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신중현 2] 경이로운 아름다움
[아티스트 신중현 2] 경이로운 아름다움
  • 장석원(시인·광운대 교수)
  • 승인 2019.10.01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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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에 출시된 신중현의 《헌정 기타 기념 앨범》을 바라본다. 그가 다가온다. 세 번째 음악. <빗속의 여인>. 둔중한 것 같지만, 숨어서 칼날을 드러내는, 어둠 속의 섬광 같은 기타가 들려온다. 건반의 주도적 선율과 베이스 라인 사이에서 빙폭(氷瀑)처럼 번득이는 그의 목소리. 음악을 처음 접했을 때는 뭉개져 넓게 산포되는 노래가 안개 같았다. 두 번 듣고, 세 번 듣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풍경. 연무가 감췄다가 슬쩍 내보이는, 불투명 장막을 뚫고 퍼져 나오는 적외선 같은 음악. 3분 30초가 지나자 뒤틀리는 기타. 회전하여 바깥에 머무는 다른 것들을 빨아들이는, 신중현의 기타가 날아온다. 양궁 선수가 발사한 화살처럼, 박힌다. 이것은 목소리가 아니다. 이것은 노래가 아니다. 이것은 음악이 아니다. 이것은 가청 영역을 벗어난 고주파일지도 모른다. 분명 소리인데 절대로 들을 수 없는 소리, 육체의 감각을 벗어난 소리. 에너지 그 자체인, 음파가 아니라, 전파가 되어버린 움직임, 본질적인. 이 기타에 어울리는 동사는 ‘바르다’이다. 음악에 발린 나는 통증도 잃어버린 채 허공이 된다.

신중현, 이 고유명사는 무엇을 지시하는가. 이 기호는 어떤 실체를 생성해내는가. 음악이라고 말하기에는 ‘넘치는’ 무엇이 있다. 언어를 압도하는 ‘그 무엇’이 날름거린다. 불꽃 또는 야수. 그의 심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소리의 축제. 나는 그의 노래 <사랑해 줘요>에 무릎 꿇는다. 얼어붙은 물기둥이 된다. 이 작품이 펼쳐놓는 겨울. 이 음악이 관절을 탈구시킨 후에 찾아오는 고통. 신중현의 노래는 애절하다. 뽑아내는 목소리가 아니라 밀어내는 둔중한 힘이다.

“사랑해줘요”에 이어지는 기타 연주. 이별 전의 애무 같은, 마지막 입맞춤 같은 쓸쓸함. 기타가 눈 쌓인 벌판으로 청자를 데려간다. 나는 떠나간 그 사람을 잊지 못한다. 나는 그 사람 때문에 아팠다. 그 사람이 고통이었는데, 여전히 그 사람에 묶여 있는 나와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나를 속이는 다른 나. 그런 내가 끌어안은 형벌. 한 번 더, 나는, 그 사람에게 말한다. “사랑해 줘요.” 사랑이 떠났는데 그 사랑을 갈망하는 내가 듣는 신중현의 기타…… 그의 새 앨범을 덮는다. 나는 그와 (간헐적으로!) 이별하기로 한다. (이 앨범의 수록곡 중에서 이번에 언급하지 않은 여섯 곡을 매 달 한 곡씩 감상해보려고 한다.) 더디고 깊게, 한 걸음 물러나서, 느리게 사랑하려고 한다. 신중현의 뮤즈, 김정미를 초대한다. 그녀가 방문을 연다.

