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Theme] 누가 임권택에게 돌을 던지나
[10월 Theme] 누가 임권택에게 돌을 던지나
  • 김용희(영화평론가, 평택대 교수)
  • 승인 2019.10.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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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창작의 과정에서 예술성이냐 대중적 소통이냐 하는 고민은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는 선택의 문제다. “내 작품은 그 누가 보지 않아도 돼, 나만을 위한 작품이니까”, 라고 어느 소설가가 십여 년 전에 내 앞에서 호언장담을 한 적이 있다. 오만할만큼의 예술적 신념으로 느껴졌다. 오만할만치의 세상과의 구별은 낭만주의 시절 예술가를 범인과 구하게 하는 천재의 징표였다. 하지만 독자에게 읽혀지지 않는 소설은 이 세상에 없는 소설이다. 상영되지 않는 영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영화다. 세상과 만나지 않는 예술은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하다. 자기만족만의 영화를 만들기엔 영화제작에는 엄청난 자본이 들어간다. 소설이야 노트북 한 대를 끼고 카페에 몇 날 며칠 죽치고 앉아 머리를 쥐어 뜯으면 된다. 출간되고 나서 독자들이 외면해도 출판사 사장과 대포집에서 막걸리 한 잔을 하면 된다. “에라이, 이 넘의 세상, 백 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할 작품도 못 알아보는 넘들.” 하고 독자들을 욕 해주면 다다.   

영화는 아니다. 필름 한 통 한 통이 돈이다. 시나리오 각색, 장소 섭외, 셋트장, 의상, 조명, 녹음, 카메라, 음향, 음악, 스텝과 최종편집에 이르기까지 장비 하나 하나가 다 돈과 연결되어 있다. 거기에다 가장 중요한 캐스팅까지. 누구나 이 행성에서 사는 동안 밥 빌어 먹고만은 살 수 없는 노릇이다. 체제가 있고 제도가 있다. 관습이 있고 생활이 있다. 현대예술은 체제와 관습에 저항하는 일탈성을 예술의 정신으로 상정해왔다. 예술은 자본에 저항하는 최후의 보루가 돼야 한다.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영화는 예술이면서 현실논리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는 물적 숙명을 생래적으로 가지고 있다. 자본의 도움 없이 영화는 한 컷도 찍을 수 없다. 하나의 시퀀스도 찍을 수 없다.

집을 팔고 가족을 팔아 영화를 찍었다고 치자. 그래도 체제 전복을 꿈꾸거나 제도를 역행한다면 개봉될 수 없다. 개봉된다 해도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하면 패가망신은 기본이다. 패가망신을 위해 자신의 전답을 다 팔아먹을 ‘또라이’는 없을 것이다. 상영되지 않을 필름을 위해 영상을 찍는 ‘또라이’ 또한 없을 것이다. 필름통 안에 갇혀 있는 필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필름이니까. 영화의 본격적인 발전이 나치 파시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영화는 지극히 ‘현실적 조건’을 감싸안고 있다. 초기 영화는 체제와 함께 만들어지고 제도와 함께 병행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영화의 숙명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임권택 감독은 한국 영화계 ‘거장’이라는 타이틀로 불려왔다. 문명 산업의 기계주의와 함께 태동한 영화산업, 한국 산업화의 길을 함께 걸어왔던 한국영화의 현주소 안에 그가 놓여 있다는 점을 주목해보자. 그럴 때 임권택 감독에 대한 조명은 좀더 예각화될 수 있다. 임권택 영화는 1970년대를 기준으로 두 시기로 나눠 논의되어 왔다. 1960년대 영화계에 입문할 무렵 임권택의 작품은 그의 말대로 ‘가난한 연좌제에 묶인 빨갱이 가족의 마지막 자구책’같은 거였다. 중학 3년 중퇴가 배움의 전부였다. 1960년대의 작품은 연명을 위한 싸구려 영화가 다였다. 

