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Theme] 한국영화의 기점은 '경성전시의 경'이다
[10월 Theme] 한국영화의 기점은 '경성전시의 경'이다
  • 김종원(영화평론가)
  • 승인 2019.10.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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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본론에 앞서 호칭문제부터 거론해야겠다. 흔히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한국영화를 거론할 때 대다수가 ‘조선영화’라고 말한다. 최근의 경우만 해도 김수남의 『광복 이전 조선영화사』(월인, 2011), 한상언의 『조선영화의 탄생』 (박이정, 2018)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설령 큰 제목이 ‘한국영화’로 되어있더라도 내용에 들어가면 ‘조선영화’로 병기(倂記)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조선배우’, ‘식민지 조선’과 같은 경우이다. 필자도 이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문제는 국가의 정체성과 국권침탈이라는 역사적 상황을 분리하여 설명할 수가 없다.

1895년 12월 28일 루이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에 의해 탄생된 영화가 중국과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소개된 1900년 전후의 시기는 대한제국시대였다. 그러나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10년도 안 돼 고종이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1907년 7월)된 후 1910년 8월 19일 한일합병과 함께 ‘조선’으로 국호가 바뀌었다. 따라서 《대한매일신보》가 《매일신보》로 제호가 바뀌고 잡지, 단체 등 모든 매체에서 ’대한‘의 표기가 사라졌다. 대부분의 한국영화 역사 연구자들이 자료로 활용해온 일제강점기의 신문과 잡지의 기사나 기고문에 쓰인 ‘조선’은 이와 같이 강요된 배경 아래서 나온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일제에 의해 사라진 ‘한국’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1919년 3월 1일 선조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조선독립 만세’가 아니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상해 임시정부가 굳이 대한민국을 국호로 삼았는지, 그 뜻을 깊이 헤아려야 한다. 필자는 이런 이유로 해방 전 우리의 영화역사를 기술함에 있어 인용문을 제외하고는 ‘조선영화’가 아니라 ‘한국영화’로 표기할 것이다. 그래야 질곡의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국가의 정통성과 독립성을 살리고 ‘일제강점기의 조선영화’ ‘해방 후의 한국영화’로 나뉘게 되는 모순과 맥락의 단절을 지양,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연장 상영한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

올해 한국영화는 100주년을 맞이한다. 왜 백년인가? 1919년 10월 27일 신파극단 신극좌의 활동사진 연쇄극(이하 연쇄극)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가 서울 단성사에서 개연된 날에 맞춰 한국영화의 기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해 1월 21일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제 고종이 승하하고 그 장례기간 중인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이어짐으로써 기미년(1919)은 민족사뿐만 아니라 한국영화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신극좌의 대표 김도산(金陶山)이 연출과 주연을 맡고 이경환, 윤화, 양성현, 김영덕 등이 출연한 <의리적 구토>에는 ‘무대에서는 도저히 실연(實演)할 수 없는 야외 활극장면을 극과 연접(連接)시킨’ 필름 1권 분량, 1천여 피트의 화면이 담겼다. 8막 28장으로 구성된 연극가운데 한강철교와 장춘단, 노량진 공원 등을 배경으로 찍은 12분 가량의 토막필름이 그것이다.

 

여형배우 시대의 무대와 야외 촬영

‘의리가 원수를 치다’라는 뜻을 지닌 <의리적 구토>는 당시 신파극이 즐겨 다룬 권선징악적 요소가 강한 작품이다. 안종화의 회고에 따르면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모친을 여의고 계모(김영덕) 밑에서 자란 청년(송산)이 재산을 탐내는 계모 일당의 간계에 부딪쳐 신변까지 위협 받는 처지에 이르자 죽산(이경환)과 매초(윤화) 두 의형제의 도움을 받아 응징에 나선다는 내용으로 돼있다. 그런데 김정혁은 안종화가 소개한 총론적인 개요와는 달리 각론적인 응징의 수단까지 언급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세 사람의 의형제가 있었다. 맛형되는 사람은 한 악당(梁承煥씨 坋, 10년 전까지 평양 ‘중앙관’에서 나까자역을 하고 있었다 한다)에게 살해를 당한다. 그 장형에겐 적은 애가 있었다. 이 애기를 맡어 길느며 원수를 찾는 끝 아우(李敬煥씨 扮)는 중형( 金陶山씨 扮)과 더부러 함께 복수코자 하나 그 형은 모든 것을 잊은 듯 매일매일 주색으로 소일하고 있다. (그렇나 이것은 가장(假裝)이요 사실은 형의 복수에 대한 감정은 한결 끌코 있다.) 악당들은 드듸어 둘째 아우의 가장에 속아서 그는 문제시 않고 셋째를 장님을 맨들어 바린다. 비록 장님은 되었으나 끝 아우는 어데까지든지 어린 애기를 안고 악당을 찾어 헤맨다. 또한 중형의 변심을 원망하는 것은 물론이다. 여기에 이 각본의 신파적 비조(新派的悲調)가 있는 것이다. 몇 해 지난 어느날 중형은 드듸어 악당을 잡을 기회를 찾어 일어섰다. 악당을 때려눕히고 장님돼 아우의 품에 안겨 있는 형의 아들을 이끌어다가 그 손에 칼을 집어주는 것이다.”

