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Theme] '기생충' 계단 데칼코마니의 잔혹한 지옥도
[10월 Theme] '기생충' 계단 데칼코마니의 잔혹한 지옥도
  • 정민아(영화평론가, 성결대 교수)
  • 승인 2019.10.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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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인지 공교롭게도 한국영화가 100년이 되는 해인 2019년에 <기생충>은 우리 모두가 그토록 열망하던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들어올렸다. 봉준호 감독은 수상 소감에서 “한국영화 100주년에 주는 선물”이라고 말했다. 그 말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한국영화가 1919년에 와서야 만들어지게 된 것을 알았다. <의리적 구토>(김도산)가 상영된 1919
년 10월 27일을 봉준호는 염두에 두고 있었고, 그는 세계에 한국영화사를 알리는 것뿐만 아니라 <기생충>이 정확하게 한국영화사의 세례를 받은 한국영화임을 알린 것이다. 그는 김기영 감독에 대한 존경심을 수시로 말해왔고, <기생충> 역시 김기영의 <하녀>(1960)의 계단 이미지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강조했다. 

‘계단’은 영화적 비유로 흔히 활용된다. 니콜라스 레이의 <실물보다 큰>(1956)에서 계단은 삶의 망상이 깨지는 장소이며, 조셉 로지의 <하인>(1963)에서 대저택 계단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 간의 심리적 긴장 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도구다. 김기영의 <하녀>는 계단을 통해 계급상승의 욕망과 좌절을 훌륭하게 은유하고, 이만희 감독의 <마의 계단>(1964)에서 계단은 못된 꿈을 꾸는 자의 파멸의 기표로 활용된다. 이른바 ‘계단 시네마’. 봉준호는 계단을 활용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계급 문제를 유머 요소로 활용한다. 그리고 점차 서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 계단은 우리 시대가 벗어날 수 없는 혼탁한 지옥도를 펼쳐 보이는 신랄한 풍경이 된다. 영화의 원제목은 ‘데칼코마니’였다고 알려져 있 다. 이야기의 배경인 세 개 공간에서 거의 모든 사건이 펼쳐진다. 박사장(이선균 분)이 살고 있는 대 저택 거실과 2층 공간, 전원 백수 가족 기택(송강호 분)이 살고 있는 반지하 공간, 세상에서 완벽하게 사라져서 숨만 쉬면서 생명을 영위하는 근세(박명훈 분)가 숨어있는 지하 벙커 공간이 그 세 개의 공간이다. 집 형태를 가지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보 이지 않는 계급 문제를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봉준 호는 탁월한 미장센 연출가다.

기생충이란 숙주의 몸에 살면서 숙주의 영양소를 취하는 해충이다. 기택은 박사장의 운전수로서 정당하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돈을 버는 합법적 임노동자로 살아가다가 최후 순간에 기생충이 되는 상황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박사장의 가정부였던 문광(이정은 분)의 남편인 근세처럼 지하 세계로 숨어 들어가서 말 그대로 숨만 쉬는 인생이 되 는 것이다. 박사장네 가족이 외박을 나간 사이 기택 가족이 박사장의 거실을 점령하던 그 날, 바로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문광은 난데없이 벨을 누르고 지하 벙커를 보여주었다. 이 순간으로 인해 영화는 세상을 풍자하는 블랙코미디에서 잔인하게 현실을 폭로하는 무서운 호러로 전환한다.

박사장네 가족과 저택은 기택 가족의 반지하 집 과 완벽하게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거울처럼 서로를 마주대면 각각은 똑같은 모습이 아니라 정반대의 모습으로 합치된다. 비가 오는 풍경이 낭만적으로 보이는 언덕 위에 위치한 침입불가의 양옥 주택 대비가 오면 쉽게 침수되고 취객이 오물을 뿌리는 반지하 집, 성공한 젊은 벤처 사업가 가장 대 사업에 실패하고 백수가 되어버린 중년 가장, 태어나자마자 상류층인 어린 자녀들 대 대입과 취업에 실패한 20대 자녀들.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같은 빛의 가족과 어둠의 가족이 서로를 마주할 기회가 없는 건 아니다. 하층민과 상류층은 각자 선을 긋고 절대 그 선을 넘어서지 않은 채 존재하지만, 가끔씩 그 선을 넘어 서로 마주해야 할 때가 있다. 과외교사, 가정부, 운 전기사는 상류층 가정에 들어가서 그들만의 이너서클의 공고한 질서를 구축하는데 한몫 한다. 이들은 늘 상류층 공간에 들어가 그들을 마주치지만 봐도 못 본 척하며 이내 자신의 지하방으로 내려간다. 부자와 빈자가 한 공간에 모여들어 공간을 분할한 채로 각자 모였다 흩어지길 반복하는 것은 마치 바퀴벌레가 먹이를 구하러 달려들었다가 불이 켜지면 어두운 공간을 향해 흩어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전반부의 슬랩스틱이 깔린 왁자지껄한 소동극을 우리는 낄낄거리며 구경한다. 그러나 바로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기택 가족이 지하 벙커를 알게 된 그 날 이후 세상은 상류층과 하층민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둘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현대판 불가촉천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자 영화는 분위기를 전환하여 우리에게 거대한 아픔과 공포를 전달한다. 중산층에서 하층민으로 떨어진 기택은 지하 벙커 로 걸어 들어감으로써 기생충의 삶을 어쩔 수 없이 선택한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반지하가 물에 잠겨 아수라장이 되던 그 때, 대저택에서 상류층 가족놀이를 하면서 잠깐이나마 헛된 꿈을 꾸며 행복해하다 한순간에 제자리로 돌아왔을 바로 그때다. 집안의 브레인인 막내딸 기정이 아무런 손을 쓸 수 없이, 오물이 넘쳐흐르는 변기 위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그 허무의 정서야말로 이 영화가 전하고픈 속내인 것 같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고하게 구축된 계급의 보이지 않는 담장을 넘어 계급 간 상승 이동을 한다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 그 영역을 침입해봐야 다시 회귀하여 제자리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더 낯은 곳을 향해 계단을 걸어 내려와야 한다. 끔찍하고 암울한 세상에 대한 통찰이다.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기정의 최후는 어쩌면 서사가 도달해야 할 필연인 듯하다. 그녀는 최후의 순간에 살기 위해 몸부림치기보다는 낯선 농담과 함께 웃음으로 자신의 비극에 순응한다. 봉준호가 보여주는 영화적 비전이란 세상은 어지러운 지옥도라는 잔인한 현실이다. 웃기고 슬픈 파토스의 영화다. <기생충>은 지금 여기 대한민국 자본주의에 대한 우화이며, 신자유주의 글로벌 시대의 보편적 서사다. 서사, 스타일, 주제의식의 삼박자가 하모니를 이루는 인류학적 보고서로서의 예술작품이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20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기생충>은 아마도 오랫동안 21세기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영화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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