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Theme] '박상영 소설가' 그러거나 말거나'의 유머와 페이소스
[12월 Theme] '박상영 소설가' 그러거나 말거나'의 유머와 페이소스
  • 허희(문학평론가)
  • 승인 2019.12.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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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성소수자는 아직 비주류다. 그렇지만 한국문학에서 “성소수자 서사 게이 소설”은 이제 주류가 됐다. 두 작가의 활동에 힘입어서다. 김봉곤과 박상영. 이들은 2018년 나란히 소설집 『여름, 스피드』와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를 출간하면서 새로운 퀴어 문학의 탄생을 알렸다. 그리고 올해 박상영은 연작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을 내놓아 작년 본인들이 주도했던 흐름을 잇고 있다. 조만간 김봉곤이 새 책을 선보인다면 박상영과 자연스럽게 바통 터치를 하겠지. 그렇게 그들은 퀴어문학의 진영을 공고히 한다. 두 작가가 작품을 쓰는 한, 거기에 자극받은 또 다른 작가가 출현을 예비하는 한, 성소수자 서사가 다시 변방으로 쉽사리 밀려나지는 않을 것이다.

위에서 김봉곤과 박상영이 새로운 퀴어문학의 탄생을 알렸다고 썼다. 도대체 무엇이 새로울까? 간명하게 말하자. 이들은 성소수자를 이른바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배척당한 피해자로만 형상화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없다는 게 아니다. 그것만 초점화하다보면 문제가 생긴다는 뜻이다. 자신이 진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군가가 동성애 혐오를 하든지 말든지 내버려둔다. 대거리하는 것 자체가 에너지 낭비라서 그렇다. 대화가 안 통하는 상대에게 설득은 무의미하다. 외곬인 당신의 인정 따위 조금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살겠다. 이런 마음으로 두 작가는 일하고, 반하고, 연애하고, 헤어지고, 아파하는 게이들의 삶을 그린다.

그 적확한 사례 모음이 『대도시의 사랑법』이다.(김봉곤의 소설에 관해서는 다음에 더 언급할 기회가 있으리라 믿는다.) 2019년 ‘문학동네 젊은 작가상’ 대상 수상작 「우럭 한점 우주의 맛」을 포함한 세 편의 소설(「재희」 「대도시의 사랑법」 「늦은 우기의 바캉스」)이 실린 단편집이다. 네 작품 모두 ‘영’이라는 인물의 1인칭 스토리라 연속성이 있다. 그래서 연작소설로 분류된다. 제목에 드러나듯 테마는 사랑(과 이별)이다. 서울로 대표되는 대도시, 이곳에 사는 게이들의 사랑법이 이 책에 핍진하게 담겨 있다. 장기인 유머와 페이소스를 박상영은 두 번째 책에서도 능란하게 구사한다. 그런 점에서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에 수여된 2019년 ‘허균문학작가상’도 실은 후속작 『대도시의 사랑법』까지 아우른 시상이리라 짐작된다.

박상영식 유머와 페이소스는 대체 어떤 것인가? 표제작 「대도시의 사랑법」으로 해명하고 싶다. 영은 글을 쓰면서 아르바이트로 연극 프로그램북 파는 일을 하고 있다. 춤추고 술 마시는 걸 즐기는 그. 영은 클럽에서 만난 바텐더 규호에게 호감을 느낀다. 규호도 그를 좋아하고. 한데 영은 이전 파트너에게서 옮아 HIV에 감염된 상태다. 그 사실을 영은 규호에게 털어놓는다. 그 장면을 인용한다. 이 부분에 녹아 있는 박상영식 유머와 페이소스를 감상해보시길. “만약에 이런 내가 부담스러우면, 실은 그게 더 자연스러운 일이고 자연의 섭리고, 따라서 그냥 가도 돼. 대신 조용히만 있어줘. 내가 지금처럼만 살 수 있게. 그냥 낙산공원 언저리에 어느 털이 많이 난 남자가 있다 정도만 기억해줘. 아니 아예 잊어줘. 나 같은 건 네 인생에 없던 사람으로 치고 언제나처럼 주중엔 유설희 간호학원에 가고 주말이면 클럽에서 술을 말고 그러면 돼.”

HIV 보균자임을 밝히는 대목에서 영은 자기를 비극의 가련한 주인공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는 “그냥 낙산공원 언저리에 어느 털이 많이 난 남자가 있다 정도만 기억해” 달라는 유머를 발휘할 정도의 여유가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유머 뒤에는 페이소스가 자리한다. HIV는 사라지지 않으니까. 이것은 그의 사랑을 가로막는다. 이후에 네가 나를 더 만나지 않는다 해도 그게 네 탓은 아니라고 하지만 영이 슬프지 않을 리가 없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성곽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 나사처럼 생긴, 멀미가 날 만큼 어지러운 길을 비효율적으로 걸어 내려오는데 이상하게 다리에 왜 자꾸 힘이 풀리지. 입술은 왜 깨물고 있으며, 아래턱은 왜 떨리냐. 아직 난 멀었다.” 이렇게 그는 상처 입었다.

아프다. 허나 아픔을 과장해 토로하지는 않는다. 신파조의 눈물이라니. 그것은 대도시의 사랑법이 아니다. 그때 페이소스의 짝으로 유머가 사용된다. 박상영 소설에서 둘은 늘 같이 묶인다. 겉으로 헤헤 웃고 있다고 그가 속없지 않다는 말이다. 더불어 한 가지 더. 박상영 소설은 평범한 멜로드라마의 전개를 거부한다. 비련이 되려면 규호는 영을 떠나야 한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하나. 규호는 후들거리며 성곽 길을 내려가는 영을 붙잡는다. 두 사람의 인연은 계속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으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논리적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혹자는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게 바로 2019년 아이콘으로 떠오른 박상영식 퀴어문학의 방식이다. 동성애 혐오? HIV 공포?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사랑을 밀고 나가겠다는 선언.

“작가이기 이전에 치열하게 2000년대를 살아낸 한 명의 청춘으로서,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시민으로서 내겐 이 문제를 쓰고 말하는 게 몹시 절실했다.” 『대도시의 사랑법』 말미에 수록된 작가의 말이다. 이 문장에서 올해 박상영에게 쏠린 관심의 이유도 찾을 수 있다. 특수성과 보편성의 소설적 교착이다. 피해자다움만 강조하는 성소수자 재현을 그는 이미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에서 비판했다. 박상영 소설은 종래의 퀴어문학 계보를 낯설게 잇기에 특별하고, 이를 오늘날의 시민성과 접합하여 확장된다. “우리의 얘기를, 나의 얘기를 써주어 고맙습니다.”라는 독자의 피드백도 그렇기 때문에 받은 것일 테다. 이는 박상영이 구현한 소설적 리얼리티의 결과다. 지지부진, 그래도 한국문학은 좋은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 《쿨투라》 2019년 12월호(통권 6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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