사고가 있었고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낯선 타인과 사랑에 빠지고 아기를 낳고 미래를 꿈꾼다. 드라마가 오랜 기간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희망에 대한 생존자들의 ‘강한 의지’ 덕분일 것이다. 희망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해서 얻는 것이니까.

 켄터키주 작은 마을의 부보안관 ‘릭’을 중심으로 생존자들은 좀비들과 싸우면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대릴 딕슨이다. 형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했던 그는 다른 생존자들이 가까이하기엔 너무 거칠고 어두운 남자다. 하지만 캐롤의 어린 딸 소피아가 실종되자 그는 누구보다 먼저 소피아를 찾아 나선다. 며칠이 지나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포기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끝까지 아이를 찾아나선다. 그 과정에서 여러 명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심지어 생명을 잃기도 하지만 그 과정을 함께 견뎌내면서 생존자들은 좀비를 죽이는 ‘살인자’에서 동료를 구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비인간적인 삶보다는 누군가를 위한 희생, 즉 인간적인 죽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극중 허셀 그린의 대사처럼 “우리가 아는 문명사회는 사라졌지만 인간성을 지키는 건 우리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대립 구도는 ‘인간과 좀비’에서 ‘인간과 인간’으로 전환된다.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좀비의 먹잇감으로 밀어 넣고 혼자 도망가는 사람,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무자비하게 사람을 고문하는 사람,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로 철사를 두른 야구방망이로 사람 머리를 뭉개질 때까지 내리치는 사람… <워킹데드>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더 이상 좀비가 아니다. 사람이다. 가버너에게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한 글랜은 연인 매기에게 이렇게 말한다. “워커들에게 쫓겨다니느라 인간들이 어떤 짓을 하는지를 잊었어.”

 시즌 8이 되면서 드라마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죽고 죽이는 싸움이 생존자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벌어진다. 자신과 다른 공동체에 속했다는 이유로 그 사람은 죽어야 하는 운명이 되고 나는 그 사람을 죽여야 하는 운명이 된다. “우리가 워킹데드”라는 생존자의 고백은 그래서 깊은 울림을 준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생명의 유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답게’ 사느냐이다.

 <워킹데드>의 생존자들은 낯선 타인을 자신의 공동체에 들이기 전에 세 가지 질문을 먼저 한다. 일종의 자격 시험이다. 워커는 얼마나 죽여 봤나요. 사람은 몇 명 죽여 봤나요. 왜 죽인 건가요. 이걸 왜 묻는 건지, 어떻게 답해야 합격인 건지 드라마는 말해주지 않는다. 어쩌면 그 질문들은 질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인지 모른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생각해보길 바라며, 삶이 아닌 생존을 사는 사람들에게 아주 잠깐이나마 인간으로 돌아갈 시간을 주는 것이다.

 도대체 누구냐 난.

 <워킹데드>에서 내가 목격하는 것은 먼 나라 미국의 가상 세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 내가 사는 세상의 이면이다. 어쩌면 그건 내가 애써 외면해왔던 ‘오늘’의 그림자일지 모른다. 그동안 내가 대학에 들어가고 취직을 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의 절망과 슬픔을 딛고 여기까지 왔는지. 매달 드라마 월평을 연재하면서 한 편의 드라마를 집중 조명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드라마가 찰나의 시선도 받아보지 못한 채 사라져갔는지. 결국, 이순간에도 나는 ‘워킹데드’라는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워킹데드>에 나타난 약육강식의 세계는 ‘지금 여기 우리’의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도대체 누구냐 우린. 

 

 

* 《쿨투라》 2019년 7월호(통권 6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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