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Theme] ‘배우 작가주의’ 첫 대상은 송강호
[10월 Theme] ‘배우 작가주의’ 첫 대상은 송강호
  • 라제기(한국일보 문화부장)
  • 승인 2019.10.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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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특출나지 않으면서 특별하다. 얼굴은 개성이 넘친다. 배우로서 강점이다. 하지만 조금 지나치다 싶게 인상이 강렬하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가에 불량기가 담겨 있다. 입을 열면 타령조의 말이 쏟아지며 웃음을 제조한다. 영화 <초록물고기>(1997)를 봤을 때 그는 개성파 조연 정도에 머물지 않을까 예상했다. 꽃미남 배우들이 충무로를 장악하던 시절은 아니라 해도 연기력만으로 주연 자리를 꿰차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였다. 그는 백지 같은 배우는 아니다. 감독의 의도가 그대로 반영돼 매번 전혀 다른 캐릭터를 선보이는 그런 용모를 지니지 않았다. 어떤 이미지가 고정되면 쉽게 바뀔 수 없는 그런 외모다.

<초록물고기>에 이어 <넘버3>에서 “배배배배 배신이야!”라고 외치는 소규모 조직폭력배 두목 조필을 연기하는 모습을 봤을 때 그는 위험한 길을 가고 있다고들 단정했다. 눈에 띄는 미남배우가 아닌데, 조폭으로 이미지가 굳어지면 새로운 모습을 심어주기 어려우리라는 거 였다. <나쁜영화>(1997)에서는 행려병자를 연기했는데, <초록물고기>와 <넘버3>처럼 강한 캐릭터에 기댄 연기였다. <조용한 가족>(1998)에서도 별 차이가 없었다. 불량기 있는 백수로 조금은 코믹한 연기를 선보였다. 가족이 운영하는 산장을 찾은 한 손님이 번뇌에 찬 목소리로 “학생은 인생이 무엇이라 생각하나”라고 묻자 쇳소리로 “저 학생 아닌데요”라고 답하며 관객을 웃겼다. 이미지 변신을 택한 <쉬리>(1998)는 대형 흥행작이었음에도 송강호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비밀 정보기관의 정보원 이장길을 연기하며 주연으로 발돋움했는데, 관객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전 연기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장면이 없었다. 역시 웃기는 깡패 역할을 넘어서기는 힘든 것 아니냐는 말들이 나왔다. 섣부른 예상은 빗나갔다.

ⓒ시네마서비스

배우, 스타가 되다

<반칙왕>(2000)은 배우 송강호에게 주요 변곡점이다. 일상에 지친 소심한 은행원 대호가 레슬링을 접하며 새로운 자아를 찾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에서 송강호는 대호 역을 맡아 연기가 아닌 레슬링(!) 을 한다. 여느 배우였으면 시늉에 그쳤을 레슬링 장면을 ‘선수’가 되어 구현해 낸다. 삶에 찌든 한 남자가 레슬링으로 자신의 몸 안에 잠들어 있던 야생을 깨우는 과정은 송강호의 육체를 통해 오롯이 표현된다. 삶의 페이소스를 표현해내는 배우, 송강호가 탄생한 순간이다. 연기 잘하는 배우 송강호가 스타로 거듭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에게 머물러 있던 깡패의 이미지는 완전히 사라진다. 이어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2000)는 다용도 배우 송강호의 이미지를 강화한다. 북한군 중사 오경필로 분해 차가우면서 살갑고 이성적이면서 감성적인 인물을 표현해냈다. 2002년 잇달아 소개된 <YMCA 야구단>과 <복수는 나의 것>은 송강호의 연기 스펙트럼을 여실히 보여준다.