목소리의 질량 : 1973년으로 돌아간다. 앨범 《Now》. 영원한 현재로 진입한다. 그녀가 노래한다. “따뜻한 햇님 곁에서 우리는 살고 있구나.” 그녀가 햇님이다. 그녀의 노래 안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이 음악은 언제나 미래형으로 진행된다. 그 시대에 존재할 수 없었던 음악이다. 어떻게 그 시대에 이 음악이 출현했을까. 신중현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는 이것을 사건이라고 불러야 한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기적을 통과하게 되었다. “고요한 이 곳”의 날아가는 새들처럼, 공간을 가로지르는, 퍼져 나가는 소리. 그녀가 입을 벌리자 노래가 피어난다. 분광기. 그녀의 입에서 빛이 발산된다. 음(音)의 악(樂)이다. 김정미의 목소리는 가라앉았다가 내려앉은 거리보다 높게 뛰어오른다. 꽃잎이 날린다. 꽃의 영역이 확장된다. 꽃의 향기가 확산된다. 봄꽃 세계 위에서 <햇님>이 방긋거린다. 김정미의 목소리는 홀씨의 솜털 같다. 바람이 되기 전에는 느낄 수 없는 공기 같다. 흙을 뚫고 오른 새싹 스프링처 럼 김정미의 목소리는 상승한다. 햇님의 이마에 닿을 것 같다. 입술이 간지럽다. 노랑 개나리 만개하여 앓을 수밖에 없는 봄의 현기증 같은 목소리. 이 음파는 굴절도 산란도 불가능하다. 이 노래는 헬륨 (helium)이다.

목소리의 부피 : 「바람」이 불어온다. 내 몸을 연다. 몸에 들어온 바람은 피가 되어 순환한다. 나는 달아오른다. 바람이 빛으로 바뀐다. 나는 서 있는 등불이 된다. 내 눈은 전구가 된다. 빛은 나에게서 빠져나가 어둠에 구멍을 뚫는다. 그곳에서 시작된 김정미의 노래가 내 입술에 도래한다. 이 오고감은 멈추지 않는다. 바람이 분다. 사랑해야겠다. 이별한다 해도 사랑을, 다시, 시작해야겠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이 노래를 들을 수가 없다. 사랑하지 않으면 그녀의 목소리가 쾌락의 입김을 닮았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없다. 김정미의 목소리는 피보나치 수열 (Fibonacci sequence)처럼 전진한다. 태풍의 소용돌이 구름처럼 상륙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입방체를 가득 채우는 빛. “보이지 않는 바람과 같이” 나도 모르게 나를 삼켜버리는, 흑점 같은, 바람이 시작된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백야(白夜) 같은 목소리. 바람이 생을 마감해도 그녀의 목소리는 영원한 바람처럼 귀환할 것이다. 바람이 불어온다. 김정미의 날숨, 바람, 노래. 그 때문에 행복한 지금 이 순간. 김정미의 노래 속에서, 우리는 부푼다. 창공을 날아 가는 열기구가 된다.

목소리의 밀도 : 김정미의 목소리는 밀생하는 봄꽃이다. 군집하는 봄꽃. 진달래 빛 목소리. 따서 입에 넣고 씹어 먹고 싶다. <봄>을 질겅거린다. 분홍이 흘러내린다. 나는 분분(紛紛) 떨어져 내린다. 김정미의 목소리는 봄의 끝에서 하얗게 타오르는 이 팝처럼 부서져 흩어진다. 햇빛을 반사한다. 고음에서 반짝일 때, 그녀의 목소리는 점액으로 돌변한다. 벌집에서 떨어지는 꿀. 달콤한 끈적거림. 새끼손가락에 묻혀 빨아먹는 아카시아 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여름은 결단코 열리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봄이다. 채움과 비움을 연속하는 그녀의 목소리. 노래가 끝났다. 꽃 다 진 후에 연두빛 세작(細雀)을 돋운 진달래가 보인다. 그녀의 노래는 봄을 횡단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봄의 시작과 종말을 아우른다. 이 곳에 있다가 저곳으로 이동한다. 이곳에도 있고 저 곳에도 있다. 동서남북을 한꺼번에 점령한다. 봄꽃, 북상하지 않았는데, 봄꽃, 피어난다. 지지 않는 꽃 같은 김정미의 목소리. 그리고 <당신의 꿈>. 그녀의 목소리, 밀도 1의 목소리. 기체였다가 고체였다가 액체가 되는 물의 목소리. 수증기의, 얼음의, 안개비의 목소리.