김정혁은 이 글에서 <의리적 구토>가 아닌 <의리의 복수>라고 적고 있지만 김도산, 이경환 등 배역이 같고, 혁신단 출신의 신극좌의 작품으로 ‘조선 영화사를 이루게 한 첫 실마리’, 또는 ‘우리 조선 사람과 풍경이 필님에 현상되어 스크린에 비친 최초의 것’이라고 말한 점으로 보아 <의리적 구토>의 오기였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관심을 끄는 것은 지금까지 언급되지 않았던 양승환(梁承 煥)이라는 배우가 맏형을 살해한 악당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그는 10년 전(어느 시점인지 분명치 않지만)까지 평양 중앙관(中央館)에서 ‘나카자’로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절에는 계모 역의 김영덕을 비롯한 남배우들이 여자 역할을 전담했다. ‘온나가다’로 불린 여형 (女形)배우는 신극좌의 김영덕 외에 문예단의 이응수(李應洙), 취성좌의 최여환(崔汝煥), 혁신단의 임용구(林容九) 등이 꼽혔다. 그 가운데서도 으뜸격인 여형배우는 미남인 이응수였다. 화류계 여성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아 염문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여형배우의 원조는 연쇄극 이전 <장한몽>(1914) 의 여주인공 심순애 역으로 장안 관객의 눈물을 자아내게 한 고수철(高秀喆)이었다. 그 뒤 조선문예 단의 연쇄극 <장한몽>(1920, 이기세)의 마호정(馬豪政)에 이어 민중극단의 이월화가 <영겁(永劫)의 처>(1922)로 등장하면서 여형배우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그렇다면 <의리적 구토>의 촬영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장춘단에서 서빙고로 넘어가는 산 중턱에 어느 첫 여름날 흰옷 바람의 청중들이 마치 싸움이라도 구경하듯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이들 군중의 시선은 저마다 포장을 젖힌 1915년식 포드 자동차에 쏠리고 있었는데, 그들이 유난히 눈여겨보는 것은 그 차에 타고 있는 세 명의 괴한이었다. 그들은 제각기 일본식 ‘합비’에 ‘당꼬 즈봉’을 입고 허리에는 번쩍거리는 장도(長刀)를 차고 있었다. 더욱 놀랍게도 백주에 가장행렬이라도 하는 듯 울긋불긋 분장을 하고 있었다. 괴한들이 산허리로 돌아가자 얼마 후 조금 떨어진 숲속에서 호각소리와 함께 청년 하나와 불란서제 목조촬영기를 멘 기사가 나타났다. 캡을 눌러쓴 사람은 일본인 카메라맨이었고, 얼굴이 거무잡잡하고 키가 작달막한 젊은 청년은 당시 단성사에서 명성을 떨치던 해설자의 원로 김덕경(金悳經)이었다. 덕경의 임무는 현장 지도와 통역이었다."

이렇게 촬영된 필름은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무대에서 연극이 벌어지다가 등장인물이 급히 퇴장한다. 함께 연극하던 배우가 뒤따라간다. 이때 호루라기 소리가 나며 무대 위에서 옥양목 스크린이 내려오고 거기에 활동사진(영화)이 비춰진다. ‘아!’ 놀랄 새도 없이 방금 무대에서 본 배우들이 활동사진에서 연기를 한다. 쫓기는 자가 대기시켰던 자동차에 올라타고 질주한다. 쫓는 자도 어디서 구했는지 자동차를 타고 쫓는다. 추적, 또 추적. 자동차가 5리쯤 밖에서 달려온다. 카메라는 고정돼 있고 그 자동차가 스크린 전면까지 와서 비켜질 때까지 한 5분. 다음 장면은 추적하는 자동차가 보이기 시작해 그것도 스크린에서 사라지기까지 5분쯤. 이렇게 자동차와 자동차가 쫓기고 쫓고 하다가 마침내 뒤 차가 앞차를 바짝 몰아 두 사람이 격투를 할 때 다시 호루라기 소리가 나며 옥양목 스크린이 위로 올라가면, 무대에 바로 영화 장면이 이어져 실제로 배우들이 격투를 한다. 희한하기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음은 박진의 회고담이다.

“영사 속에서 악한이 산으로 기어오르고 뒤 미쳐서 청년이 따라가며 막 뒤에서 말을 주고받고, 이렇게 한참 험한 산비탈에서 실갱이를 하다가 이윽고 악한이 잡힐 순간 당황한 그는 품에서 단도를 꺼내 청년을 찌르려고 한 순간 호각소리가 나고 순식간에 백포장이 올라갔다.”

