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Theme] ‘위험한 안쪽’을 더듬는 시선
[10월 Theme] ‘위험한 안쪽’을 더듬는 시선
  • 김남석(영화평론가, 부경대 교수)
  • 승인 2019.10.0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

경운기를 타고 논두렁을 거슬러 오르는 남자. 이 남자의 시야에는 곡식들이 빼곡하게 익어가는 들녘이 들어와야 하지만, 왠지 그 풍경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무심하기 이를 데 없다. 어딘지 권태로움까지 묻어 나오는 표정. 하지만 그의 무심함은 오래가지는 못한다. 그의 권태로움에 맞서기라도 하듯, 눈 앞에 나타난 배수로가 잔뜩 웅크린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안에 구겨진 짐짝처럼 처박혀 있는 한 여인의 형상과 마주해야 했다. 카메라는 처음부터 이 여인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고, 그 뒤로도 이러한 거리는 유지되었다. 배수로 속 여인의 형상을 닮은 피해자들이 하나씩 늘어나고 붉은 공포가 가을 들녘을 뒤덮어가도, 카메라는 그 거리를 좀처럼 좁히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체들은 모호한 인상으로 남았고, 그 희생자가 발생했을 사건 현장도 어딘지 개운하지 못한 상태로 남겨졌다. 끝내 형사들까지 갈팡질팡하면서, 시체를 통해 살인 현장을 넘어 범인의 인상에 접근하는 길을 좀처럼 만들어내지 못했다.

<살인의 추억>은 그 외형만 놓고 보면, 두 개의 축으로 설명될 수 있다. 살인(자)을 쫓는 형사와 그 형사의 눈을 피하는 살인자의 은신(방법)이 그것이다. 영화는 형사의 시각에서 살인 현장(늘어나는 시체)을 차례로 쫓으면서 범인의 흔적을 추적하지만, 그렇게 수집된 흔적은 살인자의 그림자에 불과했고 결국 그 그림자 너머 살인자의 인상은 늘 모호하게 처리되었다. <살인의 추억>이 대중성을 획득한 이유 역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고, 쫓겨서 잡혀야 하는 이의 인상마저 흐릿해지면서, 대개의 추리영화(범죄영화)라면 좁혀지기 마련인 거리감이 끝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 이러한 거리감은 표면적으로는 영악한 범인에게 뒤지는 형사들의 모습으로 확인되지만, 봉준호의 영화적 성장에 따라 늘 기민하게 움직이는 현실 혹은 그 현실을 통제하는 힘을 제대로 인지 못하는 범인(凡人)들의 모습(거리)과 점차 겹쳐지게 된다. 형사들이 있던 자리에 평범한 ‘우리’들이 자리 잡게 되자, ‘살인자’의 자리에는 ‘현실’이라는 ‘무게 있는 용의자’가 들어서게 되는 셈이다.

 

2.

<살인의 추억>은 외형적으로 ‘추리영화’이지만, 범인이 특정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범인의 얼굴을 세상 도처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전언을 특정 장르의 틀에 구속할 필요를 제거한 영화였다. 더구나 봉준호가 이후에 도전하는 적지 않은 수의 장르를 통해, 애초부터 범인을 찾거나 합리적인 판단(이성적 결과에 의한 체포)만 겨냥하지 않았다는 심증도 커진다. 어쩌면 봉준호는 우리가 그토록 알고자 하는 이 이상한 사건의 원인이, 살인 현장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회 곳곳에 퍼져있다는 생각을 꽤 오래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살인의 추억>만큼 이상한 영화 <마더> 역시 이러한 전언에서 그다지 멀리 있지 않은 영화이다. 살인사건이 일어났고, 일견 분명해 보이는 한 인물이 용의자로 지목되었지만, 정작 이 인물이 범인이냐 아니냐는 이 영화의 관심에서 벗어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마을 내에 숨어 있었던 이상한 관계들이 드러나고, 이러한 관계들은 실시간으로 목격하고도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다시 일으킨다. 어떠한 이상한 힘이 이 마을을 흔들 수 있는 것일까. 봉준호는 푸른색과 붉은색이 교묘하게 삼투된 이 마을을 전국 곳곳에서 끌어와서 이미지로 통합했다고 했는데, 혹 ‘그 이상한 힘’이 결국 한 곳에만 머물거나 특정한 곳에 구애되는 현상이 아니라는 점을 역설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마더>에서 ‘범인’의 인상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살인의 추억>에서 범인이 잡히지 않은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범인을 잡아 논리적으로 그 과정을 검증하는 작업 자체가 현실을 이해하고, 그 세부를 해부하고, 나아가서 바로잡거나 고치는 일과 무관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봉준호의 작품 중 비교적 태작으로 분류되는 <설국열차>나 <옥자>에서도 이러한 생각은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 다만 ‘글로벌’하게 ‘디자인된’ 세상을 움직이는 다국적 기업의 횡포나 ‘멸망’ 직전/직후의 세계 역시 ‘보이지 않는 힘’에 간섭받을 수밖에 없다는 식의 주제의식이, 한 동안 유효했던 봉준호의 영화적 책략을 너무 성급하고 직접적으로 노출하는 바람에 영화적 패인으로 작용했다는 결과만 뺀다면 말이다.

