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Theme] 조용필은 조용필이라는 지도에는 없는 바다이다
[8월 Theme] 조용필은 조용필이라는 지도에는 없는 바다이다
  • 구자형(작가)
  • 승인 2019.08.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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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허공> 부르고 죽었어야 했는데….”

2.

  방배동 그의 자택에서였다. 1997년 <바람의 노래>가 나오기 직전이었다. 저녁 7시 그의 집을 방문해 인터뷰 노트를 펼치자 그는 대뜸 “구 작가 술하나?” “네.” 매니저가 소주를 갖고 왔다. 그는 이튿날 새벽 5시 골프 약속이 있다며 안 마셨다. 궁금했던 얘기들을 묻고 그가 답하고 내가 소주를 두 병째  비우자, 그가 매니저에게 말했다. “안 되겠다. 맥주 갖고 와.”했다. 맥주가 서너 병 비워지자 그는 다시 소주로 바꿨다. 그렇게 방배동의 밤이 깊어갔다.

3.

  그는 당시 생존해 계시던 부인 안현진님이 중국에 가 있다며 그 밤에 두 번을 직접 전화했다. 그때 표정이 소년처럼 맑았다. 첫 통화를 마치고 그는 내게 “구 작가, 형 동생하자. 다음엔 동부인해서 마시자.”했다. 난 또 “네.”했다. (거짓말을 한 셈이 됐다. 나는 모태솔로이기 때문이다.) 정이 많아도 너무 많은 그는 지방공연 갔다가 서울로 돌아올 때면 늦은 밤 한적한 고속도로 휴게소 옆 잔디밭에서 신문지 위에 어묵이나 새우깡 같은 거 놓고 소주 마시는 것을 가장 편안해하는 소박한 한국인이다. 언젠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난 굳이 해외활동 안합니다. 내 노래가 가장 빛나는 시간은 한국의 민중들과 함께할 때입니다.”

4. 

  조용필은 가왕, 국민가수, 슈퍼스타, 작은 거인 이런 찬사에 관심 없다. 그냥 ‘가수’ 두 글자가 좋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얘기가 복잡해진다. 조용필 같은 가창력을 가져야만 가수이고 그렇다면 나머지는?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듀엣은 조용필과 같은 축제무대에 섰다가 그가 노래하는 걸 보고 그날로 바로 해체한다. 조용필의 라이브를 듣고 나니까 자신들이 가수가 아니라는 걸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가람과 뫼를 하던 한 가수는 뉴욕으로 갔고 해오라기를 하던 한 가수는 사업을 한다.  

5.

   조용필이 일 년의 반을 일본 활동 할 무렵, 방송 출연 마치고 NHK PD 등과 함께 신주쿠의 작은 주점엘 갔다. 통기타가 하나 있었다. 허름한 그 통기타를 들고 문득 조용필이 <한 오백년>을 노래했다. 2층이었는데 1층에 있는 사람들까지 그 주점에 모두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6.

  조용필을 처음 본 것은 1975년 TV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를 때였다. 인체가 60조 개의 세포라고 하는데 그 모든 세포가 울리고 파도치고 있었다. 그렇다. 조용필은 조용필이라는 지도에는 없는 바다이다. 그는 한시도 가만있질 못한다. 달빛의 유혹에 아름답게 흐느끼거나 눈부신 햇살에 이따금 뜨겁게 절규할 뿐이다.

7.

  조용필 때문에 결혼 안한 어느 여성 팬을 인터뷰 했었다. “저는 결혼 안 해요.” “왜죠?” “직장에서 퇴근하고 집에 와 촛불 한 자루 켜놓고 조용필 오빠 노래 듣는 게 훨씬 행복해요.”

8.

  2013년 조용필의 헬로 콘서트가 있었다. 그 콘서트는 다큐멘터리로 제작됐고 내가 작가를 했다. 잠실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콘서트를 앞두고 첫날 그 드넓은 텅 빈 객석에 나 홀로 앉아 리허설을 지켜봤다. “창밖에 서면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대의 흰 손…” 어둑한 그의 목소리에서 별들이 반딧불이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9.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작가를 할 때 별밤 콘서트에 매주 스타 가수들이 나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미리 와서 연습하지 않았다. 해바라기가 30분 정도 미리 와 연습하던 기억이 있다. 그 시절 조용필을 어렵게 초대했다. 이문세와 내가 오후 5시에 도착했을 때,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은 이미 연습 중이었다. 내가 물었다. “언제 오셨어요?” “오전 10시.”

10.

  1980년대 일본 공연을 가면 조용필 매니저는 조용필보다 나이가 많았는데 늘 조용필의 양말을 자청해서 빨았다. 내가 물었다. “아니 양말을 왜 빨아요? 사서 신으면 되죠.” “아냐. 무대에서 노래하는 거 보면 너무 열심히 해. 그게 고맙고 미안해서 내가 그거라도 해주고 싶은 거야.”

  그 매니저는 이런 말도 했다. “사실 그때 미국에서 연락이 왔었어. 계약하자고. 하지만 내가 스케줄을 보니까 한국, 일본에 이어 미국 활동까지 하면 조용필은 무대에서 죽겠더라고. 그래서 조용필에게 알리지 않고 안 하겠다 했지.” 난 내색하지 않았지만 한숨을 푹하고 내쉬었다. 만약 그때 조용필이 미국 진출을 했더라면 80년대 중반에 이미 빌보드 1위를 할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었다.

11.

  자, 이제 ‘허공을 부르고 죽었어야 했다’고 말한 한국의 어느 가수의 이야기를 마무리하자. 그때 내가 물었다. “형이 왜 죽어요?” 그가 답했었다. “제임스 딘 봐. 스타는 젊었을 때 죽어야 해.” 난 그 순간엔 그의 대답을 잘 이해 못했다. 하지만 이젠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가수는, 스타는 대한민국에서 조용필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그 말을 하면 어울리지가 않는다. 조용필,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조용필 형과 소주 마신지가 22년이 됐다. 이젠 내가 그에게 말해야겠다. “형, 구 작가가 죽기 전에 소주 한 잔해요.”

12.

  1997년 쌀쌀했던 봄밤, 시인 김수영이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고 했던 그런 봄밤의 음주 인터뷰를 하고 나는 어떻게 그의 집을 빠져 나와 귀가씩이나 했는지 알지 못한다. 내 가슴은 그때 술과 어떤 알 수 없는 것들로 꽉 차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그가 전화를 걸어왔다. “구 작가 나 너랑 인터뷰하고 다음날 골프 못 나갔다. 생전 처음이다.”

 

 

* 《쿨투라》 2019년 8월호(통권 6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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