앞에서 언급한 안종화와 박진, 조풍연의 글은 기억에 의존한 한계가 있으나 서사구조와 활극적인 요소, 상황 전개가 거의 같아 신빙성이 있고 서로 보완하는 구실을 해주고 있다. 아무튼 단성사의 경영주 박승필(朴承弼)이 제작한 <의리적 구토>는 1원 50전인 특석을 포함하여 1등 1원, 2등 60전, 3등 40전 등 네 등급의 입장료를 나눠 받았다. 군인과 학생들에게는 반액 할인의 혜택이 주어졌다. 쌀 소두 한 말에 80전 내외할 때였다. 가장 싼 3등급이 당시 설렁탕 네 그릇 값에 해당하는 요금임에도 불구하고 이 연쇄극은 첫날부터 ‘물밀듯이 들어오는 관객들’로 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입장객 가운데는 2백여 명이나 되는 권번(券番) 기생들도 보여 이채로웠다. 그래서 10월 30일까지 예정됐던 이 연쇄극은 이미 예고된 차기작 <형사의 고심>의 개연까지 미루며 연장 상연 끝에 지방흥행을 위해 20여 일(11월 17일)만에야 막을 내렸다.

일반 공연이 통상적으로 3일 정도였던 시기에 일어난 이변이었다. 제럴딘 파라와 에디 포로가 출연한 <명금(明金)>(1915, 프란시스 포드 감독) 유의 연속활극에 열광했던 애활가(愛活家)들이 아쉬운 대로 연쇄극의 영사막을 통해서나마 우리 배우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예사스런 일이 아니었다. 이를 계기로 경쟁관계인 신파극단 조선문예단(대표 이기세)과 혁신단(대표 임성구)도 각기 <지기(知己)>(1920)와 <학생절의(學生節義)>(1920)를 앞세워 연쇄극의 제작에 뛰어든다.

 

부정적 평가에도 효시 예우받은 연쇄극

그러나 일부 영화인들은 연쇄극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윤백남은 ‘속악한 공연 행위’라며 ‘연쇄극이란 결국 말을 타고 쫓고 자동차로 경주하며 위험을 무릅쓰게 하는 등속의 활동(사진)으로 갈채나 얻으려는 주객이 전도한 변태극’이라고 비판했다. 임화도 “연쇄극 필름을 우리가 영화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은 활동사진을 영화라고 부르지 못하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활동사진만치도 독립된 작품이 아니오, 연극의 한 보조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 후 영화학계의 조희문과 김수남 역시 ‘연극의 변형된 양식’(255쪽), 또는 ‘영화가 아닌 확대된 연극’이라고 하여 윤백남과 임화의 견해에 동조했다. 그런데 1963년 윤봉춘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을 비롯한 안종화, 이구영, 이규환 등 초창기의 원로 영화인들은 논의 끝에 <의리적 구토>가 상연된 날을 ‘영화의 날’로 지정하고 공보부의 승인을 받았다.

이영일(『한국영화전사』, 1969, 한국영화인협회 간행, 58쪽)과 김종원(『우리영화100년』 현암사, 2001, 52~53쪽)도 각기 ‘불안전한 대로 한국인의 자본과 연출, 출연으로 만들었고’, 비록 ‘연극에 편승한 한계가 있으나 우리의 손으로 연기를 촬영기 필름에 담아낸 최초의 산물‘이라는 점을 들어 ‘한국영화의 기점’으로 삼은데 대해 공감하였다. 이는 <의리적 구토>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민족예술의 염원인 제작의 꿈을 우리 힘으로 이루어 냈다는 데에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한 윤백남의 모순된 전제와 일치되는 결과였다.

<의리적 구토>의 감독 김도산(1891~1921)은 이 연쇄극(키노드라마)에 앞서 일본으로 건너가 2주일 동안 전기응용 기계 키네오라마(kineorama)의 작동 방법을 익히고 돌아올 만큼 새로운 기재에 관심이 많았다. 키네오라마는 구름이나 비, 파도 등 파노라마에 여러 빛깔의 광선을 비쳐 경치를 변화시켜 보이는 효과장치로 연쇄극에 대한 도전은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서울 충무로 초동 태생인 김도산은 미션계인 상동(尙洞)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연극계에 발을 내디딘 것은 1911년경, 네 살 위인 임성구가 이끄는 신파극단 혁신단에 입단하면서부터였다. 이때까지 본명인 영근(永根)으로 활약했다. 원각사 계열의 예성좌가 해산되자 일부 단원을 포함한 이경환, 변기종, 김영덕 등 연극인 30여 명을 모아 대구의 부호 정인기(鄭麟基)의 후원 아래 신극좌를 창립하고 그 단장이 된다. 그때가 26세였다. 이 무렵 그는 일본의 구극과 신극을 절충해 만든 <의기남아(意氣男兒)>와 <비파성(琵琶聲)>, <천리마>, <정을선전(鄭乙仙傳)> 등을 무대에 올린다.

