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Theme] 플레이라는 동사가 붙는 경우의 의미
[9월 Theme] 플레이라는 동사가 붙는 경우의 의미
  • 이경혁(게임칼럼니스트·평론가)
  • 승인 2019.09.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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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게임을 소비, 혹은 향유하는 일을 가리키는 영어 동사는 play다. watch, read와는 또 다른 방식의 향유를 가리키는 이 단어의 의미는 실제로 붙는 경우들을 살펴보면 좀더 명확해진다. 악기 연주를 설명할 때, 연극을 공연할 때, 스포츠 경기를 진행할 때 그리고 여러 가지 놀이를 즐길 때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그냥 노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대상을 받아들고 주어진 한계 안에서 다시 쓰거나 그려내는 경우라는 점이다. 악기 연주나 노래는 악보와 원곡이라는 대상이 주어지고, 이를 연주자가 자신의 해석과 방식을 통해 다시 펼쳐내는 과정을 거친다. 연극의 경우에는 대본이, 축구나 야구 같은 스포츠 경기에서는 규칙이 악기의 악보 자리를 대신한다. 그냥 빈둥거리는 놂을 play로 번역하기는 어렵다.

디지털게임이라는 새 매체를 향유하는 방식을 딱히 한국어로 번역해서 쓰기 어려운 이유는 이런 play에 잘 들어맞는 단어가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어 단어에선 ‘다루다’라는 단어가 그나마 원 의미에 가까워 보인다고 생각하지만 글쎄, ‘다루다’가 규칙에 따르거나 변주하는 재창조의 방식이라는 의미를 보편적으로 대표하기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다. 그 대상이 디지털게임이건, 디지털게임이 아니건 간에 play의 대상으로 주어지는 이른바 ‘원본’은 반드시 그 주어진 틀 안에 머물러야 한다거나 하는 강한 금기가 걸리는 대상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 해석은 원본을 능가하거나 혹은 원본을 능멸하며, 이들 모두가 인정 가능한 범위의 플레이에 들어간다. 어떤 연주자는 자신의 악기를 부수는 행위를 보여주기도 하고, 재즈를 위시한 음악에서는 애드립이라는 즉흥적 변주의 허용폭이 넓은 경우도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다른 매체보다 play가 붙는 경우에는 소비자, 이용자, 수용자라 불리는 이들의 행위가 상대적으로 능동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이는 디지털기술에 의해 등장한 새로운 매체인 게임에서도 공통적으로 작동한다. 게임의 플레이어도 마찬가지로 이른바 수용자의 능동성이라는 측면에 주목이 쏠리는 경우다. 게임의 팬덤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그래서 그 플레이어라 불리는 이들이 가진 능동적 특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계관에 개입하는 플레이, 팬덤이 만들어내는 새 의미들

요즘이야 워낙 쌍방향 미디어의 시대이다보니 게임만의 특성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 이른바 상호작용성이지만, 디지털게임의 특징으로 여전히 이 개념은 손꼽히고 있다. 플레이어의 입력이 없으면 컴퓨터 기반의 게임은 진행이 불가능하다. 매체가 그려낸 가상공간은 플레이어의 개입 없이 성립하지 않으며, 이는 게임이라는 매체 전반에서 일종의 기초문법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이른바 플레이어들은, 이 문법에 매우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이들이 구성하는 팬덤은 기본적으로 상호작용과 능동성을 장착한 집단이 된다. 게임 속에 등장하는 특정 캐릭터나 이야기, 혹은 e스포츠라는 파생장르에서의 프로선수를 향한 팬덤도 존재하지만, 원론적인 의미에서 게임 팬덤이 향하는 ‘팬질’의 대상은 규칙에 의해 구성된 세계관이라고 봐야 한다. 애초에 매체의 향유방식 자체가 세계관에 대한 개입이라는 전제 덕분에 이들 팬덤을 대표하는 특징은 개입이라는 범주 안에서 꽃핀다.

개입의 범주는 때로는 게임 안에서, 때로는 게임 밖에서 이뤄진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전게임 ‘스타크래프트’의 발흥은 싱글플레이에 갖춰진 캐릭터와 서사가 아니라 멀티플레이에서 플레이어와 플레이어 사이에 벌어진 유닛과 빌드, 테크트리로부터였다. PC통신 시절부터 시작된 여러 커뮤니티들에 모인 플레이어들은 최적의 자원채취 – 생산 – 유닛 조합의 빌드와 타이밍을 찾아 토론했고, 초창기 테란 기준 7배럭-8서플(7번째 생산된 SCV로 배럭을 짓고 8번째 SCV로 서플라이를 짓는)은 거대한 합동연구에 의해 8서플 10배럭으로 정립되었다. 세 종족의 발전하는 빌드 경쟁이 e스포츠로 넘어갔고, 제작사 대표가 ‘이런 게임이 될 줄 몰랐다’는 피드백을 내뱉기까지 가장 큰 향력을 발휘한 것은 ‘스타크래프트’ 팬덤이었다. 게임 안에서의 개입이 게임 자체를 재정립한 사례다.

게임 밖의 영역을 오가는 메타적 팬덤의 개입은 이른바 모딩moding이라는 이름으로 빈번하게 이뤄졌다. 유명한 액션어드벤처게임 ‘GTA’ 시리즈에는 다양한 차량들이 많기로 유명한데, 원작에서는 저작권 문제로 가상의 브랜드와 차량이 등장하던 것을 플레이어들은 직접 렌더링한 3D이미지를 활용해 현실의 차로 바꿔버리며 놀았다. 팬덤이 만들어 내는 모딩의 힘에 주목한 제작사들은 아예 사용자용 에디터를 게임에 포함시키기도 했고, 팬덤은 주어진 도구의 유용함에 화답하며 게임 하나로 온갖 기상천외한 일들을 벌였다. 심지어 이 바깥의 개입은 아예 이용자의 영역을 벗어나기도 한다. 당대 멀티플레이를 주름잡는 ‘리그 오브 레전드’는 ‘스타크래프트’의 이용자 변형 게임인 ‘에온 오브 스트라이프’와 ‘워크래프트 3’의 ‘도타’를 모드로 만든 이용자가 그 룰 그대로를 가지고 나와 창업하여 만든 게임이다. 국산 게임의 새 희망을 열었던 ‘배틀그라운드’ 도 리터리 액션 게임 ‘아르마’ 시리즈의 모드 제작자가 국내 게임사와 협업해서 만들어낸 게임이다.

 

게임 팬덤: 팬더밍 자체가 곧 플레이다

상호작용이 거의 모든 미디어의 특성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면서 팬덤이 개입하여 원작을 계승, 발전, 변용하는 모습은 이제 비단 게임 팬덤만의 특징으로 짚어내기 어려운 시절에 이르다. 그러나 애초에 향유방식 자체부터 원본의 경계 안팎을 오가는 문법을 지닌 디지털게임의 팬덤이 축적한 플레이의 관습은 단순히 일회성의 스핀오프를 넘어서 아예 매체 혹은 장르로서의 게임 팬덤이 갖는 독창점을 타 매체보다 강하게 드러낸다. 모든 팬덤이 근본적으로 창조와 변용을 바탕으로 하지만, 팬더밍 자체까지도 플레이의 확장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다.
 

 

* 《쿨투라》 2019년 9월호(통권 6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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