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Theme] 쥐띠 해와 나의 야행성
[1월 Theme] 쥐띠 해와 나의 야행성
  • 김선태(시인, 목포대 교수)
  • 승인 2019.12.27 17: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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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60년 경자년에 태어나 2020년 또다시 경자년을 맞이했으니 나이가 만 60세이다. 육십갑자의 ‘갑()’으로 되돌아와회갑(回甲)’인 셈이다. 회갑이라는 단어는 아직 내게 무겁고 낯설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어렸을 때 회갑연을 맞이하신 백발성성한 아버지가 두루마기를 입고 앉아 가족들로부터 큰절을 받던 기억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아직 머리에 첫눈도 내리지 않았고, 출가한 자식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철이 덜 들었으니 도대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피하기 어렵다.

흔히 ‘쥐의 속성을 표현하는 말로 민첩성, 근면성, 다산성, 야행성을 든다. 그러나 이들 중 앞의 세 가지 속성은 내 천성과는 왠지 거리가 먼 듯하다. 나는 행동이 굼뜨고, 게으르며, 자식도 두 명(요즘은 두 명도 많은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행성 하나만큼은 타고난 듯하다. 지금도 나는 좋아하는 일은 밤에만 할 만큼 아행성이 강한 인간이다.

따라서 지금껏 내가 거느려온 야행성의 습관을 일일이 반추하는 것으로 쥐띠 해를 맞은 마음을 대신하고자 한다.

첫째,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 늦게 자는 습관은 어렸을 때부터 비롯됐던 것 같다. 시골이라 저녁이면 일찍 잠이 드는데, 나만 잠이 안 온다고 불을 켠 채 말똥말똥 깨어있다 보니 식구들의 원성이 자자했고 아침에 학교 갈 때도 지각하기 일쑤였다. 이런 습관은 결혼을 해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비교적 일찍 잠이 드는 아내에 비해 나는 불을 끄고도 무슨 생각이 그리 많아 오래도록 전전반측이다. 그래서 아내의 잠을 방해 안 하려고 거실 소파에서 자거나 아예 각방을 쓴다. 요즘도 내가 잠드는 시간은 대략 새벽 2~3시이다. 자려고 애를 써도 잠이 안 올 때면 새벽 시간에 거실에서 수면제 삼아 홀로 술을 마실 때가 많다. 그럴 때는 새벽 5시쯤에야 잠이 들었다가 출근하기 위해 아침 8시에 강제로 깬다. 그러다보니 늘 잠이 부족해 정신이 몽롱하고 근무시간에 졸기 일쑤다. 이쯤 되면 이는 습관이 아니라 심각한 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둘째, 밤에만 술을 마신다. 나에게 있어서 밤은 술시(酒時)이다. 백주대낮 음주는 절대 사양이다. 낮에는 잠이 부족해 시종 무기력하다가도 저녁이 오면 아연 활기가 넘친다. 퇴근시간이 출근시간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술집거리에 불이 켜지면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춰진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만 술에 약하다. 그러면서도 마시면 끝까지 가려는 못된 주벽이 있어서 가끔씩 실수할 때가 있다. 그런 다음날이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온다. 즐긴 만큼 고통이 따르니 공짜가 없다. 그러면서도 술과 무슨 원수를 졌는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마신다. 이쯤이면 술에 중독된 환자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다행인 점은 술에 취해 귀가한 날만큼은 주저 없이 단잠을 잔다는 것이다.

셋째, 밤에만 시를 쓴다. 나는 글쓰기에 있어서 나름대로 결벽증을 지니고 있다. 반드시 혼자 있어야만 글이 써진다. 누군가 옆에 있으면 한 줄도 쓸 수 없다. 심지어 신혼시절 곁에서 잠든 어린 딸을 의식한 나머지 글을 못 쓰고 만 적이 있다. 그리고 밤에만 시를 쓴다. 그것도 식구들이 모두 잠든 깊은 밤에만 시를 쓴다. 더욱이 술을 먹지 않은 맑은 정신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집중력이 생기고 좋은 시가 써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늘 과작이다. 원고청탁이 들어오면 시간이 없어 차일피일하다가 늘 마감 날에 이르러서야 부랴부랴 매달린 경우가 많다. 참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글쓰기 습관이다. 진정한 작가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넷째, 밤낚시를 즐긴다. 나는 낚시를 좋아한다. 그것도 밤바다 낚시를 좋아한다. 내가 낚시를 유일한 취미 삼아 즐기는 것은 꼭 물고기를 낚기 위해서라기보다 스스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이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항구도시 목포에 산 지 올해로 40여년째 접어든다. 산보다 물을 좋아하는 내게 있어서 목포는 바다가 없다면, 이웃한 섬들이 없다면 너무 외지고 막막해서 살기 어려운 곳이다. 따라서 바다와 섬은 나의 이웃이자 친구이다. 나와 그들을 연결시켜주는 것이 낚시이다. 그런데 왜 낮이 아니고 밤인가. 그것은 밤이 주는 친숙감과 고요함 때문이다.

고기가 물든 안 물든 아무도 없는 바다 기슭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바닷물만 바라보고 있어도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다. 보름달이 떠서 바다가 달빛 윤슬로 반짝일 때면 그렇게 황홀할 수가 없다. 그렇게 홀로 앉아서 밤을 꼬박 새우다 보면 물고기 대신 시를 낚아 올리기도 한다. 주어종도 밤에 잘 무는 농어이다. 그간 나는 밤바다에서 수많은 농어의 바늘털이를 경험한 농어 전문 꾼이다. 아마도 죽으면 저승에 가서 농어 조상들에게 호된 벌을 받을 것이다 .

다섯째, 야간학교를 다녔다.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난 나는 간신히 중학교를 마치고 도시로 가출했다. 낮에는 직장에서 학비를 벌어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역시 가난 때문에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지 못하고 학비가 싼 시골 국립대학을 자력으로 졸업했다. 대학원도 마찬가지다. 어찌어찌해서 지금은 대학교수까지 되었지만, 그래서 한 가정을 책임진 가장이 되었지만, 그때 가출 이후 지금껏 온전히 귀가하지를 못했다. 지금은 귀가하고 싶어도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야간학교를 다닌 사실은 지금도 목구멍에 걸려 쉽게 내뱉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쥐의 속성과 관련한 나의 야행성을 나열해 놓고 보니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이 더 많아 치부를 드러낸 양 속이 쓰리고 아프다. 쥐띠 해를 맞아 좋은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잡지사 편집부의 바람을 어긴 것도 같아 면목 없고 송구스럽기도 하다. 이제 자의든 타의든 내 나이는이순(耳順)’을 지나회갑(回甲)’에 이르렀다. 나이가 주는 중압감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앞으로는 내 속에 켜켜이 쌓여 있는 잘못된 야행성을 털어내는 쪽으로 조금씩 삶의 방향을 틀어야하겠다고 다짐해본다.

내 사랑은 이승과 저승에 두루 뻗쳐서
밤마다 꿈의 밤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우네
너는 이승에서 내가 놓친 대물 농어
그 어떤 물고기로도 대신할 수 없는 월척
네 퍼덕이는 영혼을 다시 건져 올리기 위해
이승의 경계 너머 저승까지 찌를 흘렸지
- 김선태 시 「농어」

 

 

* 《쿨투라》 2020년 1월호(통권 6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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