그가 연쇄극 <의리적 구토>를 내놓게 된 것은 1918년 황금좌의  창립 2주년 기념공연을 위해 한국에 온 일본 세토나이카이극단 (瀨戶內海劇團)의 <선장의 처>를 보고 자극을 받은 데서 비롯된다. 이 연쇄극이 성공하자 잇따라 <시우정(是友情)>, <형사의 고심>(이상 1919년), <의적(義 賊)>, <경은중보(經恩重報)>(1920년), <천명(天命)> (이상 1920년) 등 10여 편의 연쇄극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한강에서 연쇄극을 찍다가 입은 낙상 사고와 겹친 늑막염으로 말미암아 1921년 7월 26일 밤 11시, 서른한 살 나이로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세계영화사상 연쇄극이 영화의 기점(起點)이 된 나라는 없다. 한국이 유일하다. ‘식민지 조선’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모든 상권은 일본인들이 지배했고 기술은 그들이 말하는 내지인들에게 의존해야만 했다. 연쇄극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임화 역시 ‘조선’에서 활동사진이 제작될 수가 없었던 이유로 ‘자본의 결여’를 들었을 정도였다.

단성사 경영주 박승필은 ‘조선인 배우’의 활동사진이 나오면 환영을 받을 줄 알면서도 투자할 여력이 없어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오천여 원의 거액’ 을 들여 연쇄극 형태로나마 활동사진을 선보인 것이다. 말이 쉽지 이 투자액은 몇 년 후 무성영화가 자리 잡기 시작한 1927년 후반의 기준으로도 부담스러운 액수였다. ‘조선서 사진(영화) 한 가지(6, 7권)에 5천 원 이상들인 작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기배우의 출연료가 백 원 미만이던 시절이다. 192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서울에 8, 9처의 프로덕션이 있었으나 2천 원 가까이 드는 촬영기는 조선키네마와 단성사에 각 한 대씩 두 대밖에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임대해 쓰는 다른 영화사에서는 어쩔 수 없이 고장을 각오하고 쓸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제작 환경이 열악했다.

한국은 이런 상황 아래서 1900년 전후에 외국영화가 들어온 지 10여 년이 흐른 뒤에야 배우의 모습이 찍힌 필름을 겨우 연극을 통해서나마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강조돼야 할 점은 <의리적 구토>에만 관심을 가진 나머지 이청기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실사영화 <경성전시의 경>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필자도 <경성전시의 경>에 대해 ‘기록영화의 실상’ 이라는 별도의 항목(『우리영화 100년』, 60~61쪽)에서 <의리적 구토>와 같은 날 탄생하고 공생한 ‘일란성 쌍둥이’ 같은 존재라고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명시적으로 기점과 연결시키지 못했다.

 

2. 바로잡아야 할 ‘경성 전시의 경’의 위상

앞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지금까지의 한국영화사는 실사영화 <경성전시(京城全市)의 경(景)>을 도외시한 채 <의리적 구토> 위주로 기술(記述)돼 왔다. 연쇄극을 활동사진의 관점이 아니라 ‘변종 연극’으로 본 윤백남이나, 이와 반대로 한국영화의 효시라는 관점에서 접근한 동아일보는 물론 그 뒤의 임화, 김정혁을 포함한 박누월(조선영화발달사 『한국 영화배우술』 수록, 삼중당서점, 1939)과 후속 연구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성전시의 경>의 존재를 외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음에 인용하는 성아(星兒: 임화의 필명)의 견해는 실사영화에 대한 편견적 인식(괄호 부분)을 드러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조선에서 최초로 조선인의 인정풍물을 넣은 (실사물은 제외하고) 흥행 목적으로 박은 사진은 4, 5년 전 조선영화의 최초기라 할 만한 연쇄극의 전성시대에 삽입 목적으로 한 필름 제작이 그 효시일 것이다.” - 「위기에 임한 조선영화계」 성아, 《매일신보》, 1926. 6. 13.