 

3.

봉준호의 영화 이력에서 <기생충>을 거론하는 이유도 이러한 패인과 무관하지 않다. 전작에 비해 <기생충>에서는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봉준호의 생각이 적정 수준에서 조율되었기 때문이다. 감출 것은 감추어지고―봉준호식으로 말하면, 숨을 것은 숨고―드러내야 할 것은 드러날 수 있도록―다시 봉준호식으로 말한다면. 찾아야 할 것은 찾을 수 있도록―서사 의 적정한 안배가 이루어졌다. 가장 인상적인 점은 숨은 방의 존재였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신(드러남)이었다.

일반적인 통념으로 보면, 비록 대저택의 안쪽 공간이라도 그처럼 숨은 공간이 존재하고 그 공간에 기생하는 인간마저 살고 있다는 생각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사회 전반으로 이러한 통념을 옮겨보면, 우리는 곳곳에서 보이지 않는 틈새와 그 틈새에서 비집고 살아야 하는 다종다양한 사람들을 상상할 수 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일 수도 있고, 위험한 자들일 수도 있으며, 세상으로부터 쫓기는 자일 수도 있고, 낮은 계층의 사람일 수도 있다. 어쩌면 돈이 많거나 막대한 권력을 가진 자들일 수도 있다. 우리와 함께 그들은 존재하며, 또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봉준호는 그러한 자들의 위험한 인상을 공개하는 일에 도전한 셈이다.

위험한 방의 최초 거주자는 도피자였다. 그는 사회에서 쫓기는 사람이었고, 그의 존재를 찾아 헤매는 채무자들에게는 죽이고 싶은 존재였다. 비록 추정이지만 도피자 역시 도피 이전에 누군가에게 해를 가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속히 숨어야 했고, 바깥의 사람들의 시선에서 도망칠 수 있는 공간, 시선의 사각지대를 강렬하게 원할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러한 곳은 곳곳에 널려 있었지만, 그는 너무도 유명하고 부유한 사람들 옆을 택했다. 위험한 공간의 거주자는 바뀐다. 거주를 원하는 사람들이 다시 생겼고, 그들은 곧 위험한 범죄를 저지르고 사각지대로 숨어야 하는 운명을 답습했다. 딸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던 남자. 사실 딸이 죽기 이전에도 그는 수없이 많은 복수를 꿈꾸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의 분노는 일시적인 것은 아니다. 지상의 몇 평 집을 허락받지 못해 반지하로 쫓겨나고, 풍족한 삶을 얻지 못해 체념으로 일관해야 했던 그는, 결국 반사회적 범죄를 저지르고 사람들이 찾지 못하는 곳으로 숨어들어야 했다. 넓게 보면 <설국열차>의 머리/꼬리 칸의 지도자(들)도 그러했고―그들은 결국 좁은 공간으로 숨어 들어야 했다―아들을 위해 비밀을 불살라야 했던 어머니도 그러했다. 그들은 무언가를 숨기거나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곳으로 은신해야 했기에, 결국 그곳에서 작은 비밀만을 허용 당한 채 살아야 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기존 영화 공간은 너무 비좁았다.

 

4.

그러자 한 작품 내에 두 개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이 절실해졌다. <살인의 추억>에서 용의자들의 공간과 함께 피해자들의 공간이 의미 있게 병존했던 것처럼, <기생충>에서는 외부자들에게 공개된 공간 이면에 감추어진 침입자들의 안쪽 공간으로 갈 수 있는 비밀 통로가 필요해졌다. 이 공간의 영화적 필연성이 발견되는 과정은 간단하지 않았지만, 이 공간이 발견되자 그토록 삐거덕거리던 적지 않은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되었다.