목소리의 고도 : 그녀는 언제나 내려온다. 위에서 아래로 강림한다. 언제나 나를 내려다본다. 그녀의 목소리는 구릉이다. <아름다운 강산>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광야를 내달리는 산맥 같다. 산, 들, 강, 하늘 그리고 도약. 높낮이를 구별할 수 없는 환청 같다. 수직과 수평이 구분되지 않는다. “봄 여름이 지나면 가을 겨울이 온다네”에서 그녀는 쏟아지는 분수였다가 상승하는 8월의 적란운 같은 느낌으 로 청자를 혼몽으로 이끈다. 패러글라이딩 같은, 윤활의 목소리. <고독한 마음>에서 그녀는 농염과 퇴폐와 몽유와 환락을 오가다가 잉크 빛 목소리로 변전하여 가슴을 저미게 한다. 그녀의 목소리, 우리를 환희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노래가 끝난 후, 내가 침묵의 밑바닥으로 잠수할 때, 그리움이 나를 재점령할 때, 나는 추락하는 눈물방울이 된다.

목소리의 온도 : 마침내 그녀는 5월 한낮의 훈풍이 되었다. 바싹 마른 찔레 향기가 되었다. 가시가 박 힌다. 그녀의 목소리가 온몸을 찌른다. 가시를 타고 열이 전도된다. 햇빛을 수신하는 가시 안테나. 어쩌면 그녀가 내 몸속의 가시를 뽑아낸 것일지도 모른다. 저며진 것이다. 그녀가 나를 피 흘리게 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뜨겁지 않은데, 청자인 나는 끓어오 른다. 나의 비등점(沸騰點)은 36.5도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닿는다. 그슬린다. 쓸린다. 집광렌즈 같은 김정미의 목소리 때문에 나는 화그르르 타버린다. 그녀의 목소리 앞에서 나는 재가 되고 만다. 그녀는 나의 신열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나를 영원한 미열 상태에 가둔다. 나는 기름이고, 그녀의 목소리 는 부싯돌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대류, 전도, 복사를 한꺼번에 실행한다. 그녀의 목소리가 나를 태운다. 나는 발광(發光)한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슴 속에서 응축한다. 열과 빛으로 맥동하는 심장이 된다. 김정미, 발전기, 등대…… 저 먼 곳의 불빛…… 펄사(pulsar).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김정미의 앨범이 미국에서 재발매되었다. 그리하여 멸실되었던 역사가 온전히 복원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김정미를 만날 수 있었다. 이 증거 앞에서, 신중현이 살아냈던 현대사를 돌이켜본다. 박정희, 10월 유신, 대마초, 대중가요 싹쓸이, 금지곡……. 강제로 삭제되어야 했던 예술이 우리에게 돌아왔을 때, 우리가 경험한 것을 ‘경이(驚異)’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 역사의 질곡을 돌파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 음악이 그 시대에 존재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경악하기 때문이다. 자긍심을 가져도 좋기 때문이다. 김정미의 노래를, 신중현의 찬란한 작품을, ‘사이키델릭(psychedelic)’이라는 용어로 뭉뚱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

김정미를 김추자와 비교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름이 있을 뿐이다. 어느 하나를 우열로 갈라내는 것은 폭력이다. <바람>에서, 김정미의 노래 뒤에서 흐느적거리면서 급소를 찌르는 기타 연주를 사이키델릭 사운드라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떤 코드 진행이 전위적이라는 평가도 중요하지 않다. 그녀의 목소리와 그의 연주가 결합하여 이루어낸 <바람>을 감상하는 이 순간에 우리를 들끓게 하는 감정과 음악이 생성하는 이미지가 이전에 없던 것이라 는 사실, 유일한 그 무엇이 현전(現前)하고 있다는 체험이 중요하다. 부사가 필요 없는 아름다움 앞에서 겪게 되는 떨림, 그 전율을 일컫는 말로 ‘숭고하다’를 떠올려본다.