이처럼 애초부터 실사물을 제외하고 흥행 위주의 연쇄극에 가치를 두었다. <경성 전시의 경>은 자연히 관심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연쇄극 중심의 기점 논란은 결국 실사영화에 대한 논의 자체를 무력하게 만드는 블랙홀로 작용했다. 엄연히 <경성 전시의 경>이라는 정답이 지척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과함으로써 망각되었다. 역으로 들어오는 <열차의 도착>이나 ‘공장에서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은 고작 50초~2분 길이의 루이 뤼미에르 형제의 단편을 새삼 거론할 필요 없이 이를 도입한 영국이나 이탈리아, 미국은 물론, 동양권의 실사영화도 영화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더욱이 한국에 앞서 연쇄극을 개발한 일본은 1898년 도쿄의 고다시(小西)사진관에 근무하는 아사노 시로(淺野 四郞)가 찍은 단편 <둔갑한 지상보살>과 <죽은 자의 소생>을, 중국은 북경의 평타이사진관(豊泰照 相館)이 촬영한 20여 분 분량의 경극 <당쥔산(定軍 山)>(1909)을 각기 영화의 기원으로 삼았다.


한국영화 기점으로서의 ‘경성 전시의 경’

여기서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실사영화 <경성 전시의 경>은 연쇄극 <의리적 구토>보다 먼저 상영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보도는 이 사실을 객관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영사된 것이 시작하는데 위션 실사(實寫)로 남대문에셔 경셩 전시(京城全市)의 모양을 빗치이매  관객은 노상 갈채에 박수가 야단이엿고 그 뒤나  졍말 신파 사진과 배우의 실연 등이 잇셔셔 쳐음 보는 됴션 활동샤진임으로 모다 취한 듯이 흥미잇게 보아 젼에 업는 셩황을 일우엇다더라.” -‘단성사의 초일 관객이 물미듯이 드러와’ 《매일 신보》, 1919. 10. 28

실험결과 ‘서양사진에 뒤지지 않을 만큼 선명하고 미려(美麗)한 사진’(‘조선활극 촬영 단셩사에셔 영샤한다’ 매일신보, 1919. 10. 26)으로 인정된 <경성 전시의 경>에는 앞의 기사에 나왔듯이 남대문 정거장과 한강 철교, 장충단, 청량리, 뚝섬(纛島), 홍릉, 살곶이다리(箭串橋) 등 경성 풍경(《매일신보》 10월 27일자 광고)이 담겼다. 이 같은 10여 분 내외의 화면 을 보면서도 관객들이 줄곧 박수갈채를 보낼 만큼 반응이 좋았다. 단성사 경영주 박승필(朴承弼)이 연쇄극 <의리적 구토>와 함께 제작한 <경성 전시의 경>은 일본 대판의 천연색활동사진회사(약칭 天活) 소속 촬영 기사가 촬영했다. 지금까지 조선에 활동사진이 없어 유감으로 여긴 박승필이 오백 원을 들여 초청한 후 5, 6일 동안 내지인의 연쇄극을 먼저 찍게 한 다음 10월 7일부터 명월관 지점과 홍릉 등의 촬영에 들어갔다. <의리적 구토>와 병행한 촬영이었다. 그 촬영기사가 미야카와 소우노스케(宮川早之助)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범성 편저 한국영화진흥 조합 발행 『한국영화총서』(1972)와 김종욱 편저 『한국영화실록』(국학자료원, 2007)이 미야카와 소우 노스케로 명시한 대표적인 예이다.

다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 사료를 찾을 수 없어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일단 미야카와 소우노스케를 <경성전시의 경>의 촬영자로 추정하고 언급하고자 한다. 미야카와는 일본 천활 소속 촬영기사로서 1920년 전후하여 한국에 들어와 활동했다. 그 예로 경성 본정(지금의 충무로) 1정목 51번지에 선만활동사진상회(鮮滿活動寫眞商會)를 차려 운영(근하신년 광고, 조선신문 1926년 1월 1일)한 점을 들 수 있다. 이 무렵에 극동키네마의 <괴인의 정체>(1927, 김수로)와 서울영화사의 <고향>(1928, 안종화)을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가 제1회 영화제 개최에 앞서 조사 발표한 ‘조선영화제작연대보(朝鮮映畵製作 年代譜)’(1938년 11월 28일)에는 이 영화의 촬영자로 미야카와(宮川)라는 성이 기재돼 있어 이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은 미야카와는 1930년대 중반까지 영화배급 사업을 했다. 이 시기에 <세계 횡단>(1931), <사이좋은 친구>(1932), <생존의 투쟁>(1932), <해저>(1934) 등 일본과 미국 등 지의 이른바 사회교화, 민중오락 등의 취지에 부합되는 해외영화를 보급하여 조선총독부에 의해 추천 영화로 선정되기도 했다.   

<경성전시의 경>과 <의리적 구토>의 로케이션 장면을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미야카와 소우노스케는 1884년(명치 17년) 3월 18일 일본 돗토리현에서 태어났다. 1908년 유메야 아츠키치(梅屋 圧吉)를 우연히 만나 M 파테상회에 합류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다. 1914년경 천연색활동사진회사 촬영 부에 입사한 해에 어머니와 동생을 잃고 오오타라는 사람의 주선으로 반도로 건너가게 된다. 1921년 5월이다. 미야카와의 손녀인 아츠코(敦子)는 오오타를 <월하의 맹서>(1923년)의 촬영을 담당한 오오타 히토시(太田同)로 여기기고 있다. 그는 할아버지에 대해 “영화도 반도도 모두 사랑했던 듯 아름다운 경성의 풍경 등 기록 영화를 많이 촬영하고 있었던 것 같다는 말을 들어서 알고 있다.”고 했다.

