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행복은 윤리적인 얼굴을 하지 않는다
[드라마 월평] 행복은 윤리적인 얼굴을 하지 않는다
  • 김민정(드라마평론가·본지 기획위원)
  • 승인 2019.09.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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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신발 고치는 장인 눈에는 얼굴보다 신발이 먼저 보인다더니, 꼭 그 꼴이다. 드라마 <보좌관> 시즌1을 보는 동안, ‘정치’에 대한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극 중 어떤 사건은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따온 게 아니냐고 할 정도로 실감을 불러일으켰고, 그런 정치적 환기력 때문에 내년 총선을 앞두고 드라마가 대중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여야 정당에서 기대 혹은 우려를 표했다는 기사를 접하기도 하였으나, 그런 건 모두 내 관심 밖이었다. 그렇다고 정치에 아예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주목한 것은 협소한 의미의 정치가 아니라 광의廣義로서의 정치, 즉 우리 삶을 지탱하고 있는 모든 인간관계의 내외적 조율로서의 정치였다.

‘정치의 삶’을 사는 건 특정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에 국한된 것이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의무가 있기에 ‘삶의 정치’를 할 수밖에 없다. 내 인생의 장르가 멜로든 판타지든 혹은 범죄수사물이든 결국엔 모든 인간관계의 중심에는 내가 있고 모든 이야기는 나로 시작해 나로 끝난다. 한 마디로, 이 세상 모든 이야기가 바로 ‘나’의 이야기란 것이다.

그래서였다. <보좌관>을 보는 내내 나는 주인공 장태준에게 몰입하기보다는 한 걸음 떨어져 지켜보았다. 그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순간 드라마의 극적 재미는 증가할지 몰라도 정신건강에는 좋지 않을 거라는 확실한 예감 때문이었다. 시즌2에서 그는 국회의원이 되거나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흑화된 상태로 ‘나쁜’ 사람이 되거나 개과천선하여 다시 ‘좋은’ 사람이 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함부로 확신할 순 없다. 고작 10회분의 시즌1이 끝났기 때문이다. 얼마나 더 많은 드라마 회차가 남아 있는지 모르기에 드라마 작가의 마음 또는 시청자의 반응에 따라 서사 전개가 어떻게 달라질지 예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장태준이 어떤 결말에 도달하든 그 과정은 매우 험난할 것이며 그로 인해 그는 ‘불행’할 것이라는 점이다. 드라마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든 장태준은 언데드undead의 삶이다. 그는 이성민 의원처럼 장엄하게 죽지도 못하고 송희섭 의원처럼 비열하게 살지도 못할 것이다. 선과 악, 시와 비 사이에서 그는 끊임없이 방황할 것이며 시즌을 거듭할수록 그 혼란은 심화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정치드라마에 서 주인공 신분을 유지하는 데 제일 중요한 자격요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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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마라.

어떤 분이셨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맥락에서 위와 같은 말씀을 하셨는지는 정확하게 기억한다. 소설 합평 수업 시간이었고 선생님은 캐릭터를 창조하는 작가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셨다. 흔히 작품 탈고를 출산과 비유하곤 하는데, 캐릭터를 창조하는 작가는 그 인물에 대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절대자 창조주의 입장에서 등장인물을 너무 쉽게 죽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영화 <Stranger Than Fiction>에는 주인공을 죽이는 비극적 결말만 쓰는 소설가가 등장한다. 어느 날 그 작가에게 소설 속 등장인물이 찾아온다. 소설 주인공 헤럴드 크릭은 평범한 일상을 살던 국세청 직원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확히 설명하는 어떤 여자의 목소리를 듣다가 자신이 곧 죽을 걸 알게 되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나선 것이다. 얼마나 섬뜩한 일인가. 작가와 등장인물 모두에게.

바로 이 지점이었다. <보좌관>의 장태준 보좌관이 드라마 작가를 찾아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오랜 친구처럼 소주잔을 주고받으며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눌까. 만나지 않았어야 할 악연과 마주한 것처럼 서로 뜨악한 얼굴로 노려볼까. 이런 발칙한 상상은 신과 인간 사이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가끔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절대자 창조주의 시선을 상상해보곤 한다. 신의 눈에 나는 어떤 모습일까. 듣는 것만으로도 오글거리는 이 물음은 종교적인 색채가 강해 보이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반종교적인 의도가 숨겨져 있기도 하다. 영화 <사바하>에서 깊은 여운을 남긴 박 목사의 마지막 독백처럼.

“당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나이까?”

