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_티모시 샬라메] 티모시 샬라메, 정-반-합의 변증법적 배우로 비상하다
[특별기획_티모시 샬라메] 티모시 샬라메, 정-반-합의 변증법적 배우로 비상하다
  • 김시균(매일경제 기자)
  • 승인 2019.11.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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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시 샬라메(23)를 생각할 때면 떠오르는 존재가 있다.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나르키소스다. 스틱스 강에 비춰진 자기 자신에게 반한 이 희대의 미(美)남자는 자기가 바라보는 수면 위 대상이 자기 자신임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신화 속 그가 살던 시대엔 거울이란 것이 없었으므로, 과연 스스로가 어떠한 모습인지 몰랐던 것이다.

그에게 만약 거울이 주어졌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아마도 그랬으리라. 그것도 완전히. 어쩌면 그에 대한 신화부터 다시 쓰였을 것이다. 우선은 죽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고, 그를 짝사랑한 에코가 슬퍼할 이유 또한 없었을 것이다. 거울로 나를 인식하고, 나와 대상(세계)을 분리해냈으니, 수면 위의 내가 나인 줄을 모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나임을 인식했으므로, 그런 나의 눈부심을 알았으므로, 더없이 흡족스러웠을 것이다. 이따금 샬라메가 21세기에 환생한 나르키소스는 아닐까, 라는 상상을 한다.

라캉의 ‘거울 단계’(상상계)를 미처 못 벗어난 유아기의 그가 아닌, 적어도 내가 누구인지 쯤은 인식하는 상징계의 그를. 1995년 뉴욕 헬스키친 태생. 182cm의 늘씬한 신장을 지닌 샬라메는 제 매력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다고 확신한다(전 세계 팬들을 향한 그의 서비스가 어떠한지는 인터넷 사진 몇 장만 봐도 확인이 된다). 흑갈빛 윤기나는 곱슬머리, 곧게 수평으로 뻗어내린 눈썹, 그 아래 우수에 젖은 두 눈망울, 미 간의 균형을 잡아주고 있는 가느다란 콧대···. 이것이 황금률이 아니면 무엇일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감독 루카 구아다니노·2018)의 마지막 숏을 떠올려 본다. 때는 한겨울이고, 이제 막 올리버(아미 해머)의 결혼 소식을 전화로 듣고 난 뒤다. 상심한 엘리오(티모시 샬라메)는 말 없이 화덕 앞에 가 앉아 있다. 소년 앞에 선 카메라는 가만히 그의 곁을 지킬 뿐이다. 그것만이 해줄 수 있는 전부라는 듯이. 그래서 미안하다는 듯이. 백그라운드 음악으로 <Visons of Gideon>(수프 얀 스티븐스)가 내리깔리고, 엘리오의 슬픔이 서서히 화면 안팎으로 번져간다. 그러다 결국은 무너지고, 그를 보는 우리 역시 무너진다. 이 환생한 나르키소스는 이후로 단숨에 국제적 스타 반열에 올라섰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전 후해 여러 편의 출연작이 개봉했지만 이 영화만큼의 파급력은 보여주지 못했다. <레이디 버드>(2018)의 카일, <핫 썸머 나이츠>(2018)의 다니엘, <미스 스티븐스>(2019)의 빌리, <뷰티풀 보이>(2019)의 닉 셰프 모두 엘리오의 복제품이자 변주곡이었다. 샬라메는 엘리오였고, 엘리오는 샬라메였다. 세상은 화덕 앞에서 흐느끼던 상심한 소년을, 엘리오로서의 그를 기억하려 했다. 그러고 싶어했다. 엘리오란 샬라메에게 ‘아우라’였을까, ‘멍에’였을까. 아마도 후자였지 싶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전히 그는 증명한 것보다 증명해보일 것이 많은 배우다. 그는 아직 완성태가 아니다. 가능태다. 여전한 신예이고, 신성이며, 가능성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의 새로움을, 색다름을, 그런 배역들을 갈망한다.

그러던 그 때, 이 영화가 도착했다. 지난 10월 6일 밤 샬라메가 제24회 부산국제영화 제 현장에 첫 방문했다. <더 킹: 헨리 5세>(OTT 기업 넷플릭스와, 플랜B엔터테인먼트 등이 협업한 대작이다. 8일 오전 취재진에게 처음 공개됐다.)라는 신작을 들고. 이뤄지지 못한 사랑으로 인해 신열을 앓던 소년은 여기에 없었다. 시대의 무게를 짐 지운 한 젊은 왕자가, 그 대신 서 있었다. 과연 그는 엘리오라는 알을 깨고 나온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 