이 숨겨진 공간은 자연스럽게 각종 비유와 상징을 창출했고, 위계와 대조의 지점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척도가 되었다. ‘가난 대 풍족’이나 ‘남루 대 세련’ 으로 대변되는 두 지점이 저절로 맞서면서, ‘반지하 대 대저택’, ‘곰팡이 냄새 대 고급차 냄새’, ‘아래층 대 위층’, ‘하층민 대 상류층’, ‘더러운 물 대 깨끗한 물’, ‘억압과 방만’이라는 수많은 이항대립으로 의미 있게 확산될 수 있었다. 저택 속에 숨겨진 작은 방 하나가 그 자체로 크고 작고, 혹은 높고 낮고, 공개 되고 숨겨지는 사회적 명암을 스스로 감당해낼 수 있었다. 동시대의 현실―나아가서는 인간의 문명과 사회―을 기본적으로 재단할 수 있는 두 개의 대척점을 만들어내었고, 이를 통해 영화적 의미의 전략적 확대 생산마저 가능해졌다. 이러한 공간의 발명은 분명 21세기 한국영화의 개가일 것이다.

이 짧은 글에서 그 전모를 추적하기는 어렵겠지만, 이 공간은 하루 이틀에 만들어진 발명품은 아니다. <살인의 추억>부터 시작된 사각지대에 대한 집요한 추적이 적지 않은 영화들을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었던 공간인 셈이다. 그래서 이 공간은 외부자의 시선으로는 범인들이 은신한 공간으로 취급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내부로 들어간 이들에게는 사회적 질시와 압력으로부터 헤어날 수 있는 도피의 공간일 수도 있다. 그곳은 자유를 잃는 대신 생존을 보장받는 신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내부에 머물 수는 없지만 그 실체를 아는 이들에게는, 이 공간이 어떤 의미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그 공간을 막연하게는 짐작해오곤 했었다. 우리 사회에 빈틈이 있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가늠하고 있었고, 간헐적으로는 그 사이로 들어갔다는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얻어듣기도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빈틈을 찾기 위해서 오늘도 매진하고 있는 사람들을 목격하기도 하고, 그 숨겨진 공간에 접근하는 행운을 맛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공간은 흐릿한 인상으로 남을 뿐이다. 내부로 진입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 숨은/숨겨진 공간은 멀리서만 어렴풋하게 감지되는 모호한 공간일 따름이다. 잡을 수 없는 범인처럼 그 공간은 흔적으로만 감촉되어왔다.

그런데 봉준호는 그 공간을 더듬는 시선을 창안했다. 처음부터 그의 카메라는 그 공간으로 들어가는 작은 흔적을 끌어모으는 데에 능숙했고,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 추측하는 데에도 제법 소질을 발휘하곤 했다. 처음에는 잡지 못하는 범인(犯人)이 숨었을 공간으로 막연히 가정했겠지만, 곧 그곳에 웅크린 자본과 권력의 숨겨진 힘이 그 범인의 실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세계를 지배하는 힘, 가족을 보호하거나 작은 마을을 은밀하게 작동하는 원리를 그곳에서 발견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기생충>에 도달하여 그는 그곳에서 사람이 있었다는 식의 능청마저 가미하고 있다.

처음부터 뻔한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이 그다지 선인(善人)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한정 매도할 수 없는 악인(惡人)도 될 수 없는, 그저 그런 범인(凡 人)이 살았다고 딴청을 부리면서 말이다. 그 공간을 말로 줄이면 아무것도 아닐 진실로 수렴되고 말겠지만, 끝내 그 공간을 찾아 그 안에 ‘우리’가 있(었)다고 말했다는 점에서 봉준호는 더 큰 신뢰를 얻는 작가가 될 수 있었다. 어렴풋하지만 자신만의 인상을 쫓아, 멀리 있는 길을 헤매 그 끝에 도달한 자의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영화 역시, 아직은 봉준호를 믿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 르지 않다고 해야 한다. 이것이 21세기 한국영화가 봉준호를 주목하고 신뢰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 《쿨투라》 2019년 10월호(통권 64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