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Theme] 김지미를 위한 변명
[10월 Theme] 김지미를 위한 변명
  • 신귀백(영화평론가)
  • 승인 2019.10.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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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날 식구들이 고스톱을 한다. 패를 깐다. 6자 목단이다.
“아이고, 김지미네.”
젊은 친구들은 목단을 두고 장미 아니냐고 한다. 한동안 화투의 6자는 김지미였다.
-도시 전설-

 

배우 김지미

여배우에서 배우로 남았다. 배우 중의 배우다. 본명 김명자, 40년생이니 아키코나 소냐인 적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예쁠 수가 있는 지 모르겠다."고 말한 이는 김기영 감독이다. 맞다. 비구니 머리를 스카프로 감추어도 솔잎보다 더 진한 눈썹에 이마와 귀가 드러나는, 한복을 입으면 용잠을 꽂아야 하는, 붉은 투피스에  붉은 소파에 앉으면 현대미가 드러나는, 똑바로 치어다 보는 에로틱을 갖춘 눈, 눈길만으로 육체를 말하는 배우다. 포스터에 원톱이 가능한, 도도함과 카리스마를 갖춘 배우. 흑백에서 컬러로, 후시녹음에서 동시녹음의 시대를 이어온 동양적 미감과 현대적 이미지의 김지미는 배우에서 영화제작자까지 스펙트럼을 넓힌다.

 

후시녹음시대의 김지미

<황혼열차>(1957)의 포스터에는 김지미의 원피스 입은 모습이 보인다. 낭랑 18세가 아닌 성장한 여인이다. ‘아세아의 미녀 김지미’ ‘입체적인 마스크’라는 호평을 받은 김기영 감독과의 인연은 훗날 <육체의 약속>(1975)으로 이어진다. 선민영화사 전속 배우가 된 김지미와 홍성기 감독의 조합은 흥행공식이었다. 일로 만난 사이는 연인 사이를 넘어 첫 번째 결혼으로 발전한다. 신상옥-최은희의 <성춘향>(1961)에 당한 참패와 영화사 부도 그리고 빠른 권태, 뭐 현실은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 “나이 많은 남자, 어린 남자, 능력 있는 남자, 다 살아봤는데 남자 별거 아니더라. 남자는 다 어린애고, 부족하고, 불안한 존재다.” 구구이 관주다.

후반 작업이 엉망인 시절. 지방업자가 제작비를 대면 바로 크랭크업되고 개봉 일자까지 밀어부쳐야 하는 입도선매 시절이었다. 쉰셋의 은퇴작 <명자 아끼꼬 쏘냐>(1992)까지 700편 넘게 출연했단다. 영상자료원 db기록에 그 절반의 필름이 사라졌다고. 일 년에 스무 편 이상 등판해야 그 기록이 가능하다. 동시녹음할 수 있는 카메라가 몇 대 없던 시절, 잠은 몇 시간이나 잘 수 있었을까? 옷은 어디서 갈아입었을까? 옥경희나 고은정이라는 낭랑한 목소리의 성우가 받치고 있었다 해도 오글거리는 대사에 감정처리는 어떻게 했을까? 여배우 잔혹사다. 쌀 증산의 통일벼 시절, 그의 얼굴이 든 필름들은 밀짚모자의 띠를 만드느라 반 이상이 사라졌다.

제작자 김지미

선천의 배우로 끝내기는 성이 차지 않아 영화사를 설립한다. 지미필름. <비구니>(1984)의 상영금지에도 좌절하지 않고 <길소뜸>(1985)과 <티켓>(1986)을 제작한다. 역작이다. 김지미는 임권택 감독, 촬영의 정일성, 시나리오의 송길한과 의리로 20세기를 지켰다. 어떻게 낳은 아들인데? 전쟁의 사선을 넘은 김지미는 아이의 손을 놓쳤을까, 아니면 일부러 놓았을까. 어떻게 만난 아들인데? <길소뜸> 마지막 장면의 유전자 검사에 대한 불신은 김지미의 캐릭터를 한 차원 높인다. 김지미의 애매하고 또한 단호한 태도는 남북이산가족의 상봉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지 않고 성찰하게 한다.

김지미는 속초여행 길 다방 아가씨들의 생활에 쇼크를 받고 <티켓>을 제작한다. 영화는 현실보다 조금 낮고 부드럽게 순화해서 갔는데 ‘공윤’에서 제동을 걸고 보챘지만 관객에게 이 야만은 제법 충격이었다. 사심 없는 용기를 보여준 김지미는 내처 반세기 동안 소외당해 왔던 사할린에 남겨진 조선사람을 그린다. 19억을 쏘아 만든 <명자 아끼꼬 쏘냐>가 바로 그것. 고통을 겪은 사람들을 붙드는 제작자다. 수입도 한다. <로보캅>에 이어 <마지막 황제>도 터졌다. 와, 선구안도 좋다.

회고전의 김지미

2010년 김지미 회고전, <육체의 약속>의 배경음악은 촉촉한 ‘Sympathy’다. 이만희의 <만추> 리메이크라기보다는 거의 김기영이 새로 만든 다른 영화다. 지미를 스친 온갖 지질한 남자들이 에피소드로 흘러간다. 이정길의 연기는 좀 뜨지만 교도관 박정자는 착 가라앉아 있다. 반갑다. 30대 중반 모범수 김지미는 특사로 여수 가는 열차 안에서 이정길을 만난다. 김기영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우는 방식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을 다루려 노력한다. 끊임없이 남성성의 허울을 보여준 감독답다. 박정자는 일시 귀휴를 나온 여죄수에게 꾸준히 사탕을 먹인다. 김기영스럽다. 뭐 감정통제의 장치일 것. 김지미는 스스로 사탕을 뱉어내지만.

연민은 휴머니즘을 앞서는 법인데, 영화 보는 내내 상영관에서 실소가 튀어나온다. 어이없음에 사탕을 뱉듯 수다스러운 관객들은 탄식을 토한다. 반공법이 있고 외설죄가 있던 시절, 할리우드 영화를 수입하기 위한 스크린 쿼터를 위한 편수 맞추기 촬영의 엉성함을, 유신시대의 검열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것을 젊은 관객도 알까? 허나, <만추> 시리즈의 문정숙과 신성일, 김지미와 이정길, 김혜자와 정동환. 그리고 현빈과 탕웨이 이 정도는 돼야 기록과 기억에 남는다. <장희빈>을 해야 여배우다. 이미숙 전인화 김혜수는 ‘김지미’가 될 수 있을까?  배우의 얼굴에서 ‘한국의 얼굴’로 자리매김하기는 후세의 평가에 달려있다.

김지미 리스펙트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회고전의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2017년 KOFA에서는 데뷔 60주년 기념 김지미 회고전을 다시 연다. 영화계의 리스펙트다. 정서적으로 손절매할 수 없는 배우다. 스캔들을 넘어 전설이 된 김지미는 배우로, 제작자로 인간으로 한국영화판을 풍성하게 했다. 선배 문예봉과 최은희에 이어 김지미는 몇 안 되는 아티스트다. 대한민국 영화판에서 감독이 아닌 배우가 주인이 되는 몇 안 되는 별이다. 매혹이다. 어떤 고전도 그 태동은 현재였고 그 현재는 가장 모던하다. 가장 고전적이며 가장 모던한 배우가 김지미다.

 

 

* 《쿨투라》 2019년 10월호(통권 6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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