박 목사와 장태준 보좌관 둘 다 배우 이정재가 연기했다는 건 우연한 일치일까. 두 사람은 직업, 나이, 성격 등 모두 다르지만, 이상적인 무언가를 갈구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하늘에 계신 신의 눈에 <보좌관>의 장태준은 어떤 모습일까. 온갖 역경과 고난에도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하던 그가 “잠깐만 눈을 감으라”고,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어떤 선택을 하든 끝까지 믿어”달라 고 애원하는 걸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그렇다. 나는 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피조물인 장태준은 지금 행복합니까. 아니, 앞으로 그는 행복해집니까.

나에게 중요한 것은 장태준이 국회의원이 되는지 혹은 세상을 바꾸는지 여부가 아니다. 나는 그가 행복한지 아닌지 그것이 궁금하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요. 혹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요. 라는 질문에 대해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답을 내놓겠지만 결국엔 그 모든 답은 ‘행복’으로 수렴된다. 행복이란 목적지를 향해 우린 서로 다른 방향의 길을 걷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정치의 삶이 아니라 ‘삶의 정치’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이라는 부제를 가진 드라마 <보좌관>은 ‘행복’에 도달하는 서로 다른 방법론을 제시해준다. 세상을 움직여 자기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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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주인공 장태준은 행복에 실패한 사람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가 국회의원이 되고, 그가 꿈꾸는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이 된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행복 하리라고 확신할 순 없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성적순인 게 차라리 나은지 모른다. 노력만 하면 될 테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행복의 공식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행복은 ‘나’와 수많은 변수와의 ‘관계’에서 탄생한다. 나와 나 자신, 나와 타인, 나와 사회 등 다양한 관계 맺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삶의 밀도와 행복의 강도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모든 관계에 서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는 자기 자신과 충돌하고 반목한다. 극 초반 그는 이성민 의원과 의기투합하여 “깨끗하고 공명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깨달음에 송희섭 의원의 비리를 눈감아 주는 대신 보궐선거 공천권을 따낸다. 송희섭 의원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그가 건네주는 독주를 힘겹게 들이킨 그는 “내 세계를 깰 수 없다면 누군가에게 먹힐 뿐”이라며 이를 악물고 수치심과 분노, 그리고 슬픔을 참아낸다. “빛을 밝히려면 어둠 속으로 가야 한다” 고 되뇌며 흑화하는 그의 위악적 행보는 “내딛는 발걸음마다 후회가 찍혔다.”라는 그의 슬픈 고백과 맞물려 그가 얼마나 내적 갈등에 고통스러워하는지 잘 보여준다.

또한, 그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성공적이지 못하다. 정신적 멘토였던 이성민 의원은 그의 과오(선거 캠프 당시 받은 불법 선거자금) 때문에 자살하고 그를 이끌어줄 송희섭 의원과의 관계는 늘 위태롭다. 이성민 의원이 신념에 의해 움직이는 정의로운 인물이라면 송희섭 의원은 타인과의 모든 관계를 이해利害로만 바라보는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이다. 송희섭 의원은 여러 차례 위기를 겪지만, 그때마다 상대방의 약점을 공격하는 비열한 방법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법무부 장관이 되어 권력의 중심에 선다. 그런 송희섭 의원에게 장태준은 필요할 때 쓰고 버리는 일회용 인간에 불과하다.

연인이었던 강선영 의원과는 정치적 노선의 차이로 곧 헤어질 예정이며 자신을 믿고 따르던 후배들과의 관계 역시 불안하다. 그를 롤모델로 삼았던 인턴 한도경은 “여기서 끝까지 살아남아서 보좌관님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겠습니다”라고 선전포고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태준으로서는 송희섭을 얻은 대신 그를 제외한 모든 걸 잃은 셈이다. 멘토도, 연인도, 조력자도, 그리고 자신의 신념도.

그러니까 드라마를 보는 내내 내 시선을 끈 것은 장태 준이 아니라 송희섭이었다. 극 중 모든 등장인물을 통틀어 그가 제일 행복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그에게는 달성해야 할 목표만 있을 뿐, 세상을 바꾸겠다는 사명감도 누군가의 존경과 신뢰를 받아야겠다는 명예욕도 없다. 그는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옆을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뒤를 돌아보지도 않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에 충실하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그 어떤 고민도 죄의식도 없다. 그는 홀로 완벽하다. 아, 신은 정녕 우리를 버리시나이까. 행복은 윤리적인 얼굴을 하지 않는다.

 

 

* 《쿨투라》 2019년 9월호(통권 6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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