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Theme] 혁신적 스타일로 시대를 앞서간 '하녀'
[10월 Theme] 혁신적 스타일로 시대를 앞서간 '하녀'
  • 곽영진(영화평론가,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 승인 2019.10.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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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는 국내 전문가를 대상으로 ‘역대 최고의 한국영화’를 뽑는 각종 설문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차지해 왔다. 영화는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던 한 가장이 젊은 여인을 하녀로 맞이해 유혹당한 후 파국을 맞이한다는 내용의 스릴러. 개봉과 동시에 ‘하녀’와 주인남자의 부적절한 관계라는 파격적인 소재로 주목 받았고 당시로서는 폭발적이라 할 만한 22만 관객을 동원하며 그 해 최고 흥행작에 올랐다. <하녀>는 영화를 본 해외 전문가와 시네필에게도 지울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강렬하고 열정적으로 밀실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영화가 서양에서 오직 소수의 마니아들에게만 알려져 있다는 사실은 세계영화사의 크나큰 손실과도 같다.”   – 마틴 스콜세지 감독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웠다. 단지 보기 드문 놀라운 이미지메이커로서의 김기영을 발견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 같은 예측 불가능한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사실 때문이다. 한마디로 <하녀>는 ‘충격’이다.” “한국에서 루이 부뉴엘의 형제를 발견하는 것!”  - <까이에 뒤 시네마> 전 편집장 장-미셸 프로동

길고도 험한 식민 지배와 전란의 참화로부터 벗어난 지 얼마 안 돼 모든 물자와 인력이 부족한 최빈국이며 영화 후진국인 곳에서 1960년에 나온 작품 <하녀>는 분명 걸작이다. 장르의 진화와 스타일의 혁신, 정신분석적 통찰 그리고 사회적 비평의 도달 등 미학적으로 선진적이며 한편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기술적 완성도와 세련미 그리고 대담한 표현 수위에 대해 혹자에 따라 미미한 흠결이 거론될 수 있겠으나 영화테크닉을 포함, <하녀>가 성취한 모든 수준과 가치는 그런 지적을 무시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주 당당하게.

작곡가이며 대기업 방직공장의 음악동호회 선생인 동식(김진규)은 중산층 집안의 가장. 아내(주증녀)와 다리가 장애인 딸 그리고 아들(안성기)과 행복하게 살지만, 최근 장만한 2층집과 피아노 할부금 때문에 바느질 부업을 하는 아내와 함께 돈에 쪼들린다. 그는 약 40세 정도로 보이며 방직공장 일자리에 애착이 많다. 성격이 유약(柔弱)한 한편 준수한 용모와 매너로 여공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고, 한 여공에게서 연애편지를 받기에 이르자 이 사실을 사감에게 알린다. 이 일로 그녀는 공장을 그만두고 직장동료 경희(엄앵란)가 동식의 집으로 피아노 개별레슨을 받으러 온다. 새 집으로 이사한 이후로 아내의 몸이 쇠약해지자 동식은 경희에게 부탁해 가정부(이은심)를 소개받는다. 딱히 직업도 경력도 없는 시골에서 상경한 처녀로 극중 히로인이다. 임신한 아내가 친정에 간 사이 하녀는 동식을 유혹해 육체관계를 맺는다. 3개월 후 하녀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하녀를 설득해 계단에서 굴러 낙태를 하게 만들고, 이후 이상성격의 소유자처럼 변해가는 하녀의 협박과 집요한 복수가 시작된다. 결국 하녀는 부부의 아들을 계단에서 떨어져 죽게 한다. 하지만 이것은 복수의 서곡에 불과하다.

<하녀>는 다양한 상징성을 가진 공간과 세트, 소품 그리고 명암대비를 자본주의사회의 만연한 격차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치로 사용하기보다 인간의 욕망, 그 생물학적 본능과 집착을 보여주는 장치로 사용한다. 근대화의 일부 낯선 풍경과 쥐약 등 끔찍한 소품의 배치, 식모나 가정부가 아닌 하녀라는 비현 실적 호칭의 사용이나 동식의 문어체적인 말투도 영화의 양식화를 돕는다. 이런 점들은, 전작이며 걸작인 <10대의 반항>(1959) 등과 달리 김기영이 사실주의를 벗어나 표현주의로 선회한 것이며 고 이영일 평론가가 말한 ‘마성의 미학’을 전격 선보인 것 으로 파악된다.

<하녀>는 이후에도 <화녀>(1971), <충녀>(1972), <반금련>(1981), <화녀 ’82>(1982) 등 여성 캐릭터의 집착과 반란을 줄기차게 다뤄온 그의 일련의 작품들에 원형이 되었다. 주의할 점은 인간 정신의 심연, 그 욕망·충동의 집요한 천착과 파헤침 은 마르크스주의적인 해석, 곧 계급의 강조와 상충된다는 것. 생전에 그가 밝혔듯 프로이트적인 관점이 중요하다. 또는 이것을 우위에 둔 두 사상의 소통과 포섭이 유효하리라. 정욕의 발산을 넘어 임신을 계층상승의 도구로 이용하려 하고, 한편 배 속의 살아있는 아기를 낙태시키며, 또한 세상의 비난과 회사의 해고가 두려워 아들이 살해된 사실을 은폐하는 등 인물들의 영혼 에 대한 묘사는 매우 비판적이고 신랄하다.

<하녀>의 장르는 기본적으로 멜로나 호러가 아닌 스릴러로 본다. 하지만 불륜치정극다운 내용 전개로 그 멜로적 변주를, 또한 괴물 같은 여성캐릭터의 창조와 함께 스릴러가 수반하는 공포감보다 훨씬 공포감으로써 호러-스릴러적 장르 변주와 혼성을 주장할 수도 있다. 어찌 됐든 높은 수준에서 장르적 진화를 시현했음이다. 김기영은 박찬욱 등 후대 감독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하녀>는 ‘무시무시한’ 존재로서의 여성과 그 욕망이, 이것을 원작으로 한 임상수의 <하녀>(2010)는 권력에 대한 은유가 핵심 개념이다. 두 작품과 오버랩 되면서도 사뭇 다른 이야기인 <기생충>(2019)은 실업 사태와 사회안전망의 붕괴가 야기할 계급 격돌을 메시지로 던진다. 

<하녀>는 장르의 진화와 스타일의 혁신, 독창적 내러티브와 이미지의 창조, 정신분석적 툴의 선진적 도입, 그리고 시대를 독해하도록 돕는 사회적 비평성의 획득 등 미학적으로 매우 훌륭한 걸작이다.

 

 

* 《쿨투라》 2019년 10월호(통권 6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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