미야카와의 신상에 대해서는 안종화의 『한국영화 측면비사』를 번역한 일본인 나가시마 마사하루(長沢 雅春)가 이 책(『한국영화를 만든 사람들- 1905~45년』을 번역하며)의 출간에 앞서 일본 사가현 발행 ‘사가신문(佐賀新聞)’(2002년 9월 2일자)의 ‘논단 사가’에 초창기의 일본인 촬영기사 미야카와 소우노스케를 언급한 것을 계기로 그의 손녀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남는 의문은 미야카와가 한국에 온 것이 1921년 5월이 맞는다면 <경성전시의 경>과 <의리적 구토>의 촬영 시기와 2년 이상의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반면에 경성의 풍경 등 기록영화를 많이 촬영했다는 전언은 <경성 전시의 경> 외에 같은 해 <경성 교외의 전경>(11월 1일, 단성사) 등 실사영화를 찍은 기록과 부합돼 경청할 만하다. 다만 후손으로서 전해들은 얘기라면 1921년보다 ‘반도’ 체류 연도가 앞당겨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김정혁은 <의리적 구토>의 촬영기사가 동경에서 온 다츠나미 겐죠(立波謙造)라고 했다.

아무튼 여기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경성 전시의 경>을 찍은 사람이 일본인이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이점이 결정적인 결함이 될 수 없음은 외국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스페인의 경우, 그들이 내세우는 최초의 영화 <바르셀로나의 푸에르토광장>(1896)을 찍은 사람도 자국인이 아닌 프랑스 리용 출신의 뤼미에르파 촬영기사 알렉상드르 프로미오였다. 영화 자체가 외래문화의 산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더욱 그러하다. 

영화 불모지에 태동의 싹 틔운 박승필

중요한 것은 이 영화를 누가 찍었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만들었느냐에 달려있다. 제작자 박승필(朴承弼, (1875~1932년)을 평가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박승필은 이 나라에 활동사진을 새로운 대중 매체로 전환시키고 뿌리내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최초의 극장 협률사에 이어 상설관 구실을 해 온, 동대문전기회사 활동사진부를 인수하고 이후 1908년 9월 6일, 광무대로 명칭을 바꾸면서 경영 수완을 발휘했다. 처음에는 창극, 연극, 재담, 마술 등의 공연으로 극장을 운영했으나, 1913년 9월부터 2년 전 일본인 다무라 미네(田村)에게 넘어간 단성사의 경영권을 인수하고 1915년 2월에는 화재로 소실된 본관을 신축, 3층 벽돌 건물로 확장하는 등 단성사를 궤도에 올려놓았다. 1918년 6월 중순부터 영화 상설관으로 면모를 갖추고 우미관 소속 서상호(徐相昊)를 비롯한 김덕경(金悳經), 이병조(李丙祚), 최병룡(崔炳龍) 등 인기 변사 6명을 유치하여 진용을 강화하면서 극장 흥행계의 대부로 자리를 잡았다. 이런 시기에 <명금(名金)>(1915, 프란시스 포드 감독)을 비롯한 <채플린의 권투>(1915, 찰리 채플린), <동도(東道)」>(1920, D. W 그리피스) 등 당대의 인기 명화들을 상영하여 경쟁력을 높였다.

이렇게 외국 영화만 편애한다는 세간의 비판을 받은 박승필이 연쇄극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신극좌의 대표 김도산(金陶山)에게 제작비를 제공하고 연쇄극 <의리적 구토>와 함께 실사영화 <경성 전시의 경>을 찍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박승필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단성사에 촬영부를 신설하여 극영화의 제작에 들어간다. 그 결실이 바로 당시로서는 유일하게 감독(박정현)과 촬영(이필우) 등 스태프 전원을 한국인으로 기용한 최초의 한국영화 <장화홍련전>(1924)이다. 이 영화는 이에 앞서 일본인 하야카와 마스타로(早川增太郞, 1879~)가 세운 동아문화협회의 <춘향전>(1923)을 능가하는 흥행 성과를 올리게 된다. 경제의 주도권이 일본인들에게 있었던 척박한 제작 환경 아래서 ‘조선인 배우의 활동사진은 아주 없어서 유감’으로 여기면서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단성사주 박승필이 그나마 많은 제작비(5천 원)를 투자하여 ‘반 쪼가리’ 연쇄극과 단편 기록영화나마 찍게 된 배경에는 시대를 앞서간 그의 안목과 탁월한 흥행감각, 이와 같은 도전정신이 있었다. 그가 ‘속악한 상업적 계산’만으로 이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한국영화의 기원은 ‘도표로 본 한국영화의 기점’(별표)에 나타나듯이, 제작자 박승필을 중심축으로 실사영화 <경성 전시의 경>과 활동사진연쇄극 <의리적 구토>라는 하드웨어를 미야카와 고우노스케와 김도산이라는 두 소프트웨어가 받쳐주는 삼각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경성 전시의 경>은 정체성은 없으나 흥행성이 있는 <의리적 구토>에 힘입어 관객동원에 도움을 받은 대신 <의리적 구토>는 정체성이 떨어지는 연쇄극의 약점을 <경성 전시의 경>을 통해 보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두 작품은 같은 날 박승필이라는 한 모체서 태어난 특수한 관계이다.
 

