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과연 선은 악을 이길 것인가
[드라마 월평] 과연 선은 악을 이길 것인가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 승인 2019.08.01 06: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ABC

 어린 시절,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죽고 사는 일 아니면 무조건 양보해라.

  사실 ‘양보’라는 게 얼핏 들으면 배려심 넘치는 말 같지만, 한국이 좁게만 느껴졌던 꿈많은 어린 소녀에게는 비겁한 감이 없지 않았다. 도대체 뭘 포기하고 왜 물러서란 말인가. 더는 자랄 게 없을 만큼 성인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그 말씀의 진의를 이해했다.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이란 늘 불안과 초조의 연속이라는 것을, 나로 인해 이 세상에 태어난 연약한 생명체를 향한 끝없는 염려와 걱정에서 비롯된 맹목적 사랑이라는 것을. ‘무조건 양보해라’는 ‘건강하게만 자라다오’의 또 다른 버전이었던 셈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정말 궁금하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알고 싶다. 뭔가 깨달은 듯하다고 느끼는 순간, 그 모든 것이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일까. 백악관 배경의 미국 정치드라마 <지정생존자>가 한국에서 리메이크된다는 소식을 듣고 몰아보기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드라마 <미생>이 직장인의 손자병법으로 인기를 끈 것처럼 또 하나의 자기계발 드라마가 등장했구나, 생각했다.

  “대통령 국정연설이 열리던 날, 폭탄 테러로 한날한시 모든 게 사라지고 승계서열 12위 환경부 장관이 원치 않는 권력을 잡고 60일간 대통령 권한대행을 해가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 드라마.”

  음, 그런데 ‘원치 않은 권력’을 잡은 대통령이라니. 이건 빨리 어른이 되어 회사에 가고 싶다고 졸라대는 여덟 살 조카보다도 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외계인의 침공에 맞서 지구를 지키는 카리스마 넘치는 대통령은 있었다.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정적을 무참히 살해한 야심 넘치는 대통령도 있었다. 그런데, 원치 않은 권력을 잡은 대통령이라니.

  대통령은 권력과 야망, 그리고 성공의 또 다른 이름 아니었던가. 이쯤 되면 백악관을 배경으로 한 또 다른 미국 정치드라마와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추천했다고 해서 명성을 크게 얻은 <하우스 오브 카드>(이하 <하우스>). 이 드라마는 주인공이 대통령 되기까지의 과정을 치열하게 보여준다. 현재 시즌 6이 인기리에 방영종료했다. 욕망의 수직 이동에 관한 최고 버전이랄까.

ⓒABC

  그런데 <지정생존자>의 주인공은 이미 대통령이다. 시작점이 다르다 보니 당연히 <지정생존자>는 대통령이 되기 위한 주인공의 욕망을 보여주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다. 미국 백악관을 배경으로 한 정치드라마지만 정치적 야심이나 욕망이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다. 오직 그가 대통령으로서 나라를 혼란에서 구하는 것, 즉 현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대통령으로서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에 모든 이야기가 집중되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대학교수이자 ‘무소속’ 대통령이라는 사실이다. 심지어 그는 내각에서 쫓겨난 직후에 ‘지정생존자’ 신분으로 대통령이 되었기에 자신을 지지해 줄 정치적 우호 집단이 하나도 없다. 특정 정치 성향과 세력이 없는 그의 ‘정체성’은 초반에 치명적 약점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최대 강점으로 전환되는데, 여러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첨예한 갈등상황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 있는 중재자로서 자리매김한 것이다. 가령, 대통령이 되고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을 뒷말했던 백악관 직원을 대변인으로 고용한 일이다. 대통령 의견에 용기 있게 제동 걸 수 있는,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가진 인재를 등용하기 위함이다. 나중에 그 대변인은 대통령의 최측근이 되어 그를 충성스럽게 보좌한다.

  대통령으로서 톰 컬크먼의 리더쉽은 포용과 관용에서 비롯된다. 경호원을 격의 없이 친한 친구처럼 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고 현장에 찾아가 슬픔에 빠진 국민과 사고를 수습하는 현장 요원들을 격려하는 데 있어 테러 위협에도 아무런 주저함이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정치적 퍼포먼스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라는 사실이다. 기자와 카메라가 있는 환한 낮이 아닌 어둡고 피곤한 밤에 몰래 조용히 방문하는 그의 모습은 자신의 혈육이 아닐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들을 따듯하게 품는 다정하고 듬직한 아버지로서 그의 사적 일상과 겹쳐진다.