<YMCA 야구단>에선 야구에 빠진 서생을 연기하는데, 조선을 침탈한 일제에 맞서는 모습으로 관객에게 호쾌한 이미지를 심는다. <복수는 나의 것>은 납치된 딸에 대한 복수에 나서는 인물 동진을 연기하며 중산층의 허위를 들춘다. 동진이 자신의 딸을 죽음으로까지 내몬 류(신하균)의 아킬레스건을 끊으며 차갑게 던지는 말은 인간의 이기적이면서도 이중적인 면을 극명히 드러낸다. “너 착한 놈인 거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거 이해하지?” 딸이 납치돼 죽어 피해자였다가 사적 제재의 가해자가 되는 동진의 행동은 죄책감과 가학성이 섞인 송강호의 목소리를 통해 설득력을 얻는다. <살인의 추억>(2003)과 <효자동 이발사>(2004) 로 송강호는 충무로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면서 자신만의 이미지를 확연히 정립한다. 서민적인 풍모, 웃음을 부르는 언행, 단호한 눈빛에 담은 섬뜩함을 바탕으로 다종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CJ엔터테인먼트

배우 작가주의

돌이켜보면 송강호는 백지 같은 배우가 아니면서도 웬만한 역할은 거의 모두 흡수해 왔다. 그는 매 영화마다 다른 얼굴로 대중의 희로애락을 대변해 왔다. 초기 깡패 역할을 제외하면 기시감을 부르는 배역이 거의 없다. 정복욕에 사로잡힌 탐험 대장(<남극일기>), 한강변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소시민(<괴물>), 생활인과 진배없는 조폭 중간 보스 (<우아한 세계>), 불행한 여인 주변을 맴도는 별볼 일 없는 남자(<밀양>), 욕정의 포로가 돼버린 사제 (<박쥐>), 작전에 실패한 국정원 요원(<의형제>), 냉소적인 엔지니어(<설국열차>), 천재성 때문에 삶이 위태로운 관상가(<관상>), 사회변혁에 눈 뜬 속물 변호사(<변호인>), 아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영조(<사도>) 등 그의 모습은 천변만화다. 단순히 직업과 성격이 다른 인물을 맡아 전혀 다른 모습을 관객에게 선보인 것 아니다. 송강호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배역을 육화한다. 매번 관객은 낯선 역할에서 익숙한 송강호의 모습을 발견한다. 새롭지만 새롭지 않음에 관객은 거부감도 식상함도 느끼지 않는다.

ⓒCJ엔터테인먼트

20년 넘게 충무로 톱 배우의 위치를 유지하기까지 그의 욕심과 승부욕도 작용했다. <푸른소금>(2011) 과 <하울링>(2012)의 잇단 흥행 실패로 송강호는 조금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 2000년대 한국 영화의 흥행 중심에 있었던 송강호의 시대가 저문 건 아니냐는 말들이 나왔다. 그는 <관상>(2013)으로 반전을 시도한다. 당초 <관상>의 주인공 내경은 다른 배우가 맡기로 돼 있었다. 송강호는 시나리오를 뒤늦게 보고 욕심을 냈다. 동료배우에게 전화해 내경 역할을 자기가 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결국 송강호는 내경을 연기해 900만 관객을 모으며 재기 했다. 보통 영화의 주체는 감독이라고들 한다. 작가주의의 작가는 흔히 감독을 향한다. 누군가는 프로듀서의 역할을 강조하고, 산업 환경과 제작 토양에 따 라 스튜디오 작가주의가 설득력을 얻기도 한다. 배우들은 종종 ‘작가’들의 도구로 생각돼 왔다. 그들은 좋은 영화의 한 축이지만, 영화의 주체로 인정받는 경우는 드물다. 송강호라면 어떨까. 그는 감독의 연출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자신만의 색채로 영화를 주도해 왔다. 송강호의 영화 속 역할에 다른 배우를 집어넣어 생각하면 영화의 얼개가 흩어지곤 한다. ‘배우 작가주의’라는 새로운 용어를 적용해 본다면 그 첫 대상은 송강호여야 한다.

 

 

* 《쿨투라》 2019년 10월호(통권 6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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