맺는 말

<경성 전시의 경>이 <의리적 구토>의 제작 과정에서 나온 부수적인 산물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앞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세상에 먼저 공개된 것은 <경성 전시의 경>이다. 뿐만 아니라 필름을 기본으로 하는 영화의 요건과 독자성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동안 <의리적 구토> 위주로 기술돼 온 한국영화의 출발점이 <경성 전시의 경>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제 실체는 없어도 <경성전시의 경>은 변수가 아닌 상수, 한국영화의 원류(原流)로서 평가되어야 한다. 따라서 앞으로의 과제는 <의리적 구토>의 그늘에 가려 역사의 사각지대에 방치됐던 <경성 전시의 경>의 위치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의리적 구토>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경성 전시의 경>을 태어나게 만든 것이 바로 이 연쇄극이기 때문이다. 박승필과 김도산의 <의리적 구토>가 없었다면 이 실사영화는 아예 세상에 나올 수조차 없었다. 한국영화는 이처럼 태생기부터 상호보완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다행히도 이 실사영화로 하여 자칫 실종될 뻔한 1919년 10월 27일 한국영화의 기점은 분명해졌다. 두 작품을 함께 기려야 하는 이유이다. 한국영화 100년에 즈음하여 기대를 걸어보는 것은 시카고 태생의 미국 여행가 버튼 홈즈가 대한제국 시대에 서울을 방문하여 촬영한 기록영화 <코리아>(1900 추정)를 영상자료원이 입수했듯이, <경성 전시의 경>의 필름이 어디에선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바람이다.

 

1.  안종화, 「朝鮮映畵 發達의 小考 -二十年 苦鬪의 荊棘路-」, 조선일보, 1938, 11,20~11,27

2.  안종화, 『한국영화측면비사』 주요 연쇄극 작품의 내용, 46쪽, 춘추각, 1962.

3.  金正革, 『조선영화사』. 2. 조선영화의 탄생, 95쪽. 《인민평론》,1946, 3월 창간호

4.  나카자(なかざ/ 中座), 극장의 출입구를 지키는 문지기, 흔히 ‘극장의 기도’로 불린다.

5. 안종화, 같은 책, ‘기녀들과의 염문 속에’ 42쪽

6. 안종화, 같은 책. ‘최초의 활동사진 촬영된 필름은’, 39쪽, 

7.  조풍연, 『서울잡학사전』 ‘연쇄극’, 222쪽, 정동출판사, 1989. 김종원, 정중헌 공저 『우리영화100년』(2001, 현암사) ‘기점으로서의 <의리적구토>와 김도산’ 48쪽에 처음 인용.

8. 박  진, 『한국연극사-1기(1902~1930) 예술원, 1972, 160~162쪽.

9. 매일신보. ‘단성사의 초일 관이 물미듯이 드러와. 1919. 10,28.

10.  매일신보, 연야 만원어례(連夜滿員御禮), ‘의리적구토’ 신파활동사진은 예뎡과 갓치 금삼십일까지 하고십일월일일부터 계속 하야 신파활동사진 ‘형사의 고심’을 하잣더니 련야의 대만원으로 인하야 잇흘동안 더 연긔하야 십일월삼일부터 대대뎍 상쟝하옵기 근고합니다. 당셩샤 흥행부

11.  매일신보, 신파연쇄극 고별 대흥행 단셩사에서, 십오일부터. 1919, 11,15.

12.  <명금>(1915, 프란시스 포드 감독), 1916년 우미관에서 첫 공개된 이후 인기를 모은 대표적인 연속 모험극. 여주인공 기치구레(Kitty Gray)를 도와 숨겨진 황금을 찾아 모험에 나서는 주인공 로로(Roleau) 역을 맡은 에디 폴로(Eddie Polo)는 곡마단 출신 배우로 이 영화 이후 ‘로로’로 불렸다. 총22부 (상영시간 440분). 《녹성》(1919)지 17쪽, 「활극의 인기남 로로의 니야기」 참조.