  다름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그의 태도는 미국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미국적 가치를 대변한다. 그를 둘러싼 인적구성을 살펴보면 그 점을 쉽게 알 수 있는데, 그의 아내는 러시아계이며 그를 보좌하는 측근들은 무슬림, 멕시코 이민자 등 여러 계층의 소수자들이다. 문화적 다양성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사회를 형성하고 그 다양성이 서로 어우러져 시너지효과를 내는 샐러드 볼salad bowl의 나라. 미국 대통령 톰 컬크먼이 해결해야 할 사건·사고는 그래서 국제난민이나 인종차별 등 여러 분야의 다양성 문제에 편중되어 있다. <하우스>가 욕망과 욕망의 대결이라면 <지정생존자>는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명확한 대립 구도에서 갈등과 위기가 형성된다. 물론 결론은 늘 권선징악에 의한 해피엔딩이다.

ⓒABC

  여기까지 본다면 <지정생존자>는 악을 물리치는 강력한 선善을 통해 불의와 부조리에 지친 시청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해준다. 그런데 회를 거듭할수록 이상하게 재미가 없다. 권모술수는커녕 정치적 전술조차 매우 혐오하는 톰 컬크먼은 문제가 발생하면 먼저 윤리적으로 화를 내고 그것에 대해 정면 돌파를 시도한다. 그런데 그 방식이 큰 틀에서 보자면 누군가의 양심과 도덕성에 호소하는 것으로 늘 유사하게 진행된다. 스토리라인이 너무나 단조롭고 밋밋하다. 선과 악이 명확한 상황에서 이미 사건 해결의 방향이 정해진 탓이다.

  드라마 초반에는 선한 영웅의 승리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열광할 수 있다. 하지만 시청자가 바보는 아니지 않은가. 드라마로서 극적 구성이 너무 느슨한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 너머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단순하진 않잖아, 라는 왠지 모를 쓸쓸함이 짙게 남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톰 컬크먼은 착하게 살아서 성공한 게 아니라 그저 운이 좋아서 그 착함이 호구가 안 된 예외적인 사례일 뿐이다. 혹은 부조리한 현실을 은폐하는 판타지이거나.

  물론 지금 미국 대통령이 누구이며 그가 어떤 정치적 행보를 보이는지를 생각하면 그의 출현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지도자로서 자신의 나약함과 불안을 인정하고 겸손한 자세로 전지구적인 평화와 보편적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통령이라니, 얼마나 멋진가. 마치 마블 코믹스의 ‘캡틴 아메리카’ 같지 않은가. 다양성을 존중하는 윤리적인 대통령 톰 컬크먼은 이상적인 롤 모델로서 충분히 존경받을 만하다.

  그럼에도 자꾸만 나 자신에게 되묻게 된다. 과연 선善은 악을 이길 것인가.

  국제적인 테러사건에 맞서는 테러방지단의 활약을 그린 미국 시즌제 드라마 <24>에서 열심히 뛰어다니던 잭 바우어가 <지정생존자>에서는 교수 출신 대통령으로 나와 얌전히 책상물림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걸리지만, 드라마를 보고 나면 왠지 모르게 계속 찝찝함이 남는다. 배우 키퍼 서덜랜드의 주름진 얼굴처럼 내가 믿었던 그 가치들도 세월에 따라 늙어버린 걸까. 아니면 꿈만 많고 철은 없던 내가 이제야 불편한 진실에 점점 눈을 떠가고 있는 걸까.

  여기서 잠깐, 톰 컬크먼이 말끝마다 “God bless America.” 라고 하는 것은 왜 또 자꾸 거슬리는 걸까. 그토록 겸손하던 대통령이 유독 ‘미국’이란 두 글자 앞에서는 지나치게 목소리를 높여대는 건 왜 그런 걸까. 도대체 미국이 뭐고, 신이 뭐고, 선이 뭐길래.  

 

 

* 《쿨투라》 2019년 8월호(통권 62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