그의 작품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1970년대 이후 작품부터 가능해진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솔직하게 만든 영화가 <잡초>(1973)였다. 하지만 1970,80년대 그의 영화는 반공계몽영화의 문법을 착실히 실천해가는 중이었다. 일종의 국책영화였다. 농민 계몽영화 <상록수>(1978), 불교적 세계 <만다라>(1981><아제 아제 바라아제>(1982), 기획된 반공영화 <울지 않으리>(1974><낙동강은 흐르는가>(1977><깃발 없는 기수>(1979)<아벤고 공수군단>(1982)<짝코>(1980), 가부장제 하에서의 계몽 영화 <복부인>(1980)<씨받이>(1986) 등을 떠올려 볼 수 있다. 1974년 영화진흥공사 지원으로 반공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를 만들었다가 염전(厭戰) 영화라는 이유로 검열과정에서 편집권을 빼앗기고 이듬해 병사한 이만희 감독을 환기해보자. 참 대조가 되는 두 감독의 행보다.

당시 영화감독은 국가기관의 지원 없이 제작이 불가능했다. 관객 입장료만으로 살아남기 힘든 시기였다. 국가주의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1970년대. 모든 영화의 목표점은 반공 혹은 산업화역군을 향하고 있었다. 한국 감독들이 1970년대를 한국영화 침체기로 회고하는 이유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 같은 민족주의, 반공계몽, 국책영화 장려시기에 국가 지원금을 받고 수많은 영화를 만들어간 사람이 임권택이다. 그러나 임권택은 1970년대 현실주의를 선택한다. 그에게는 체제에 대한 순응이 곧 저항이었고 저항이 곧 순응이었다. 순응을 통해 자신의 작가주의를 찾아가고 있었달까. 일테면 모두 새마을운동 영화를 만들고 있던 때에 그는 국책 지원사업에 동조하면서도 동시에 <왕십리><족보>(1978)같은 작가주의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새마을운동 영화를 만들다 보니 고향과 어머니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1960년대 먹고살기 위해 싸구려영화를 만들었고 1970년대 지원금을 받기 위해 국책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제작비만 받을 수 있다면 입금자의 입맛에 맞는 영화를 얼마든지 만들어줄 수 있었다. 닥치는대로 장르도 따지지 않고. 그는 국책영화 외에도 애로물, 액션물, 미스터리물, 모든 장르를 넘나드는 영화를 만들었다. 그의 이러한 이력이 아이러니하게 그의 작가주의를 성취하게 한 밑거름이 되었다.  결국 임권택은 외부에 대하여 순응해가는 가운데 스스로 내적 계기와 내적 욕망을 끌어냈던 셈이다. 영화라는 매체적 특징, 즉 자본시스템과 이념시스템에 순응해가면서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갔다.  세계영화가 1980년대 이후 로컬러티에 눈떠가고 있을 때 동양주의에 대한 한 발견으로서 <씨받이>가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감독은 세계영화제를 위한 기획에 몰두하게 된다. 동양주의를 보여주는 영화 <서편제> <취화선> 등이 그것이다. 그 기획의 의도가 예술주의를 비웃는 전략적 기획이었다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그의 기획과 연출이 해외영화제에 한국영화를 알리는 교두보였다는 사실이다.

분단이라는 한국현대사의 현장 속에서 개인 구도(求道)나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 수난사, 동양적 예술주의는 1990년대 이후 임권택 영화가 ‘한국의 예술영화’라는 명명을 받아내는 데 부족함 없게 하였다. 그는 한국의 현실과 협력해야만 관객을 만날 수 있다는 영화문법을 뼛속까지 알고 있던 감독이다. 그 가운데에서만이 한국인의 고유정서와 미학을 그려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한국 리얼리즘 민족영화를 자신의 현실주의의 한 방식으로 끝까지 밀고 나간 한국 최초의 감독이 되었다.

 

 

* 《쿨투라》 2019년 10월호(통권 6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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