시종일관 장엄하며, 사무치게 애처롭다. 이 모두 한 왕자의 어깨를 짓누른 숙명 탓이다. 원하지 않았으되, 감내해야만 하는 왕의 숙명,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굴레. 왕위를 거부하고 부랑아처럼 지내는 그는 영국 왕자 할(티모시 샬라메)이다. 왕궁 생활은 제쳐 둔 채 그는 빈민촌에서 기거하고 있다. 독재자인 아버지(헨리4세)를 경멸하는 그는 시대를 비웃으며 스스로를 파괴 중이다. 그것이 마치 최후의 저항이라는 듯이. 그러나 그뿐이다. 운명이라는 이름의 시계추가 이제 곧 그에게로 기울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권력의 중심부로, 피와 광기의 가시밭길로. 아비는 죽어가고, 아들은 복귀한다. 왕위를 물려 받을 이는 아들, 할 뿐이다. 그런 아비의 임종을 보러 온 그의 표정은 혈육의 그것이 아니다. 증오와 혐오, 원망으로 뒤범벅이다. 마치 이렇게 되뇌는 것 같다. ‘당신 같은 전쟁광이 되진 않겠다. 당신을 지우고, 새 나라를 세울 것이다.’ 헨리 5세의 즉위식이 치러진다. 남겨진 건 혼돈, 그리고 전쟁. 부패한 제후들이 왕의 사위를 둘러싸고 있다.

누구를 믿어야 할까. 알 수가 없다. 불신이 만연하고 고독은 점증한다. 도처로 위협. 그러던 어느 날, 왕의 목을 치러온 한 프랑스 암살자가 체포된다. 이 나라 왕이 ‘보냈다는’ 조롱 섞인 선물 또한 도착한다. 어찌할 것인가. 그는 고뇌한다. 그러곤 명령한다. 퇴역 기사 존 폴스 타트(조엘 에저튼)를 왕궁으로 불러들이라, 그리고 전쟁을 준비하라. 존은 빈민가 시절, 그가 유일하게 믿고 따르던 벗이자 멘토다. 영화는 평화를 꿈꾸었으되, 스스로를 배반하는 왕의 고뇌와 절망에 집중한다. 제 의사와 무관히 왕이 됐고, 왕국의 십자가를 짊어진 한 젊은 사내의 사무침과 광기에 골몰한다. 그래서 웃을 수가 없다. 우는 것 또한 금물이다. 요컨대 <더 킹: 헨리 5세> 에서 펼쳐지는 샬라메의 연기는 자못 비장하다. 유약한 미소년의 풋풋함이란 여기에 없다. 때때로 서늘하고, 때때로 숭고하다. 이것은 그간에 보지 못한 샬라메다. 지난 8일 오후, 부산국제영화제 현장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는 말했다. 

“저는 뉴욕 라과디아고교에서 13세부터 18세까지 연기를 배웠습니다. 그동안 많은 스승들을 거쳤는데, 그들이 항상 말씀하셨지요. ‘힘든 배역을 추구하라’, ‘자기 역량에서 벗어난 배역에 도전해 보라’. 어쩌면 제겐 ‘할’이 그런 배역이었는지도 모 르겠습니다. 이 작품으로 말미암아 제 연기 지평에 새로운 장이 열린 셈이니까요.” 그런 그를 향해 데이비드 미쇼 감독은 덧붙였다. “이처럼 젊고 소울 풀한 배우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샬라메는 자기 능력 너머의 연기를 완벽히 소화해냈습니다.”

<더 킹: 헨리 5세>는 셰익스피어 희곡 ‘헨리 5세’ 를 각색한 대서사시다. 극중 백미(白眉) 하나를 꼽자면 허허발판에서 펼치는 아쟁쿠르 전투를 들 수 있겠다. 불리한 지형을 딛고 선 영국군이 프랑스 군에 대승한 승전사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중후반부에 펼치는 이 전투가 상당히 사실적으로, 과장 없이 그려진다는 점이다. 영화는 여느 전쟁물과 달리 살육을 전시하지 않는다. 죽음을 스펙터클화하지도 않는다. 그저 지켜볼 뿐이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냉엄한 헨리 5세의 시선과 함께.

그리하여 다시 샬라메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껏 그의 진가의 일면만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녀림 뒤의 강인함을, 풋풋함 뒤의 카리스마를, 눈물 뒤의 냉정함을, 은연중 외면해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 킹: 헨리 5세>는 감추어진 그의 새 일면을 여과 없이 끄집어낸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요컨대 정(正·엘리오)과 반(反·헨리 5세)의 두 길목을 관통해 합(合)으로, 변증법으로, 종합의 배우로 마침내 이행한 것처럼 보인다. 환생한 나르키소스의 시대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소리다.

 

 

* 《쿨투라》 2019년 11월호(통권 6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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