<비가 오네>를 발견했다. 한 대 얻어맞는다. “주룩주룩 비가 오네 하늘에서 비가 오네 우산 위에도……”. 읽는 대상으로 파악하는 경우, 이 텍스트에는 시적인 것이 전혀 없다. 듣기의 대상인 음악을 재생할 때 시적인 것이 엄습한다. 읽는 시가 아니라, 듣는 시가 되는 순간, 이 작품은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비의 리듬이 생생하다. 노래와 기타가 하나가 되어 뭉크러진다. 비는 없는데, 비가 다가와 몸을 적신다. 환각일까. 심벌즈가 빗방울 같은 악센트를 구현하고, 기타는 흘러내리는 빗물이 되고, 가수는 포도(鋪道)에 튀어 오르는 빗방울이 되어 비 내리는 날을 재현한다. 오래된 것이 분명한데, 그 시간의 퇴적이 변성시킨 음악의 낯섦. 날선 새로움이 쇄도한다.

신중현의 기타는 마취제이다. 도취와 현혹이다. 신기루라고 해도 좋다. 환상이라고 하면 어떤가. 연주자의 운지, 튕겨지는 현. 기타라는 몸을 어루만지자 음악이라는 신비가 펼쳐진다. 이것은 명백한 현실이다. 청자에게 선택권은 없다. 음악이 나타나자 ‘나’를 상실한다. 함몰이다. 용해이다. 절개이다. 영원한 행복이 여기에 있다. 시간을 파열시키고 공간을 압착하는 신중현의 기타와 김정미의 육성.

이해와 분석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음악. 감정을 뭉개버리는 이상한 중력. 인장(引張)된 음과 음이 빚어내는 질식 직전의 악력. 음악의 마력. 홀려도 좋다. 음악의 노예가 된다 해도, 시를 잃는다 해도 좋다. “무지개 타고 햇님을 만나러 나와 함께 날아가자”는 김정미의 청유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영원한 이곳에 그대와 손잡고 햇님을 보면서 다정히 살리라.” 그렇게 할 수 있다, 신중현이라면, 그의 뮤즈 김정미라면. 두 사람이 창조한 이 음악이라면, 그 어떤 희생도 받아들일 수 있다. 명반이 될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강산>이 실려 있기 때문이 아니다. 노래와 연주가 조화롭다. 필연적이다. 작곡자가 가수를, 가수가 연주자를, 기타가 목소리를, 목소리가 드럼을 침범하지 않는다. “그 얼마나 좋은가”.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노래들. 서로가 제자리에서 정확하게 앨범의 컨셉(concept) 과 포메이션(formation)을 조직하는 힘. 이것을 시스템이라고 말할 수 있다.

“꽃잎이 여울 따라 흘러 가듯이 그리운 그 시절로 흘러가겠네.” 듣는 주체인 내가 돌아가겠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김정미가 지금 이곳으로 귀환하여 나를 ‘그 시절’로 빨려들게 한다. <당신의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영원한 그 곳”이 여전히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에, ‘당신’ 때문에, 나는 그 꿈의 자리에 음악을 채워 넣는다. 그녀와 함께 흥얼거린다. “나 나 나 나나나 나나나 나나 헤이”. 결국, 나는 지워진다. 김정미의 <봄바람> 속에서 흔적도 없이 흩어진다. 어디로 가고 싶나. 그녀의 봄바람 속으로, 불어라 봄바람! 어디로 가고 싶나. 봄바람 따라가고 싶네, 불어라 봄바람! 나는 그녀의 봄바람 속에 떠도는 꽃잎. 불어라 봄바람! 나를 멈추지 않는 바람이 되게 해주오. 음악이 거주하는 봄의 따스한 아지랑이가 되게 해 주오. 불어라 봄바람!
 

 

* 《쿨투라》 2019년 10월호(통권 6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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