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드라마] 〈The Good Place〉 나도 언젠간 쓸모가 있겠지
[10월 드라마] 〈The Good Place〉 나도 언젠간 쓸모가 있겠지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 승인 2018.10.01 02: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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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제 드라마를 볼 때면 괜스레 마음이 두근거린다. 과연 이 드라마는 다음 시즌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시즌1’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드라마 몇몇에 마음을 주었다가 강제 이별 당한 기억이 새록새록 생각날 때면 심장박동은 점점 더 빨라진다. 많고 많은 드라마 중에 특정 드라마를 ‘선택’한 시청자가 ‘갑’인 것 같지만 시즌제 드라마의 경우에는 갑과 을의 관계가 조금 애매하다. 제작자의 입장에서 보면 시청자가 다음 시즌도 변함없이 사랑해줄까 걱정되겠지만 시청자로서는 내가 준 사랑을 나 몰라 하고 ‘먹튀’하는 건 아닐까 두려움이 앞선다.

케빈 스페이시의 성추행 혐의로 제작이 중단된 <하우스 오브 카드> 시즌 6은 그나마 양반에 속한다. 이별의 이유도 알리지 않은 채 조용히 사라져버린 드라마는 셀 수 없이 많다. 이번에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최근에 몰아보기 시작한 <굿 플레이스>는 시즌3을 향해 순항 중이다. 고백하자면 시즌2까지 나와 있는 걸 확인하고 보기 시작했다. 이제 실연의 아픔은 그만 느끼고 싶다. 고마해라. 마니 묵었다.

사실 <굿 플레이스>는 보고 또 봐도 배부르지 않는 드라마다. 한 편의 방영시간이 고작 22분 남짓으로 하나의 시즌을 다 보더라도 네 시간이면 충분하다. 240분 안에 시즌 하나를 통째로 다 본다는 것은 시즌제 드라마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국제 테러사건에 맞서는 테러방지단의 활약을 실시간으로 24시간 보여주는 미국드라마 <24>(2001~2014) 덕분에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는 간증은 아직도 최초의 신화 『길가메시』 처럼 오래오래 전해져 내려온다. 물론 <굿 플레이스>가 웹드라마처럼 짧은 방영시간 덕분에 사랑받는 건 아니다.

“사고로 죽은 엘리너는 사후 세계의 낙원에 도착한다. 가장 도덕적으로 살았던 이들을 위한 ‘굿 플레이스’에. 누군가 그녀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시즌 1의 1회 소개 글)

그렇다. 당신의 머릿속에는 지금 한창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영화 <신과 함께>가 떠오를 것이다. 저승차사 하정우와 염라대왕 이정재, 그리고 사후세계. 이보다 멋진 조합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만약 무시무시한 저승 이야기를 하루 22분씩 매일 출근하는 지하철에서 본다고 가정해보자. 아니,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4시간 동안 몰아보기한다고 상상해보자. 멀게만 느껴졌던 지옥이 마음 한 구석에 똬리를 틀게 될 것이다. 『길가메시』의 주인공 반인반신 길가메시는 친구 엔키두의 죽은 몸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는 걸 목격하고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다.

〈The Good Place〉 스틸컷

<신과 함께> 속 재판을 통과하지 못한 망자들의 모습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 건 나만의 악몽이 아닐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사후세계에 대한 무한한 확신이 있는 경우엔 오히려 죽는 날을 고대할지 모른다. 나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천국에 가게 될 거야. 그런 사람들을 위해 고대 이집트인들은 아주 훌륭한 책을 남겨주었다. 죽음에 대한 인류 최초의 기록이라고 이름 붙은 『이집트 사자의 서』는 천국에 가기 전에 진리의 전당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죽은 자는 심문의 과정에서 나온 모든 질문사항에 ‘아니오’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절차가 너무 복잡해 미리 적어서 준비해가고자 한 것이다. 자, 그럼 마음에 준비를 하고 귀를 쫑긋하시라. 42개 문항 중 몇 개만 추려서 들려드리겠다. 자신이 천국에 가게 될지 지옥에 가게 될지 잘 생각해보길 바란다.

흥분하고 화를 냈다.
다른 사람을 울렸다.
생각 없이 행동했다.

앞의 문항을 통과한 사람들만 이 글을 읽을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니, 이 글은 작성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이쯤 되면 심문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우리는 모두 지옥행이다. 끓는 물에 삶아지고 뜨거운 기름에 튀겨지고 날카로운 칼에 혀가 잘리고…… 이제야 당신은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굿 플레이스>를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이 드라마가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다는 칭찬부터 다음 시즌이 빨리 나오길 기다린다는 장수 기원의 응원까지 호평 일색인 이유에 대해.

그렇다. 누군가의 실수로 ‘굿 플레이스’에 가게 된 ‘나쁜’ 엘리너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다. 극중 배드 플레이스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그녀의 고군분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최선의 불행’이다. 비록 지난날의 악행을 끊임없이 상기하며 ‘착한’ 엘리너를 연기해야 할지라도 그녀는 현재 굿 플레이스에 살고 있다. 좋아하는 새우를 맘껏 먹고 싫어하는 재즈를 듣지 않고. 하늘이 점지해준 소울메이트 치디는 늘 그녀와 함께 살면서 적절한 타이밍에 윤리학 이론을 알려준다.

