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Theme] 신성일, 전무후무라는 단어의 주인공
[10월 Theme] 신성일, 전무후무라는 단어의 주인공
  • 강성률(영화평론가, 광운대 교수)
  • 승인 2019.10.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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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의문. 저 수치를 믿어야 할 것인가? 1960년에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이래 2013년의 <야관 문: 욕망의 꽃>까지 평생 신성일이 출연한 영화는 513편인데, 이 가운데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가 500여 편을 넘는다. 이뿐 아니다. 그는 1967년에만 무려 51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쉽게 설명하면, 거의 매주 신성일이 주연한 영화가 극장에서 개봉된 것이다. 도대체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물론 이런 수치에는 함정이 있다. 당시 영화 산업이 황금기라서 많은 배우들이 동시출연을 했다. 그러나 그 어떤 배우도 신성일의 기록을 넘어서지 못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신성일은 1970년대에도 여전히 가장 많은 영화에 출연한 남자 배우였고, 1978년의 한 잡지의 투표 결과를 보면, 그는 남녀를 통틀어 가장 인기 있는 배우에 선정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 어떤 배우도, 지금까지도 20년을 넘게 최고의 지위에 있지는 못했다. 때문에 신성일을 한국영화사를 대표하는 배우로 선정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어떻게 보더라도, 신성일은 (이해가) ‘불가능한’ 기록을 지닌 존재다. 출연한 기간만도 무려 53년이 되니.

두 번째 의문. 신성일을 이런 스타로 만든 감독은 누구일까? 놀랍게도 신성일은, 흔히들 한국영화사의 거장 ‘트로이카’로 불리는 유현목, 신상옥, 김기영 감독 등과 많은 작품을 하지 않았다. 이만희와 김수용의 영화에 상대적으로 많이 출연하기는 했지만, 김기덕, 정진우, 이성구, 이두용 등의 영화에도 자주 출연했고, 1970년대에는 이장호, 김호선, 하길종 등 ‘영상시대’ 감독들의 영화에도 두루 출연했다. 이렇게 보면 신성일은 특정 감독과 깊이 작업한 것이 아니라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왕성하게 활동한 대부분의 감독들과 폭넓게 작업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여러 감독과 작업을 했음에도 그는 20년 동안이나 최고 배우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세 번째 의문. 그는 어떤 매력으로 스크린을 장악했을까? 신성일을 스타의 지위에 올린 첫 영화는 유현목 연출의 <아낌없이 주련다>였다. 미망인인 빠의 마담과 그 빠의 관리인인 20대 청년의 사랑을 다룬 이 영화에서 당시 신예였던 신성일은 주연을 맡으면서 강한 이미지를 남겼는데, 그가 남긴 강한 이미지는 당시 주연을 맡았던 다른 배우들, 즉 김승호, 김진규, 신영균, 박노식 등과는 전혀 다른 마스크와 몸을 지닌 것에서 출발한다. 위에서 언급한 배우들보다 많게는 19년(김승호), 적게는 7년(박노식)이나 젊었던 신성일은 그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젊은 나이와, 이에 맞는 마스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까 위에서 언급한 배우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서구적 마스크를 지니고 있었던 신성일은 그 마스크에 어울리는 몸을 만들어 당시 세계적 경향이던 저항의 이미지를 스크린에 완벽하게 구축했다. <아낌없이 주련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기성 세대의 가치관에 저항하는 청년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벗은 남성의 몸을 전시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생각해 보라. 그런 그가 죽어가던 마담을 안고 오열할 때 얼마나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을지를.

네 번째 의문. 왜 신성일을 청춘영화의 대명사로 인식하는가? 신성일이 1960년대의 최고 스타로 등극할 수 있도록 했던 영화는, 어떻게 보더라도 <맨발의 청춘>이다. 거리를 떠돌던 가난한 청년이 엘리트 여성을 만나 사랑하지만 결국 계급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자살로 마감하고 마는 내용의 이 영화는 당시 엄청난 폭발력을 불러왔다. 먼저 청춘영화라는 장르 사이클을 완성하게 했는데, 청춘 영화는 부모 세대가 부재한 청춘들이 도시의 거리를 떠돌면서 방황하다가 결국 좌절하고 마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신성일은 그런 저항의 이미지, 방황의 이미지에 적역이었고, 이런 이미지를 통해 영화 산업이 엄청나게 성장하면서 충무로가 확고한 영화의 거리가 되도록 했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통해 신성일과 엄앵란이라는 커플(당시 용어로는 신·엄 커플)을 탄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이로써 신성일은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이 영화 이후 많은 시나리오는 신성일을 대상으로 쓰여졌고, 그것은 바로 현실이 되었으며, 거기에는 감독이나 장르의 구분마저 없었다. 이제, 길고도 긴 신성일의 독주 시대가 열린 것이다.

다섯 번째 의문. 모던 시네마의 흐름을 왜 신성일이 이끌었는가? 이상한 일은 1960년대 후반에 발생했다. 대략 1962년에서 1968년 정도까지 충무로를 휩쓸었던 청춘영화의 흐름과는 완연히 다른 일군의 영화에도 신성일이 주연을 맡은 것이다. 흔히들 모던 시네마라고 칭하는 <안개>, <장군의 수염>, <휴일> 등의 영화는 박정희식 산업화와 근대화의 이면 에 존재하는 소외와 방황을 특유의 모던한 스타일로 그렸는데, 특이하게도 그런 영화의 주연도 신성일이 었다. 그러니까 충무로에서 가장 흥행하던 장르의 주연도 신성일이었고, 그런 장르와는 전혀 다른, 속칭 예술영화의 주연도 신성일이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물론 이해를 하자면 어려운 것도 아니다. 청춘영화에 재현된 젊음이나 모던 시네마에 재 된 청춘은 모두 산업화와 근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면에서 방황하는 이들이었다. 결국 기성 세대의 벽에 부딪쳐 좌절하고 자살하는 이들이 신성일이라는 페르소나를 통해, 거울의 양면과도 같은 청춘 영화와 모던 시네마에 그려졌던 것이다.

마지막 의문. 신성일은 어떻게 1970년대에도 최고의 배우가 될 수 있었나? 1960년대에 왕성히 활동했던 많은 배우들은 1970년대가 되면 현저하게 출연 편수가 줄어들게 되지만, 신성일은 여전히,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주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1970년대에 새로운 영상적 감각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받은 ‘영상시대’의 감독들과 작업을 했는데, 흥미롭게도 이때 출연한 영화는 모던 시네마를 가속화한 것이었다. 즉, 1960년대의 청년에서 1970년대의 중년으로 변화했지만, 여전히 산업화와 근대와의 이면에서 소외된 이들의 내면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던 시네마에서는 젊은 여성에게 상처를 주는 청년의 역할이었다면, 호스티스영화에서는 젊은 여성을 감싸 안으려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는, 쇠락한 중년의 역할을 맡았다.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한국 영화사 100년에서 아버지 역할로 끊임없이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한 이가 김승호라면, 근대화를 추진하는 든든한 장남 이미지는 신영균이고, 지식인의 이미지로 시대적 균열을 재현한 이가 김진규라면, 근대화와 산업화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채 저항하거나 우울을 지닌 데카당한 모습을 보여준 게 신성일인데, 그 당시 ‘한국의 알랭 드롱’, ‘한국의 제임스 딘’이라고 신성일을 비유한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 《쿨투라》 2019년 10월호(통권 6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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