13.  윤백남, 「연극과 사회 並하야, 조선현대극단을 논함」, 동아일보, 1920,5,4~16.

14. 임  화, 「조선영화발달소사」, 《삼천리》 197쪽 1941, 6월호,

15.  조희문, 「연쇄극 연구」, “연극의 변형된 양식일 수는 있지만 영화라고할 수는 없는 것”, 《영화연구》, 15호, 255쪽. 한국영화학회, 1999.

16.  김수남, 「연쇄극의 영화사적 정리와 미학적 고찰」, ‘영화가 아닌 확대된 연극’ 58쪽, 《영화연구》, 20호, 한국영화학회, 2002.

17.  『한국영화자료편람』, 영화진흥공사, 1977. ‘한국영화사연표’(1903~1976)에는 1963년 ‘영화의 날’ 제정위원회가 1919년 한국인에 의해 최초로 제작된 연쇄극 <의리적 구토>가 상영된 10월27일을 영화의 날’로 정했다고 기록. 이영일의 『한국영화전사』(1969, 영화인협회 간행)에는 1966년 1월25일 영협 회장 윤봉춘은 원로영화인들의 의견을 모아 한국영 화의 기점을 ‘영화의 날’로 결정하는 것이 옳겠다는 회한(回翰)을 공보부에 보냈다고 언급하고 있다.(59쪽) 그러나 ‘영화의 날’ 기념행사는 이미 63년부터 시행되었다.

18. 매일신보, 「京城新劇座의 刷新」, 1919, 6,23 광고.

19.  김종원, 『우리영화 100년』 기점으로서의 ‘의리적 구토’와 김도산, 55쪽, 현암사. 2001.

20. 임  화, 「조선영화론」, 《춘추》, 1941, 4월호, 88쪽.

21. 매일신보, ‘조선활극촬영 단셩사에셔 영샤한다’ 1919, 10,26

22.  매일신보, ‘동트는 조선 영화계’(3), 명우의 월수입이 ‘겨오’ 백원 내외!, 1927, 10,21.

23.  매일신보, 「동트는 영화계」(4) ‘서로 꺼는 촬영기, 경성에 단 두 대’ 1927, 10,23.

24.  이청기, 「개척기 정리상의 문제점」의 (2)항목 ‘한국영화 창생에 대한 문제’에서 <경성전시의 경>을 <의리적 구토>와 함께 묶어 국산영화 흥행의 효시가 되었다고 언급했다. 격월간 《영화》, 1979, 9~10월호, 21쪽.

25.  동아일보, 「조선영화계 과거와 현재」 (1) 영화효시는 연쇄극, 동아일보, 1925, 11,18.

26.   『일본영화의 이해』 , 요모타이누히코 지음, 박전열 옮김. 최초의 영화촬영, 52쪽, 현암사, 2001.

27.  『중국영화사』 , 슈테판 크라머 지음, 황진자 옮김. 청조말기의 민국시기의 영화, 30쪽, 이산, 2000.

28.  매일신보, ‘團成社의 初日 관객이 물미듯이 드러와.’ …영사된 것이 시작하는데 위션 실사(實寫)로 남대문에셔 경셩 전시(京城全市)의 모양을 빗치이매  관객은 노상 갈채에 박수가 야단이엿고 그뒤는 졍말 신파 사진과 배우의 실연 등이 잇셔셔 쳐음 보는 됴션 활동샤진임으로 모다 취한듯이 흥미잇게 보아 젼에 업는 셩황을 일우엇다더라.” 1919, 10, 28  

29.  『世界の映畵作家(31)/日本映畵史』, 1976년 キネマ旬 발행 연표에 따르면 천연색 활동회사는 1914년 자본금 55만 엔으로 설립되었다고 한다.

30. 매일신보, ‘활동연쇄극 영사(影寫) 오는 칠일브터’ 1919, 10, 8.

31.  『한국영화총서』(1971, 전범성 편저, 영화진흥조합 발행)에는 미야카와 소우노스케가 <경성 전시의 경(景)>(1919년 10월27일, 단성사) 외에 <경성 교외의 전경>(1919년), <고종인산실경(高宗因山實景)>(1919), <의적>(1920, 김도산), <경운중보>(1920, 김도산), <명천>(1920, 김도산) <춘향전>(1923), <비련의 곡>(1924) 등을 촬영한 것으로 되어 있다.

32.  『朝鮮總督府 キネマ키네마』, ‘추천영화명’, 27~28쪽, 조선총독관방 문서과, 1938.

33. 김정혁, 「조선영화사」. 조선영화의 탄생, 95쪽 1946년 4월호, 95쪽.

34.  『스페인영화사』 장클로드 스갱, 정동섭 옮김, ‘무성영화시대 개척자들’(1896~1930) 10쪽, 동문선, 2002

 

 

* 《쿨투라》 2019년 10월호(통권 6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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