이처럼 <굿 플레이스>는 아주 영리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든다. ‘내가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지옥에 갈 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잖아?’로 시작해 ‘내가 첫눈에 사랑에 빠질 만큼 아름답진 않지만 그래도 애프터 신청을 받지 못할 만큼 못생긴 건 아니잖아’로 이어지는, 은밀한 속삭임이 드라마 첫 회를 클릭한 시청자의 마음 한 자락을 붙잡는다. 나랑 한 번만 더 만나봐. 나 ‘나쁜’ 사람 아니야.

극중 ‘좋은 사람 테스트’에는 아래와 같은 항목들이 포함되어 있다. 사무실 전자레인지에 생선을 데운 적이 있나요. 캘리포니아 펑크 록 밴드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음악을 돈 내고 들은 적이 있나요. 항공사 비행기에서 신발과 양말을 벗은 적이 있나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시청자들을 위한 배려로 ‘굿 플레이스’를 설계한 ‘신적 존재’ 마이클은 ‘굿 플레이스’가 어떤 종교나 철학의 사후세계에도 기대고 있지 않음을 밝히며 굿 플레이스에 대한 소개를 시작한다. 로마에는 로마법이 있듯 ‘굿 플레이스’에는 그곳만의 선과 악이 있는 것이다. 그동안 악이라고 규정되었던 것들이 어쩌면 선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그러한 ‘진리의 상대성’은 죽음이 부여하는 윤리적 무게감에 짓눌려있던 사람들에게 해방감을 선사한다. 지난날의 죄의식 따윈 쓰레기통에 버리라는 얘기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물론 그동안 우리가 진리라고 믿어왔던 그 진리들은 마이클의 말에 따르면 지금 배드 플레이스에 있다. 우리가 존경했던 철학자들과 함께.

〈The Good Place〉 스틸컷

극중 초반 엘리너는 굿 플레이스의 문제적 인물로 묘사된다. 그녀가 파티에서 훔친 새우는 그 다음날 거대한 새우가 되어 하늘에 둥둥 떠다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그녀가 아랍계 혈통의 상류층 출신 타하니를 기린 같다고 험담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공룡만한 기린들이 길거리를 활보하며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하지만 굿 플레이스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는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으로 역할이 전환된다.

윤리학 교수 치디가 온갖 윤리학을 고민하느라 결정장애를 일으킬 때, 인공지능 로봇 재닛이 끝없는 리부팅과 업그레이드로 진화한 나머지 인간처럼 실연의 아픔으로 고통스러워할 때 엘리너는 조언자로서 그 문제를 함께 풀어나간다. 굿 플레이스 설계자 마이클이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쉬라’고 그를 노래방에 끌고 간 것도 그녀다. 나중에 굿 플레이스가 배드 플레이스이고 마이클이 천사라기보다는 악마에 가깝다는 것, 엘리너와 그녀의 친구들을 정신적으로 고문하기 위해 ‘가짜’ 굿 플레이스를 만들었다는 것이 밝혀진 뒤로, 마이클의 생각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것에 대처하는 사람 역시 ‘나쁜’ 엘리너다. 그녀보다 악마를 더 잘 이해하는 사람은 굿 플레이스에 없다.

<굿 플레이스>는 얼핏 보면 나쁜 엘리너의 착한 사람 되기 성장 서사 혹은 친구들과 함께 굿 플레이스에 가기 위한 모험 서사로 읽힌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 너머의 ‘무엇’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엘리너가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던 것은 살아있는 동안 그녀가 했던 나쁜 말과 행동 들 덕분이었다. 그런 경험들이 없었다면 그녀는 온갖 종류의 역경들을 현명하게 대처할 지혜를 얻지 못했다. 이런 통 큰 면죄부가 세상에 어디 있겠나 싶겠지만 모름지기 인간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던가. 자고로 신도 인간 없이는 창조주로서의 자격을 유지할 수 없으니 크게 손해 보는 셈법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굿 플레이스>에서는 선과 악, 신과 인간 등 이분법적 대립구도가 무의미해진다. 나중에는 굿 플레이스와 배드 플레이스의 경계 또한 무너진다. 시즌2 10회에서 마이클은 “배드 플레이스 안에 굿 플레이스가 있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나’가 생각하기 나름인 것이다. 불멸不滅의 진리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필멸必滅의 ‘사람’만 남는, 혼돈의 해피엔딩.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리의 외연을 확장시켜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굿 플레이스>에는 모험과 성장 서사에서 흔히 나오는 자기부정을 통한 자아성찰이 등장하지 않는다. ‘나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도 나이지만 지는 것도 나 자신이다. 승리의 기쁨도 패배의 절망도 모두 내 몫이란 소리다. 병 주고 약 주고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굿 플레이스>에는 그래서 나쁜 사람, 멍청한 사람은 있을지언정 루저는 없다. 모두 각자 생김새대로 쓰임이 있고 의미가 있다. 절묘한 타이밍에 유쾌한 농담처럼 터지는 ‘제이슨 멘도사’의 활약에 주목해보면 드라마의 메시지가 확실하게 느껴진다. 절대성은 단단하지만 폐쇄적인 반면에 상대성은 깨지기 쉽지만 유연하고 다양하다.

못 생기면 못 생긴 대로 예쁘면 예쁜 대로 성격이 급하면 급한 대로 느리면 느린 대로 제각각 모양대로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괜한 죄의식이나 열등감 따윌 가질 필요가 없다. 물론, 나 역시 이런 시시한 글을 썼다고 주눅 들지 않을 예정이다. 이런 글도 누군가에게는 한 줌의 위로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희망을 가져라. 최소한 그대는 나의 소중한 독자로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금 이 순간 최고의 쓸모를 자랑하고 있다.
젊은이, 복 받을 거요.

 

 

* 《쿨투라》 2018년 10월호(통권 5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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